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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Jun 10. 2019

내가 잘할게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3



민익씨와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헤어졌다.


그가 다니는 회사의 오피스 크리스마스 파티는 12월 첫째 주였다. 6개월 만에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모질게 뱉어 낸 이별통보다.


나는 비혼 주의자였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당시 부모님은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은 3대 거짓말이라며 녹음해 둘 테니 나중에도 똑같이 말하나 두고 보자고 큰소리를 떵떵 치셨다. 이제 그들은 본인들의 딸을 잘 아신다. 녹음을 안 해두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는 뜬금없이 나는 그래도 손주가 보고 싶다고 폭탄선언을 하신다거나, 친구들의 손자 손녀 이야기를 꺼내신다거나, 귀여운 아가들이 나오는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며 흐뭇한 할아버지 웃음을 지으신다거나 하며 본인의 취향을 스리슬쩍 내비치신다.


뭉근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 아이가 싫어서는 아니다. 선생님을 할 때도 나는 아이들이 좋았다. 간혹가다 오직 자기 아이만 신경써주기를 바라는 학부모를 상대하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그 누구의 아이인지에 관계없이 아이들만큼은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만큼 표현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도 내가 예뻐하는 것을 알았는지 나는 평가 시즌에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는 높게 나오고, 동료 교사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선생님이 되어도 선생님의 예쁨을 받지 못하는 교사였다. 학생 때처럼 굳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뒤늦게 나의 적성을 깨닫고 선택한 일에 욕심이 너무 많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꼈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임신 후부터 최소 4년간 온전히 아이와 함께하며 무한한 사랑을 주고 싶다.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가져오는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햇수에 관계없이 그 어떠한 크기의 희생이라도 치르신 어머니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한다.

다만 내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내 아이를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인지, 과연 그 희생을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육아로 인해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해 나는 오로지 그것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나의 아이를 책망하거나 탓하지 않을 수 있는지, 여러 물음이 쏟아지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둘째, 우리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다. 나의 어머니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의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근무하다 결혼을 기점으로 가정주부로서 우리 가족에 올인하셨다. 가족들 아침밥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챙겨주고 아버지 뒷바라지를 알뜰살뜰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나는 우리 어머니를 존경하고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지만 도저히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고,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준비가 언제 될지는 모르겠다.


‘내 아이’는 아직 나에게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진다.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그때가 안 올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선택을 존중받길 원한다.


한편 결혼에 대한 생각은 바뀌었다.

난 심하게 말하면 연애 중독자다. 평생 연애만 하고 결혼은 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 생각은 누군가를 오랫동안 만나고 인연을 이어가면서 달라졌다. 가족이 아닌 그 누군가가 곁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준다는 사실은 나의 일상에 많은 활력을 더해준다. 연애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일어설 수 있는 자립심을 느끼게 해 주면서도, 가족처럼 곁에 두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선사해준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다. 딱히 정해둔 기한은 없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든다면 결혼을 하고 싶다.


민익씨는 지금 당장은 당연히 아니더라도 오래 두고 만나보고 싶었다. 설사 중간에 헤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 그가 나를 많이 좋아하고, 나와 함께 하는 먼 미래까지도 생각해주길 바랐다. 만난 지 6개월밖에 안 돼서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외국인 마인드를 집어치우고, 내 나이와 생각을 고려해주는 배려심을 보여주길 바랐다. 적어도 소통을 차단한 일방적인 대답은 하면 안 됐다. 현자 타임이 오게 만든 그가 밉다. 헤어지자고 해놓고 다시 연락하는 건 내 특기다. 하지만 민익씨에겐 예외다. 그를 잊을 거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말은 몇 안 되는 성공 케이스를 가진 커플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자 이상이다. 앞으로는 나이가 비슷해서 삶의 단계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한다.


민익씨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일하는 곳 근처에서 알게 된 사람과 데이트를 했다.

그는 나와 동갑인 미국인이고,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이다. HBO 등의 큰 기업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을 보조해 촬영하는 프리랜서 기업에서 일하고 있단다. 자기는 술을 안 마신다며 대낮에 만나 차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술을 안 마신다는 건 애주가인 나에게는 마이너스지만 배우자로서는 플러스다. 유니언스퀘어 근처에서 만나 찻집을 찾아다녔다. 차 한 주전자가 거의 7-8만 원 수준이다. 금가루를 탔나 보다. 결국 간식으로 도넛을 먹으러 들어갔다.


영상을 찍는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최근 보고 싶은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영화 이름을 말하자 그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뭐? 그 영화를 안다고?? 나 너랑 결혼해야겠어!!!


작은 도넛 가게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친 그는 민망했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나가자고 해서 서점에 갔다. 서로 책을 하나씩 골라 읽어주기로 했다. 나는 말썽꾸러기 아들에게 읽어줄 법한 잔소리 하는 동화책을 골랐다. 책의 주인공 이름을 그 사람 이름으로 바꿔서 읽어줬다. 꺄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만난 첫날부터 그가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엔 언제 만나지 내일 볼까부터 시작해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정하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자주 한다. 꼭 민익씨를 만나기 전의 연애로 돌아간 기분이다. 생긴 것도 반반하고 연애를 많이 해 봤는지 매너도 좋고, 직장도 괜찮고 이야기하면 재미있다.


근데 감이 안 온다.


처음 만나서 그런가 싶어서 다음엔 이야기가 나왔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사실 그 영화는 민익씨가 소개해줘서 흥미가 생긴 영화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보게 될 줄 몰랐다. 너무 슬프지만 민익씨를 잊고 싶다. 행여 이 사람과 잘 되지 않더라도 나는 내 삶을 즐길 거다. 괘씸한 민익이 녀석을 얼른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거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그는 자기 주변에 한국인 친구가 많다고 했다. 그가 졸업한 학교는 한국인이 많이 다닌다. 하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가 거의 대부분이란다. 나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미국도 좋고 한국도 좋아. 비자가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내가 너 책임질게.


그가 말한다. 나와 결혼하겠다고 소리친 이후 두 번째 선언이다.


뭐지?

나는 아직 네가 좋다고도 한 적이 없는데 네가 뭔데 날 책임져? 허언증이 있나? 미국인이면 다냐?


책임지려 하지 않는 관계에서 벗어나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을 만났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이상한 사람인가 싶고, 진중하지 않은 사람 같다. 멀어지고 싶다.


그와 그만 만나기로 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유를 추궁하며 나를 붙잡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이어지며 갈수록 강도가 세져서 혹시 이 사람이 날 스토킹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만류하고 중간에서 헤어지길 잘했다. 그만 만나기로 한 것도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괜히 민익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몇 번이고 열어보고, 페이스북을 염탐하며 그의 자취를 더듬는 행동이 뜸해졌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게 되겠지.


서글프지만 인생은 앞날을 향해 계속되어야 한다는 내 삶의 모토를 되새긴다. 끝난 건 끝난 거다. 뒤돌아보지 말자. 민익씨가 도미닉이 되고 그저 한 때 만나던 남자로 변해가던 중 그에게 카톡이 왔다.


Hey.

 

카톡 친구가 나 밖에 없어서 이제 카톡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텐데 아직도 안 지웠네. 그도 나를 그리워했을까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아린다.


“너 주려고 크리스마스 선물 산 거, 아직 내가 가지고 있어. 전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이건 만나고 싶다는 거다. 할 말이 있는 걸까, 만나면 무슨 말을 하지, 그럼 다시 사귀게 되는 건가, 아님 진짜 선물만 전해주려는 건가, 혹시 마지막으로 선물을 전해주고 나를 완전히 털어버리려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또다시 내 머릿속을 채운다.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


“그래. 어떻게 전해줄 건데?”


“네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냥 너희 집 앞으로 갈게 하면 될 것을 소심쟁이 같으니. 그가 우리 집 앞에 오는 건 위협적이지도 무섭지도 않다. 욱해서 그냥 택배로 부치라고 하려다가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대체 무슨 심산인지 궁금해졌다.


“이번 주 토요일 2시쯤 우리 동네로 올래?”


“응. 그럼 그때 봐.”


토요일 2시. 그가 도착했다.


“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최대한 예쁘고 밝은 표정으로 그를 반길 거다. 네가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던 심심풀이 땅콩 여자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너 빼고 모든 남자들이 나와의 미래를 생각하지!! 이런 컨셉으로 말이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그간 마음고생으로 날씬해진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몸에 달라붙는 회색 니트 원피스를 입었다.


“안녕”


최대한 밝게 웃으며 민익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슬로비디오처럼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동안 날 많이 그리워한 것 같다.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보자 나의 당찬 여자 코스프레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잘 지냈어? 밥 안 먹었으면 밥이라도 먹을까? 아님 차를 마실래?”


민익어린이는 커피를 쓰다고 안 마신다. 그와 만날 적에 술도 쓴데 왜 술은 잘 마시냐고 물어보니 좋아하진 않지만 분위기상 마시는 거란다. 어쨌든 그는 술을 마시면 재밌어진다.


그를 향해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 의도치 않게 나온다. 세상 편한 절친을 다시 만난 것 같다. 반대로 그는 경직되어 있다. 차를 마시러 가잔다. 밥을 먹기엔 분위기가 이상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가 내리는 대부분의 판단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이번엔 저렴한 차를 마실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가는 길이다.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본다. 가다가 길을 잃어 꽤 돌아갔다. 대체 카페가 언제 나오냐며 툴툴 거리는 그에게 또 시작이라고 핀잔을 줬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카페에서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나에게 빨간 상자를 건넨다. 열어보니 8자 모양으로 꼬인 펜던트 사이에 진주 한 알이 박힌 목걸이가 보인다. 내 돈 주고는 절대 안 살 디자인이다. 어떻게 이런 걸 골랐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직장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정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동료들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미국인이라 ‘그거 안 예뻐’라고 말하면 실례가 될까 봐, 혹은 ‘내가 왜 너의 선물에 신경을 써야 하냐’ 마인드로 대충 봐줬을지도 모른다. 혼자 생각주머니에 잠겨 있는 사이 목걸이를 잠그는 부분에 그가 주문해서 새긴 듯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I love you.


두 달 전 나를 기쁘게 했던 한 마디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한 달 전에 미리 주문한 목걸이란다. 사랑한다고 쓰여 있는 목걸이를 보고 있자니 목이 멘다. 우린 헤어졌는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울면서 말하는 내 뒤로 살며시 그가 왔다. 묵묵히 목걸이를 내 목에 채운다. 꽁꽁 숨겨놨던 서러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흐른다. 아직도 왜 우리가 헤어진 건지 도통 모르는 듯한 그에게 이유를 조근조근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랑 연애할 때 마치 난 흐르는 강에 몸이 잠겨있고 금방이라도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서, 땅 위에 있는 너의 손을 억지로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가 갸우뚱한다. 왜 그렇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아차. 로봇에게 나의 감정을 너무 어렵게 설명했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넌 아직 어리고,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나와 결혼까지 생각할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내가 너에게 결혼에 대해 물어봤을 때 일방적으로 나온 대답은, 전혀 나를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었어. 나에 대한 배려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어.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당장 듣고 싶다는 건 아니야. 난 우리가 언제든 어떠한 계기로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다만 우리가 사귀는 기간이 길어졌을 때 서로 진지하게 상의를 해서 맞춰갈 수 있겠다는 희망 정도는 볼 수 있길 바랐어. 그치만 너의 대답을 들었을 때, 네가 날 그 정도로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잠자코 들어주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섭섭했던 것들을 몰라줘서 미안해. 내가 별생각 없이 서른쯤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네가 원하면 충분히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었어.”


맥이 풀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섭섭하게 했던 점들을 추가로 더 풀어놓았다. 얼마나 더 섭섭한 게 남아있는 거냐고 묻는다. 셀 수 없이 엄청나게 많다고 답하며 그를 가격했다.


다소 풀어진 분위기에 민익씨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문 앞 까지 데려다줬다. 예전 같으면 보통은 키스를 하고 꼭 부둥켜안고 있다 헤어지는데 오늘은 둘 다 어정쩡하게 서있다. 그가 지금 다시 만나자고 말하면 난 곧장 그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퍼부을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일주일 정도만 더 생각해보고 네게 다시 만나자고 물어봐도 될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한 달이 부족했나. 정신을 덜 차린 건가. 많은 생각들을 뒤로하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알겠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저녁 그에게 전화가 왔다.


생각 다 했는데, 다시 내 여자 친구가 되어줄래?

Could you be my girlfriend again?


진작에 그럴 것이지. 일주일 내내 생각하느라 연락이 없었다면 난 짜증이 나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어린이와의 결혼을 생각하면 까마득 막막하다. 내 인생조차 한치 앞날이 안 보이는 이 시점에 그와의 인생은 더더욱 불투명하게 그려진다. 그와 보이는 미래에 행복함을 택할 것인가. 보이지 않는 먼 미래를 함께 할 사람을 찾아볼 것인가.


나에겐 전자가 더 맞다. 민익씨가 좋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이렇게 끝내긴 아쉽다. 정나미가 다 떨어져서 결혼이라 하면 질색팔색을 할 때까지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다시 심장이 뛴다. 잊었던 그의 음성이 눈물 나게 달콤하다.


“그래, 좋아. 앞으로는 대답 잘해라.”


“알겠어.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만나자. 점심에 봐도 좋고.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묻는다. 한 달 동안 듣지 못한 익숙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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