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5
미국의 연인들은 발렌타인 데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귀요미들이 챙기는 백일, 이백일은 챙기지 않아도, 생일과 발렌타인 데이, 1년마다 돌아오는 기념일(anniversary) 정도는 꼭 챙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만큼 이벤트 데이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 같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로즈데이, 키스데이, 빼빼로데이까지. 온갖 사장님들이 총출동하셔서 각종 데이들을 자기 일처럼 챙겨주신다. 외국인들이 보면 우리나라는 사랑이 넘치는 나라인가 보다 할 것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그것은 모두 상술이라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오니 아기자기한 여러 이벤트들도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시키면 또 안 할지도 모르지만.
미국의 발렌타인 데이는 우리나라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발렌타인 데이에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고, 화이트 데이에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준다. (이것은 일본과 똑같다고 오타쿠 민익씨가 알려줬다.) 나는 사탕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대체 왜 여자는 사탕을 받아야 하는 건가 평생 동안(?) 억울했다. 그런데! 미국의 발렌타인 데이는 남자든 여자든 서로에게 마음을 표현한다. 대표적인 발렌타인데이 선물 세 가지는 초콜릿, 작은 선물, 꽃이다. 주로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근사한 것을 준비하는 것 같다.
드디어 나도 사탕 말고 초콜릿을 받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뜬다. 나는 뭘 해주지 고민이 된다. 화려하게 포장한 이벤트성 초콜릿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싶지는 않다. 홈메이드 초콜릿을 만들어줘야겠다.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기에 번거롭고 귀찮기는 하지만 내가 직접 만드니까 믿고 먹을 수 있고, 비용도 아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연인에게 줄 초콜릿이나 빼빼로를 만들어주는 것이 꽤 보편화되어 있는 ‘그럴 수도 있다’의 정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미국인들에게 홈메이드 선물은 흔치 않다. 민익씨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타겟(target) 에서 수제 초콜릿 만들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러 갔다. 타겟은 월마트(wall-mart)처럼 미국 전역에 널리 퍼져있는 대형 마트인데, 내가 사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지점은 작지만 있을 것이 거의 다 있다. 코리아 타운 근처에 있어 신라면부터 김치도 있다. 타겟이 파는 김치의 맛은 우리나라의 김치를 재해석(?)한, 무언가 스페인의 정취가(?) 물씬 나는 김치이다. (어떤 느낌인지 드셔 보시면 이해가 갈 수도 있어요. ㅋㅋ) 맨해튼의 물가는 다른 지역보다 심하면 2배 이상 비싸다. 그나마 타겟은 다른 마트들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다.
타겟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수제 초콜릿 만들기에 최대 적수를 만났다. 그것은 가격도 아니고, 시간도, 사랑도 아닌 귀차니즘이다. 귀차니즘은 발렌타인 데이가 당장 내일인 이 시점까지 나를 데려왔다. 그냥 만드는 걸 포기하고 사 버릴까 싶다. 내가 만든 것을 남자 친구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을 바라보며 만족하기에 나의 사랑이 부족... 하다기보다는 그것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라 해도 쉽지 않다. 100% 초콜릿 만들기에서 급 진로를 변경했다. 유명 초콜릿 가게에서 생딸기에 초콜릿을 입혀서 팔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걸 만들어줘야겠다. 딸기를 담을 상자는 유기농 달걀이 담겼던 12구짜리 계란판을 쓰기로 했다.
딸기 6불, 화이트 초콜릿과 다크 초콜릿 한 봉지씩 3불, 위에 뿌리는 스프링클 2불 총 14불이 들었다. 한국 돈으로는 만 육천 원에 육박한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자는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진다. 이렇게 만들어 시중에 파는 건 몇 배로 비싸다며 정당화했다.
재료들을 집으로 가져와 보울에 화이트 초콜릿을 먼저 녹이고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 후 보울에 남아 있던 화이트 초콜릿과 다크 초콜릿을 섞어 밀크 초콜릿을 만들어서 다른 그릇에 담고, 마지막으로 다크 초콜릿만을 녹여 세 번째 그릇에 담았다.
딸기를 꺼내 깨끗이 씻고 꼭지를 잡은 후 녹인 초콜릿이 종류별로 담긴 그릇들에 각각 4개씩 담갔다가 꺼내서 평평한 도마에 올려둔 후 스프링클을 뿌리고 잠시 말렸다. 1시간쯤 후에 얇은 종이를 깐 계란판에 정갈하게 담아서 냉장고에 넣었다. 생각보다 쉬웠고, 시간은 쇼핑까지 합쳐 3시간 정도 걸렸다. 만족스럽다. 이 정도면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 보이고, 꽤 비싸 보이는 가성비 갑 수제 초콜릿이다.
늠름하게 초콜릿이 담긴 계란판을 들고 민익씨 집으로 향한다. 민익씨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해주는지 기대하란다. 대체 뭘 준비하고 있길래 그러나 궁금하기도 하고 별거 아니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나는 표정을 잘 못 숨긴다. 기대한 무언가에 실망하면 나도 모르게 ‘와~’라고 기계음을 내고 이내 정적에 휩싸인다. 민익씨는 원래 표현이 크지 않아서 기뻐도 슬퍼도 힘들어도 행복해도 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나는 대체로 표현이나 리액션이 크고 다채롭다. 그래서 실망했을 때의 반응이 유독 두드러지는 것 같다. 로봇으로 태어날 걸 그랬다고 아주 가끔은 후회한다. (안 한다.)
민익씨네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의 아파트 현관문은 카드키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부르면 내려가서 열어주겠다고 하지만, 성질이 급한 나는 전화를 걸어 그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주고 그를 기다렸다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일정이 영겁의 시간보다 길다. 그래서 그의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들이 문을 열어주면 고맙다며 들어가서 엘리베이터의 번호를 누르고 그의 집 앞 문을 두드린다. 모든 과정은 1분도 채 안 걸린다.
그. 런. 데.
오늘은 민익씨를 그의 아파트 정문 앞에서 마주쳤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해가 서남북쪽에서 뜰 일이다.
매번 그의 집에 도둑고양이처럼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신기하다. 발렌타인데이라서 단단히 작정을 한 건가. 흐뭇해하던 차에 뻘쭘하게 서 있던 민익씨가 입을 뗀다.
“나 잠깐 갈 데가 있는데...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응???”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다림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해하는 행위 중에 하나다. 그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한 시간 넘게 달려온 여자 친구를 이 아름다운 날에 언제까지 본인의 아파트 앞에 세워두겠다는 것인가.
“그냥 자기는 볼 일 보고 나는 집에 먼저 들어가 있으면 안 될까?”
황급히 안된단다.
집에 뭔가를 준비해 둔 것 같다. 기특하다. 그래도 이 추운 날 여기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릴 수는 없다. 나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민익씨는 잠시 난처해하더니 체념한 듯 나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도착한 곳은 월그린(wallgreen)이라는 약국 겸 편의점이다. 그가 쭈뼛쭈뼛 유리에 담긴 향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더니 내게 무슨 향이 좋으냐고 물어본다. 레몬과 라벤더가 섞인 향과 복숭아 향을 골랐다. 그가 두 가지 향의 향초를 골고루 아홉 개나 담는다. 나는 그와 함께 내가 받을 이벤트의 준비물을 사고 있는 것이다. 향초를 뭐 그렇게 많이 사냐 이런 거 필요 없다 등등의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가만히 두었다. 이번에는 라이터가 필요하단다. 둘이 구석구석을 뒤져도 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직원에게 물었다. 화기류는 프런트에서만 판단다. 민익씨가 계산을 하다 향초에 불을 붙일 기다란 라이터도 함께 샀다.
편의점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침내 그의 집으로 올라갔다. 이제야 들어가나 싶었는데 나보고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란다. 향초 세팅을 해야 하나보다. 선물할 초콜릿을 들고 다니며 내가 받을 이벤트를 함께 준비하다 보니 슬슬 속에서 열불이 난다.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아들 같기도 해서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벽 너머로 그가 열심히 이벤트를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민익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나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들어가 놀랄 준비를 한다. 나와 함께 산 향초가 띄엄띄엄 불을 밝히며 이어져 있고 가는 길에는 장미 꽃잎까지 뿌려져 있다. 함께 산 향초 길을 따라가다 나온 그의 방에는 마빈 게이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향초 길의 끝에는 장미꽃 한 다발과 초콜릿 한 상자, 안대(갑자기?)가 보인다. 이미 절반 정도는 예상한 이벤트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아 비디오도 찍고 사진도 찍고 신이 나서 뛰어다니던 내가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분위기 안대는 무엇이냐고.
“응.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길래 샀어.”
안대에는 ‘sleeping beauty’(잠자는 숲 속의 공주)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생각보다 네가 빨리 와서 놀랐어. 난 삼십 분 정도는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에게 7시까지 간다고 하면 8시까지 가고, 8시까지 간다고 하면 9시까지 가는 안 좋은 버릇이 있다. 먼 길이라 준비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기도 하고, 차가 막히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어차피 그가 집에서 기다리기 때문에 조금은 늦어도 되겠지 싶어서 대개는 나만의 타이밍을 지켜왔다. 나는 오늘 이상하게도 제시간에 출발하고 싶었고, 민익씨는 나의 자유로운 타이밍에 익숙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에게 딸기 퐁듀 초콜릿을 건넸다. 직접 만든 거라니까 깜짝 놀란다. 내일 가져가서 동료들과 나눠먹으랬더니 아깝다고 두고두고 혼자 먹겠단다.
약간, 혹은 보통, 아니 조금 더 많이 엉성하게 함께 준비한 이벤트는 신선했다. 이렇게 정직하게 이벤트를 할 수도 있구나 싶다. 영락없는 도민익 스타일이다. 이벤트는 그의 적성에 안 맞나 싶지만 굳이 해주겠다면 앞으로도 말리지는 않겠다.
딸기 퐁듀 초콜릿을 먹은 그가 며칠 후 꼭지를 따 놓으면 더 쉽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품평을 하더군요. 욱해서 ‘그럼 앞으로 안 해준다.’고 으름장을 놨어요. 그는 아직 수련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