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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May 25. 2019

사랑한다 말하기 6개월 전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1


나는 뉴욕의 가을을 정말 좋아한다.


정수리에 내리꽂는 뙤약볕의 건조한 여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선선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너무 더워서인지 여름엔 더욱 바쁘게 걷던 뉴요커들은 아주 조금은 천천히 걷는 것 같고, 여름철에 끊이지 않는 관광객으로 북적대던 도시는 약간의 여유를 찾는다. 한적해진 도시에서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다 보면 영화 ‘뉴욕의 가을’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내 손은 겨울엔 얼음처럼 차갑고 여름엔 활활 타오른다. 한 때 변온동물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여름에 워낙 손이 뜨거워지다 보니 식히려고 가끔 친구들의 차가운 팔뚝에 내 손을 갖다 대곤 했다. 그들이 이를 악물고 ‘좋은 말로 할 때 손을 떼라’고 경고하며 보내던 증오의 눈초리가 기억난다. 민익씨는 안 그래도 긴장하면 손바닥이 흥건해지기에, 여름엔 그의 손을 잡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가을이다. 마음 놓고 민익씨에게 팔짱을 낄 수 있고, 손도 잡을 수 있고, 팔뚝도 붙잡을 수 있다. 그를 꼭 붙잡고 걷다 보면 세상 무엇도 두렵지가 않다.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의 시원한 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나의 보폭과 함께 나풀거리는 코트자락의 느낌이 좋다.


분위기에 취해 기분이 몽글몽글해져 있는데, 민익씨가 물었다.


12월 첫 주에 우리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줄래?



읭?

지금은 10월 초다. 나는 이제 고작 가을의 분위기에 취해있는데 벌써 크리스마스라니.

이유를 물으니 미리 RSVP(Respondez Sil Vous Plait, 프랑스어에서 기인한 초대에 답하는 것, 영어로는 please respond 정도로 해석할 수 있어요. 참석자는 본인의 참석 및 데이트 상대를 데려오는지 여부를 체크하고, 주최 측은 그에 맞춰 몇 명분의 음식과 음료 등을 준비할지 가늠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에 답해야 한단다.


우리는 6월부터 만났지만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것은 8월 중순이다. 고로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건 한 달 반 정도밖에 안됐다. 난 이 남자를 많이 좋아하지만 아직은 그를 알아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애 초부터 1년 전후까지도 나의 데이트 상대에게 레드 플래그(red flag, 빨간 깃발, 즉 데이트 상대가 위험한 것 같은 징후)가 보이면 곧장 헤어질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우리가 크리스마스까지 함께일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아무 생각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가끔 앞서가는 면이 있네.


은근 기분이 좋으면서도 같이 못 가는 경우가 생기면 어쩌나 고민이 된다.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이 솔직해져 버렸다.


그때까지 우리가 사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순수한 인공지능 쑥맥 로봇이 당황했다. 내가 뱉어놓고 보니 아무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고 느껴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음... 난 그랬으면 좋겠는데...”


당황이란 녀석을 가까스로 제압한 풀 죽은 민익씨가 답한다.

수습의 기회다.


“응!! 나도 그렇지!!! 그래. 좋아!!!! 파티에 갈게!!!! 암. 가고말고!!”


그때까지 잘 만날 수 있을지 왠지 불안한 마음 한켠을 누르며 말했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그가 파티에서 입어야 하는 드레스코드를 알려줬다.

캐주얼하면 안 되고, 포멀(formal, 정장 풍) 해야 하며, 노출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단다. 미국식 오피스 파티에 처음 가 보는 내가 정확한 예시를 보여달라 하니, 친구의 결혼식에 갈 때 입을 수 있을만한 정도의 드레스를 입어야 한단다. 아무래도 감이 안 오는데 이를 어쩌지.


그렇든 저렇든 난 그 파티에 갈 수 있을지부터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히도 우리는 함께 12월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글에 office party look을 검색했다.



대략 어떤 느낌인지 감을 잡았다. 저런 옷들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포멀 하면서도 독특한 나만의 드레스를 입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금은 없어진 52가 근처의 백화점 Lord&Taylor에 갔다. 그 백화점의 5층인가 8층인가에는 몇 장 안 남았거나 시즌이 지난 값비싼 드레스를 땡처리하는 코너가 있다. 운이 좋으면 80-90%까지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샤넬의 수장이었던 고 칼 라거펠트가 팝업 이벤트를 진행했을 때 가 본 백화점인데 이벤트 이후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발견한 스팟이다. 손님도 없어서 마음껏 옷걸이들을 뒤적일 수 있다. 여러 드레스를 입어보다 눈에 쏙 들어오는 드레스를 발견했다.


딥 브이넥에 팔에는 약간의 프릴 같은 슬리브가 달려있고, 기장은 내 종아리에서 중간쯤 오고, 색은 아주아주 예쁜 빨간색이다.


크리스마스와도 어울리고, 내 얼굴색에도 잘 맞고, 의외로 이 기장이 내 키를 커 보이게 해주는 것 같다. 다만 문제는 등 쪽이 브이자로 깊게 파여있고 내 몸보다 큰 사이즈라 통이 넉넉하다.


나의 패션디자인 전공을 십분 살려 드레스를 리폼하기로 했다. 아주 비싼 가격의 드레스를 10만 원 초반의 헐값에 샀다. 기분이 무척 좋다.


옷감 가게에서 비슷한 컬러의 천을 사서 등에 파인 부분에 똑딱이를 달아 덧댔다. 이제 기장은 그대로 두고 품만 줄이면 된다. 파티를 하루 남길 때까지 미루고 미뤘다. 약간 몸에 달라붙지만 너무 쬐지 않도록 입은 채로 조심조심 핀을 꽂아 재봉틀로 박고, 입어보고, 수정하고, 다시 입어보는 절차를 몇 번을 거쳤는지 모른다. 새벽이 거의 끝나가고 해가 떠오를 때쯤 내가 생각했던 환상의 핏이 나왔다. 날아갈 듯이 기쁘다. 민익씨가 예쁜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민익씨의 할아버님 생신이 오피스 파티와 겹쳤다.

오피스 파티는 좀 느긋하게 가려했는데 어쩔 수 없이 일을 마치고 오자마자 급하게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마자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기장이 긴 드레스인데 트임을 주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전족을 신은 여자처럼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보폭을 크게 하면 치마가 찢어질 수도 있다. 혹시 엉덩이 부분이라도 찢어지면 낭패다. 택시를 타려면 무릎 위까지 드레스를 번쩍 들어야 한다. 속상했지만 트임의 중요성을 깨달은 경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민익씨의 가족들이 생각보다 많이 왔다. 거의 대부분 처음 본 사람들이라 어색하다. 그 와중에 민익씨의 고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드레스가 너무 예쁘다고 찬사를 보내주었다. 깊은 브이넥이 민망하고 종종걸음이 불편했는데 온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토할 것 같다. 시선들이 거둬지자마자 푹푹 찌는 음식점 안에서 코트를 주섬주섬 주워 입고 옷깃을 여며(?) 버렸다. 왜 예쁜 드레스 위에 코트를 입었냐며 또 난리가 났다. 머릿속을 텅텅 비우고 흐흐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속으로 알지도 못하는 불경을 외웠다.


민익씨 할아버님 생신파티가 늦게 끝났다. 시간은 11시. 오피스 파티는 12시에 끝난다. 나는 결국 민익씨 가족들에게 섹시함을 내뿜으려고 이 고생을 하며 리폼을 한 것인가. 허탈하다. 그래도 오피스 파티 장소가 근처라 잠시라도 들르기로 했다. 도착하니 파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 가고 끝물이다. 민익씨가 아쉬워했다. 나를 회사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굳이 남아있는 몇 명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종종 민익씨가 회사의 가십을 말하면서 묘사한 몇몇 사람들과도 인사를 했다. 민익씨 회사에는 드라마가 많다. 이 남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하나 관심이 없는데, 그가 내게 말해 줄 수 있을 정도면 회사 사장님도 알 정도의 드라마다. 나는 그의 회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별명을 짓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 기억도 오래가고 둘만의 암호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다. 몇 가지 별명들을 말해보자면,


bang lady (한글 번역을 하자니 좀 그러네요^^;;. 문맥으로 대충 이해해주세요.)

회사 동료들은 민익씨가 연애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을 알고, 우리가 만나던 첫날부터 어마어마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처음 데이트를 마치고 키스를 해라,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셔라 등등의 조언을 해줬단다. 우린 첫 만남에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셨고 키스도 하지 않았다는 후기를 들려주니 동료들은 첫 데이트에 맥주를 마셨냐고 기겁을 했고, 키스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했단다. 그의 연애사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던 동료들 중 하나가 우리가 만난 지 좀 더 시간이 흘렀을 때 물었단다.


Did you bang her?(니네 했어?)


그분의 별명을 bang lady라고 지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앞머리도 bang hair(일자로 자른 이마를 덮는 앞머리)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는 사람들의 발을 보는 것을 좋아한단다. 민익씨는 강하게 거부해서 아직 보여준 적 없지만, 실제로 그녀는 직장동료들의 양말을 벗어보라 하고 발을 구경한단다. (이 정도면 성희롱 아닌가? 미국은 참 오묘한 나라네요....)


bitch lady(이것도 한글로 말하기는 좀...^^;;;)

불만이 많고, 남의 욕을 잘하고, 특히 가만히 있는 민익씨를 여기저기에 욕하고 다니는 동료. 민익씨가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싫어하는 사람인데, 직장 내 유부남과 사귄다고 한다. 만나보니 얼굴도 예쁘고 유부남과 만날 이유가 하나 없는 여자던데,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short indian guy(키 작은 인디언 남자.. ㅠㅠ)

이건 내가 지은 별명은 아니고 민익씨와 직장동료들이 그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나는 인종차별적이고 신체에 관한 별명이라 너무 가혹하다 했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신기한 사람. 아내에게 불만이 많아 직장동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아내 욕을 한단다. 아내도 함께 파티에 왔는데 아내가 너무 예쁘다. 민익씨 직장동료들도 파티 다음 날 그렇게 예쁜 아내를 두고 왜 저러냐며 쑥덕쑥덕했다고 한다.


short indian guy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그가 와이프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자기는 나에 대해 무슨 얘기해? 설마 자기도 내 욕하는 거 아니야?”


“No way! I just told them how much I love you.”

(아니! 난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love?


love 라니.


우린 만난 지 6개월 사귄 지 4개월이 지났지만 love라는 단어 조차 언급한 적이 없다.

서양인들이 워낙 그런 부분에서 뜸을 들이는 걸 미국 드라마를 보며 배웠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굳이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취했나 보다. 무슨 프로포즈라도 받은 것 마냥 사랑한다는 말에 이렇게 벅차오를 줄 몰랐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난 파티장에서 그와 단 둘이 춤을 췄다. 예쁜 드레스 입고 오길 잘했다.


파티가 끝나고 민익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마주 보고 앉아있는데, 갑자기 그가 똥 마려운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한껏 뜸을 들이며 ‘엄...’ 하는데 눈치를 챘다.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그러나?

얼떨결에 말해놓고 정식으로 말하려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얼결에 말한 것을 까먹은 건지(알고 보니 역시나 후자였습니다.) 왜 저러나 싶어 내가 물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해.”


그가 한 발 늦었다.

억울한 똥을 싼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너무 웃겨서 킥킥 웃으며 말했다.


“너 아까 파티장에서 이미 나한테 고백했잖아.”


“응?? 언제????”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동료들에게 말한다며.”


“헐... 기억이 안 나.”


사랑한다는 말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싶다가도, 그냥 1초만 참을 걸. 내 탓이오를 외치며 시무룩한 민익 어린이를 달래주었다.


장장 6개월 만에 ‘사랑해’를 텄다. 방귀는 트지 않았지만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오래 걸려 들은 말이라 그런지 더욱 달콤하고 깊은 진심이 느껴진다. 그냥 말 한마디를 가지고 얘네는 대체 왜 저러나, 유난스럽다 생각해왔는데, 조금은 이해가 간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계기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그저 이게 사랑인가 싶다. 기분이 몽글몽글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알다가 크리스마스 파티 직전에 확실히 알았다는 민익씨


뭐 별다른 계기는 없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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