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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May 13. 2019

내겐 너무 쿨한 그대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10


할로윈이 2주 남았다.


우리 둘 다 처음으로 할로윈 분장을 해보기로 했다. 미국에선 워낙 큰 행사이기도 하고, 나도 미국에 있는 동안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에 기대가 된다. 서로 무엇이 될지 고민했다.


“우리 커플끼리 입을 수 있는 옷(matching costumes) 입을까?”


민익씨가 묻는다.


워낙 개인주의가 몸에 밴 남자라 할로윈도 각자 하고 싶은 걸로 꾸미자고 할 줄 알았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급흐뭇하다.


‘요놈 나랑 커플로 꾸미고 이래이래 자랑하고 싶구나?’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무덤덤하게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전 편에 말했듯 자웅동체 조커로 결론이 났다.

할로윈 일주일 전 코스튬을 사러 맨해튼에서 가장 큰 코스튬 샵에 갔다. 일 년에 한 번 입는 할로윈 의상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싶지 않다. 집에 있는 옷들로 대충 코디하고 집에 있는 화장품으로 커버하기로 했다. 하얗게 얼굴을 칠하는 얼굴용 물감(?)만 샀고, 내가 이번 할로윈에 투자한 돈은 약 5불이다.


반면 민익씨는 조커가 되기 위해 다양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그의 옷장은 보고 있으면 하품이 나온다. 남자 조커 옷은 약 70불, 가발은 30불. 평소에 입지도 못할 옷에 100불 가까운 돈을 투자했다. 아깝다. 내년에는 하지 말자고 우겨야겠다.(다음 해엔 로켓단을 했다죠. 돈은 비슷하게 들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민익씨가 문자를 보냈다.



“7시에 코스튬 샵 앞에서 만나.”



나는 그날따라 준비를 늦게 해 택시를 타고 코스튬 샵이 있는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20 스트릿이 안 되는 짧은 거리인데, 차가 너무 막힌다. 그를 오늘 밤 안에 만날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럽다.


민익씨는 브롱스에 산다. 브롱스는 내가 사는 맨해튼보다, 그리고 할렘보다 윗동네다. 그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약 1시간쯤 걸리고 우리의 약속 장소인 다운타운까지는 1시간 반쯤 걸린다. 오늘 그가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은 분명 우리 집 근처를 거쳐간다. 이런 날은 어차피 가는 길인데 나를 데리러 와서 약속 장소로 같이 가면 좋겠는데, 택시를 타고 오는 남자에게 굳이 중간에 내려서 나랑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자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같이 택시를 타고 가자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나의 특별한 요구사항이 없는 한 이 로봇은 무조건 중간지점이나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입력한다. 참으로 대쪽 같은 로봇이다.


“미안해. 차가 많이 막혀서 늦을 것 같아. 스토어에서 먼저 구경하고 있을래?” 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오케이”


세상 쿨한 대쪽 같은 로봇이다.


한 시간 넘게 늦어서야 겨우 스토어에 도착했다. 걸어도 이보다 빨리 왔을 거다. 헐레벌떡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일이다. 매장 안에 전파가 안 터진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 가까스로 그와 연락이 닿았다. 하필 매장에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어 내가 있는 출구를 찾는 데만도 이십 분 이상이 걸렸다.


미안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해서 할로윈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

막상 밖으로 나온 그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더욱 크다. 약속에 늦은 건 내 잘못이고, 애초부터 만나서 같이 가자고 부탁하지 않은 것도 나인데 누구를 탓하랴. 그가 원초적 쑥맥인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속으로 내 탓이오를 삼창 하며 그에게 안겼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근데 앞으로 다운타운에서 만날 때는 자기가 우리 집 앞으로 나 좀 데리러 올 수 있을까? 그럼 내가 준비도 더 서두를 것 같고, 우리가 서로 약속 장소에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오케이”

.

.

.

이렇게 쉬운 것을.

허탈하다.


시간이 많이 늦어 얼른 살 것들을 샀다. 민익씨는 오늘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 친구의 이름은 호세다. 수줍은 집돌이 민익씨는 친구가 별로 없다. 플로리다에 있는 대학교를 다닐 때 취향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졸업 후 그들은 미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호세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 친구가 클럽을 좋아해서 클럽에 가기로 했단다.


순간 머릿속이 휑해진다.


내가 한국에서 만나 온 남자들은 본인이 클럽을 가지도 않고, 내가 가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너는 믿지만 그곳에 있는 남자들을 믿을 수 없어.’의 논리로 내가 클럽에 가고 싶어 하면 서운해하거나, 싫어하거나, 못 가게 했다.

나 또한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편이다.

여자든 남자든 클럽에 순수하게 춤추고 노래를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무리는 소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꽤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클럽에서 마시고 춤추는 것 외에 남녀의 급만남, 혹은 하룻밤 상대를 찾는 것을 기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클럽을 가던 이유도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는 술을 한 잔 하고, 귀를 때리는 빵빵한 음악을 들으며 잠시 나를 내려놓고 맘껏 춤을 출 수 있는 분위기가 좋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없을 땐 가끔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대하기도 하고, 기대하지 않고 갔다가도 괜찮아 보이는 혹은 내게 다가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상황은 반대다.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친다.

빼액 소리 지르며 못 가게 해야 하나, 삐진 척하고 그냥 집에 가야 하나. 그럼 쿨하지 못한 아시안 여자 친구가 될 것 같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보내주기엔 속상하고 그렇다고 투정을 부리기는 자존심이 상한다.


‘I don’t want you to go to club.’

(나는 네가 클럽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한국말로는 ‘가지 말고 나랑 놀면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어로 옮겨놓으니 왠지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같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뉘앙스를 바꾸려 해 봐도 해결이 안 된다. 내게 그를 못 가게 할 권리가 없다고 느껴질 뿐 아니라, 왠지 그가 몇 안 되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는 것을  막아선 안 될 것 같다. 결국 내가 한 말은


그렇구나. 재밌게 놀다 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한 것 같다.


내가 쿨한 여자 친구 코스프레를 하는 줄도 모르고 이 로봇 자식은 한 술 더 떠서 자기가 오늘 산 것들을 계속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우리 집에 나보고 들고 가란다. 내가 집으로 갈 때 타는 지하철 역 앞 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선처를 베푸시면서 말이다.


“이거 들고 가기 무거워서 싫어!!”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괜히 심술을 부렸다. 이 빙구 로봇은 빙긋 웃으며 근력운동이 될 거라고 한 마디 던지고 사라졌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때릴 수도 없고, 화를 내기에는 아직 안 친하다. 안 친하니 그가 클럽 가는 게 더 싫다. 그에 대한 신뢰가 아직 쌓이지 않은 것이다. 갑자기 내가 그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터덜터덜 다시 혼자 집에 가는 길이 서럽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맡긴 짐을 내동댕이 쳤다.

밤새 별 생각을 다했다.

민익씨는 호세가 착하고 좋은 친구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다. 언젠가 나의 남자 사람 친구가 남자 두 명이 클럽에 가는 건 백 프로 여자를 만나기 위함이라 했다. 하지만 민익씨는 뉴욕에 있는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호세밖에 없는 것 같다.


민익씨와 호세가 얼큰하게 취해서 다른 여자들과 웃고 떠들며 술 마시고 춤을 추는 상상을 하니 부아가 치민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클럽에 간 이 남자가 밉다. 내가 그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 걸까, 아님 나랑 사귀는 게 지루한 걸까 싶은 생각까지 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진짜로 깨물어버리고 싶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불안이 산처럼 쌓여 나를 짓누르자 슬프고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연상녀다. 연상녀의 장점은 뭐다? 이해심과 인내심, 마치 어머니와 같은 포용력!!!


그렇다.

이십 대 때는 이를 악물고 둘 중에 누구 하나가 이길 때까지 붙잡고 늘어져서 싸웠다. 남자 친구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창고의 쌀가마니 마냥 차곡차곡 쌓아두고 쌓아두었다가 빵 터져서 한꺼번에 그동안의 일들을 기관총처럼 쏘아대기도 하고, 기분이 나쁠 때 삐져서 말도 안 하고 뾰로통 해 있다가 남자 친구가 사과하는 순간 그 유명한 공포의 ‘뭐가 미안한데?’로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치기도 했다. 한 번은 뭐가 미안한 줄도 모른 채 꽃다발을 사 와서 해결하려고 하기에 새로 처음부터 다시 싸운 적도 있다. 때로는 싸움이 길어져 밤을 새웠다.


이제는 못한다. 그리고 안 한다.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악을 쓰고 싸울 일도 이제는 한숨 한 번 푹 내쉬고 나면 귀찮다. 웬만한 일로는 싸움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기면 얼마나 행복해진다고 굳이 힘들게 승자의 자리를 쟁취하나 싶다. 사실 이 원리는 직장동료든 연인이든 나의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된다.


폭주하던 질투심과 불안감이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그래. 연상녀와 연애의 장점을 마음껏 즐기게 해주자. 아직 잘 모르더라도 그냥 한 번 믿어보자. 사실 안 믿는다고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가?


다음 날 오후 3시쯤 죽은 줄 알았던 그에게 연락이 왔다.


“hey honey.”


낯익은 문자에 나는 평생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대답한다.



Hi, honey.










얼마 후 저도 친구와 클럽에 갔어요. (두 번...) 남자 친구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클럽에 가는 것이 처음이라 나름 신기하고 좋더구만요.

아, 근데 민익씨도 섭섭해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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