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4
느지막이 일어나 눈을 비비며 브런치를 주문한다. 우리 커플의 루틴이자,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우리의 단골 레스토랑은 민익씨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엘리스(Ellie’s)라는 곳이다. 미국에는 델리(Deli)라고 불리며 일요일 아침 메뉴를 주문할 수 있는 음식점이 많은데,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만큼 한 레스토랑에 있는 메뉴가 수십 가지가 된다.
결정장애가 있는 나는 우리나라의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내 선택의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단품 메뉴만 파는 맛집은 더욱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두 손 들고 환영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사람들이 주문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괜히 내가 주문받는 웨이터에게 미안해진다.
“베이컨은 탄 듯이 바싹 익혀주시고, 계란은 반드시 스크램블로 해주세요. 빵은 홀 윗브레드(wholewheet bread, 호밀빵)로 해주시고 버터는 빼주세요. 잼이나 젤리는 필요 없습니다. 아이스티에 설탕은 반만 넣어주세요. 버섯도 빼 주시고요. 알러지가 있어요.”
아마 내가 식당에서 이런 주문전화를 일일이 받았다면, 그들의 요구사항들로 메모지 한 장을 꽉 채우다가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했을지도 모른다.
”아, 거 사람 참 까다롭구먼!”
미국에서는 자신의 입맛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변형하는 과정이 자연스럽다. 자기가 원하는 재료만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인 치폴레(Chipolet)나 서브웨이(Subway), 혹은 뷔페식 델리가 인기 있는 이유다. 이 외 일반 음식점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일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밖에서 밥을 먹을 때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 그들의 거침없는 요구와 선택은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친구가 준 팁들을 그대로 따르거나, 친구가 먼저 주문을 하면 꼭 덧붙여 말했다.
내 뒤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뉴욕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빨리빨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앞에 사람이 조금만 느리게 걸으면 신경질적으로 그를 추월하고 때로는 ‘뭐해?’라고 물어보며 지나가기도 한다. 주문하는 말도 빠르고 받아주는 직원도 너무 빠르게 이야기해서 자칫하면 내가 뭘 주문했나 잊어버릴 정도다. 주문을 할 때 조금만 시간을 끌면 앞에서는 주문받는 직원이, 뒤에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앞 뒤로 내 머리통에 눈빛 레이저를 꽂는다. 그렇게 친구의 입맛과 내 입맛의 싱크를 맞춰갈 때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같은 돈 내고 먹는데 나는 왜 내 맘대로 정하지 못하지?!’
용기를 내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만의 메뉴를 고르는 연습을 해 보기로 했다.
다급하게 하나씩 요구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올리브 넣어주시고, 양파는 빼 주세요. 화이트소스는 많이요!!!”
하나의 요구사항이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니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온갖 눈빛으로 내 뒤통수에 사정없이 레이저 찜질을 해도 괜찮다. 나는 처음이고 점점 빨라질 거다. 그리고 나보다 느린 사람도 많다. 게다가 나는 영어로 주문을 하고 있는데, 아마 내 뒤에 서 있는 저 사람들이 한국에서 우리말로 주문을 한다면 나보다 백배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점차 나의 주문 울렁증을 극복해 나갔다.
우리가 주문할 브런치 레스토랑은 나에게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도 울렁증을 되돌려줄 정도로 메뉴의 선택지가 많다. 다행인 건 민익씨가 눈에서 레이저를 내뿜지 않는 것이다. 다만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
“자기야, 대체 언제 결정할 거야? 나 배고파.....”
수십 가지 메뉴들 중에서 민익씨가 본인의 아침메뉴를 정하는 데는 3분을 넘기지 않는다. 별 일이 없으면 그는 에그 스크램블 샌드위치와 아이스티를 주문한다. 단 것이 당길 때는 팬케익이나 와플을 주문한다. 가끔 여기에 베이컨이 추가되기도 한다. 나는 대체 아침부터 팬케익과 와플을 어떻게 먹는 거냐고 묻는다. 어쩔 때는 밀크셰이크도 추가해서 먹는데, 보고 있는 나의 당 수치가 하늘로 치솟는 것 같다. 그렇게 먹다간 머지않아 당뇨에 걸릴 수도 있다고 겁을 줬다. 처음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내 조언을 듣지 않았지만, 본인도 먹고 나서 금세 피곤해진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침 메뉴를 에그 스크램블 샌드위치로 고정시켜 버렸다. 도통 메뉴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주문을 1초 만에 한다. 이것은 마치 암호가 없으면 결코 바꿀 수 없도록 기본 설정 세팅이 된 AI 로봇의 메뉴 선택이다.
민익씨의 고정 메뉴 말이 나온 김에 썰을 더 풀어보자면, 그는 주말에 별 일이 없으면 평일 동안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meal prep, ‘밀 프렙’이라고 해요.) 그가 요리하는 메뉴는 토마토소스에 볶은 닭 가슴살, 토마토소스에 볶은 간 소고기(ground beef, 기계에 갈아 낸 소고기), 양파와 볶은 스테이크와 밥이다. 이 3가지에서 벗어난 것은 거의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건 흡사 맛집의 고정 메뉴다. 그가 요리를 할 때 쓰는 도구들은 (음식은 손맛과 눈대중, 정성이 9.9할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경악하게 한다. 전자저울, 타이머, 끓는 물 측정 온도계, 다양한 사이즈의 계량스푼, 계량컵 등등. 천재 과학자의 실험실에 온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요리하는 메뉴들 조차 대나무가 서러워 울고 갈 만큼 대쪽 같다. 그의 한국 이름을 민익씨말고 도한결이나 도고정으로 바꿔도 될 것 같다. 며칠 전 그는 내가 전문기관에서 배운 뒤에 그에게 실험해 본 성격검사에서 ‘한결같은’ 타입이 나왔다.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해 묘사할 때 ‘한곁같다’는 표현을 유난히 많이 썼는데 신기하다.
한결같은 그가 1초 만에 메뉴를 정했고 나는 초조하다. 이 많은 것들 중에 뭘 먹지. 프렌치토스트, 팬케익, 와플은 너무 달아. 프렌치 딥 샌드위치는 정말 맛이 없었어. 오믈렛은 물기가 많았고, 이건 너무 짰고, 이건 그냥 그랬고.
그 장본인이 내가 되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몸이 으슬으슬해서 몸보신을 하고 싶다. 한식이 땡긴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에서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식은 없다. 민익씨는 브롱스(the Bronx)라는 곳에 사는데 그가 사는 동네에 일식집, 중식집은 있지만 한식집은 없다. 한국인의 수요가 아직 부족한가 보다.
나는 보통 일요일 저녁에 민익씨 집에서 출발해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앉히고 라면을 끓인다. 주말 내내 햄버거, 파스타, 고기 등 채소가 거의 없이 늬글늬글한 메뉴만 주야장천 먹다 보니 얼굴이 번질번질하다. 얼큰한 라면에 새콤 달콤 매콤한 김치를 한 점씩 얹어서 정신없이 먹고 나면 땀이 쏙 빠지면서 몸에 있던 아메리칸 기름이 용해되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평일에 예외 없이 최대한 한식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주말에는 대부분 아메리칸 혹은 이탈리안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 동네로 와서 한식을 먹는다면 우리나라의 두 세배 비싸다. 작은 뚝배기에 담긴 김치찌개를 2만 원을 내고 먹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엔 주말에도 한식이 땡긴다.
스크린에 담긴 기나긴 메뉴 목록에서 끊임없이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고민을 했다. 어떤 음식이 나의 마음을 한국적으로 보살펴 줄 수 있을까. 매콤하고, 달지 않고, 국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칠리(chili, 매운 토마토소스에 간 소고기, 강낭콩과 양파 등의 채소를 넣고 걸쭉하게 우려낸 소스와 수프 중간 정도의 음식. 빵 위에 얹어먹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핫도그 위에 치즈와 함께 올려 먹기도 하죠.)와 마늘빵, 치킨 수프를 주문하기로 했다.
민익씨는 칠리와 마늘빵을 이해했지만 치킨 수프는 이해하지 못했다.
치킨 수프는 닭고기를 우려낸 맑은 국물에 각종 채소와 살코기를 넣고 푹 끓여낸 것이다. 미국인들이 걸쭉한 양송이나 옥수수 수프를 토스트와 함께 먹는 걸 영화에서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치킨 수프는 보통 감기 등 몸이 아플 때 먹거나,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먹는 느낌인 듯하다.
사실 미국 사람들은 그냥 국물 자체를 잘 안 먹는다. 프랑스의 음식에 관해 엮은 책에서 국물요리는 재료가 부족해 적은 재료로 많은 인원이 먹어야 할 때 만든 서민이나 하층 부류 사람들의 메뉴라고 했다.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말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잠시 서글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나라의 음식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국의 음식들은 무조건 달고, 짜고, 기름지면 장땡이라 너네는 아주 저렴한 취향이라고 말했다. 공격하는 나에게 민익씨는 웃으며 말한다.
“자기는 국물을 먹잖아.”
“국물에 영양소가 얼마나 많은데! 너네가 생각하는 물에다가 그냥 담가놓은 게 아니라고. 뼈를 우릴 수도 있고, 거기엔 칼슘도 있고 여러 가지 영양소가 어쩌고 저쩌고...”
열심히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하다.
‘그래서 왜 국물을 먹는 거지?’
이제 더는 배가 고파서 싸울 힘도 없다. 국밍아웃(국물을 사랑하는 취향을 오픈한)을 한 나는 더 이상 그의 의견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사골곰탕, 삼계탕, 라멘 등 국물에 담긴 장인정신을 생각하며 꿋꿋이 주문 버튼을 눌렀다.
매운 소고기 콩죽과 마늘향이 물씬 나는 빵, 그리고 삼계탕에 삼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고소한 닭국물을 양껏 마시며 몸보신을 했다.
치킨 수프를 시킬 때 추가한 요구사항도 있다.
‘국물 많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