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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Jun 01. 2019

우리 헤어지자.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2


12월 31일, 드디어 지긋지긋한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가 싫었다. 커서 선생님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에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은 예전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의 틀에 박힌 교육방식이 싫었다. 난 뭘 해도 걸리는 아이였다. 똑같이 떠들어도 나만 혼나고, 같이 사고를 쳐도 내가 치면 일이 커진다. 눈치가 없는 건지 운이 없는 건지 둘 다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지는 학교가 싫었다.


재수학원에서 본 모의고사에서 수학을 0점 받았다. 난 심지어 수포자(수학포기자)도 아니었다. 재수학원에서 정말 좋은 수학선생님을 만났다. 여전히 수업은 듣지 않았지만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수업시간에 열심히 기출문제를 풀고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에게 달려가 모르는 문제들을 물어봤다. 지난 수능에서 수학은 50점을 받았는데 1년 만에 50점이 올라 만점을 받았다. 꿈이 없던 나는 공부만 잘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꿈은 나중에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공부만 하느라 꿈을 미처 못 만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고 미래가 보장된 대학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몸서리치게 싫어하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 패션이 좋았다. 옷 입는 일, 예쁜 옷을 만드는 일이 하고 싶었다. 아무도 몰래 꾸준히 준비했다. 미국 패션 학교에 합격한 뒤 알렸다. 미국에 가겠노라고.


집에서 난리가 났다. 할머니는 학교에 전화해서 교장선생님께 내 사표를 막아달라고 부탁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들은 시집갈 나이에 오래도록 알고 지내 가족 같던 남자 친구를 남겨 두고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학교생활은 좋아할 줄 알았다. 꿈에도 그리던 유학이니까.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난 국가를 막론하고 학교와 맞지 않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장소만 다를 뿐 틀에 짜인 생활은 같았다. 몇몇 좋은 교수님도 만났지만 대체로는 그냥 그랬다. 하루하루 반항하듯 살았다. 인생에 반항하고 학교에 반항하고 스스로에게 반항하며, 그렇게 졸업이 다가왔다.


나는 학교에서 딱히 친구가 없었다. 늦깎이 유학이라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기도 어려웠고,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지만 한국인이어서 믿고 나름 친하게 지냈던 친구는 다른 친구와 친해지면서 내 뒤통수를 때렸다. 서른 넘어 왕따를 당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후에 착한 외국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한 번 놀란 가슴 때문인지 학교 친구는 학교 친구일 뿐 마음이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그나마 마음 두고 기댈 곳은 나와 함께 살았던 꼬질이들과 민익씨 뿐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하는 전시회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와줬으면 좋겠다.


“올 거지?”


“응. 갈게.”


민익씨에게는 다소 강압적이었지만, 친구들에게는 부담이 될까 봐 만약 시간이 되면 들르라고만 했다. 친구들도 알겠다고 했다. 고맙고 기분이 좋다. 인생에서 인연이 체에 걸러지는 순간의 느낌이다. 전시에 오기로 했던 민익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그에게 연락이 왔다.


“어쩌지? 급한 일이 생겼어. 회사에서 좀 더 남아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어쩔 수 없지. 늦게라도 올 거야?”


“응. 그렇게 해볼게.”


“알겠어.”


일인데 어쩌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수업에서 만나면 이야기도 곧잘 하고 지내던 로빈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도 혼자였다. 친구들이 아무도 안 와서 너무 우울하다고 슬퍼했다. 그 친구는 친구가 많아 보였는데 친구들이 시간이 안되나 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하면서, 그저 로빈을 축하하고 위로했다.


“방금 집에 왔는데 너무 피곤해서 못 갈 것 같아.”


민익씨다. 그가 연락한 시각은 오후 8시였고, 전시회에 도착하면 밤 9시다. 다음 날은 회사를 가야 한다. 그는 전기회사에 다녀서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일리가 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모든 면에서 일리가 있게 대답했지만 한편으론 서운하다. 나에겐 그래도 꽤 중요한 일인데. 늦게라도 와줬으면 했는데 내 곁에 그가 없는 게 허전하다. 난 이 학교에서 그냥 외톨이 팔자인가 보다 싶고, 전시회가 사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어서 그만 집에 가려던 찰나,


“언니!!!”


같이 살던 룸메이트들(뉴욕 꼬질이들)이 날 보러 왔다. 그들은 내가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혹시나 외로울까 봐 기꺼이 와 준 것이다. 집에서 급하게 만든 듯한 조화 뭉치를 포장도 야무지게 해서 왔다. 부담될까 봐 두 번도 안 물었는데, 정말 고맙다. 이 먼 나라에서 마음이 따뜻한 친구들을 알게 된 것이 기쁘다. 민익씨는 안 왔냐는 물음에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응. 오늘 바빠서 못 왔어.”


다시 섭섭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자기도 와줬으면 했는데...”


“미안해. 늦게라도 갈 걸 그랬다.”


만약 내가 아닌 민익씨의 졸업 전시회가 있었다면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가 여태까지 해 온 작품들이 궁금할 것 같고, 고생했다고 꽃 한 다발 들고 축하해주기 위해서. 아무튼 나는 그렇게 섭섭함을 묻어넘겼다.


졸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구직을 시작하기 전 모처럼 시간이 생겼다. 학교 다닐 때는 너무 바빠 여행도 한 번 못 갔는데, 졸업 기념으로 민익씨와 여행을 가기로 했다. 민익씨의 대학교가 있는 플로리다 주를 가기로 했다. 거기엔 민익씨 친척들이 많다고 한다. 삼촌, 사촌들, 외할머니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다며 민익 어린이 또 신이 났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기로 했다.


나는 유니버셜 스튜디오 옆에 있는 디즈니 월드를 열 살 때 가봤다. 열 살짜리 꼬마에겐 너무 넓은 놀이동산을 걸어 다니다 보니 다리가 아파서 휠체어를 빌려 탔다.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기나긴 줄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대기줄을 슈퍼 패스하고 두 명의 직원들이 양쪽에서 나를 번쩍 들어 놀이기구에 태웠다.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영어를 못했다. 그래서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남자 친구와 간다.

실컷 즐겨야지. 줄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며 그가 슈퍼패스 자유 이용권을 끊도록(?) 했다. 내 졸업 선물이라 생각하라며 소심하게 우겼다.


드디어 떠나는 날. 우리는 공항에서 패닉에 빠졌다. 모든 준비물을 필요 이상으로 챙겨 왔는데 여권을 빼먹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민익씨는 공항에서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렸다. 우리 둘 다 신분증이 없는 것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공항 직원에게 설명한 후 본래 허용이 안 되는 뉴욕 거주자 신분증을 보여줬고, 민익씨는 페이스북 프로필(...)을 보여줬다. 나는 쉽게 통과했고, 직원은 민익씨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기적적으로 그가 나왔다. 비행기 시간이 10분 남았다. 정신없이 날아서 비행기에 탔다. 여행을 끝내도 될 것 같다. 공항에 들어오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국내선이었으니 망정이지 국제선이었다면 우린 진작 집에 가야 했다.


민익씨는 생각보다 체력이 약했다. 그는 조금만 걸어도 지쳤다. 사람이 많은 것도 싫어했다. 나도 사람이 많은 건 싫지만 놀이기구 타는 건 좋다. 나는 하루 종일도 탈 것 같다며 놀이공원을 헤집고 다녔다. 그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급기야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그래도 하얀 백인인 그는 창백해지면 몸에 피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안 되겠다. 코카콜라 부스로 데려가 벤치 위에 눕혔다. 무릎베개를 해줬다. 사진도 많이 찍고, 여기에 있는 모든 놀이기구를 밤새도록 타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우리 둘 다 신분증이 없어 밤에 간단한 맥주 한 캔도 마실 수가 없다.


그가 누워있는 동안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내가 우겨서 억지로 찍은 사진들 속의 그는 하나같이 가짜 웃음을 짓는 인공지능 로봇 같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다. 맥이 빠진다. 심기일전하고 놀러 왔는데, 나만 신난 것 같아 속상하고 아쉽다. 연애 초반 나만 좋아하는 것 같던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의 삼촌과 사촌들은 여행 중이라 만날 수 없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신 그의 외할머니를 만났다. 그의 외할머니는 도미니칸(도미니카 리퍼블릭 사람)인데 조금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분이셨다. 민익씨의 어머님이 떠오른다. 그의 어머님도 무섭고 세 보이는데 알고 보면 여리고 마음이 따뜻하다. 외할머님은 스페인어만 하시고 영어를 못 하신다. 민익씨가 뭐라고 말만 하면 ‘오~ 예스 예스’ 하면서 웃기만 하신다. 마치 처음 내가 미국에 와서 미국인들과 대화할 때의 모습 같다. 나는 주로 할머니가 키우시는 고양이와 놀았다.


테이라는 여사촌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단다.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외할머님과 티비를 보며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테이는 오지 않았다. 나랑 놀 때는 그렇게 피곤해하더니 전화도 한 통 안 해보고 마냥 기다리는 게 맘에 안 든다. 내가 피곤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냥 혼자 들어가 버릴까 싶다가도, 오래간만에 보는 사촌일 텐데 싶어서 그러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아버렸다. 외할머님이 내가 피곤한 것 같다고 하셨고, 본인은 먼저 자겠다고 들어가셨다. 나도 들어갈까? 고민하다 2시간이 더 흘렀다. 자정이 지나 1시가 다 되었을 때 테이가 왔다. 둘이 잠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정치 이야기로 번졌다. 민익씨는 엄청난 보수파이고, 테이는 엄청난 진보파다. 민익씨가 대학을 다닐 때 종종 둘이는 그렇게 정치 논쟁을 했다고 한다. 트럼프를 인간적으로 본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테이의 편을 들었다. 옆에서 지켜볼 때 민익씨나 테이나 딱히 논리는 없었다. 민익씨가 좀 더 논리적인 듯했지만 그가 옹호하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았다. 피곤했다.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그 논쟁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이 사람 나랑 놀 때 피곤해하던 사람 맞아? 다시 섭섭해졌다.


결국 할머님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내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할머님은 우리나라 할머니들처럼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니 민익씨보고 결혼을 언제 할 거냐고 했다. 나와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았고, 서로 처음 본 자리였기에 명백하게 진지한 질문은 아니었다. 본인이 더 나이 드시기 전에 손자의 결혼식에 가보고 싶기도 해서, 장난으로 던진 말씀인 듯했다.


“그러기엔 너무 이르죠.”


갑자기 번뜩 그의 나이가 떠오른다. 그는 나와 나이차가 많이 난다. 나는 그보다 여덟 살 연상이다. 


여행에서 난 마음이 지쳐서 돌아왔다. 한 숨 푹 자고 나니 조금은 나아졌다. 그에게 맑은 정신으로 물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누구에게 던지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자기는 결혼을 언제쯤 하고 싶어?”


“음... 한 서른 쯤?”


“그럼 난 거의 마흔인데?”


“응. 그럼 너 마흔에 하지, 뭐.”


이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방귀인지 모르겠다.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나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망설였던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그의 연애 상대일 뿐 진지한 결혼상대는 아닌 것이다. 당연하다. 그는 아직 창창하고 어리다. 이해가 되니 더욱 슬프다. 


마흔까지 그와 연애를 하다 헤어지고 평생 솔로로 남은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린 남자랑 만나면 그 남자가 죽고 못살아서 쫓아다니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누가 그랬다. 이건 내가 쫓아다니는 형국이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나와의 미래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나 그만 가봐야겠어.”


“지금 가게?”


도망치듯 현관문으로 향하는 나를 그가 뒤쫓아왔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내일 우리 엄마 집에서 하는 파티에 올 거지?”


내가 알 바인가? 나와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는 남자의 가족들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우리 그만하는 게 좋겠어.”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나랑 헤어지려는 거야?”


“응.”


멍하니 서있는 그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참았던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졸업 기념으로 그와 함께 처음 떠난 여행은 이별 여행이 되었다. 졸업전시회에도, 함께 간 놀이공원에도, 그의 외할머니 댁에서도 내가 원했던 따뜻한 그는 내 곁에 없었다. 함께 있어도 지독히 외로웠다. 허망하게 부서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다신 보지 않을 그가 사는, 다신 오지 않을 그의 아파트를 떠났다.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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