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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꼬질이들 Sep 05. 2019

민익씨 어머님의 50번째 생신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2


오늘은 민익씨 어머님이 미국 나이(만)로 오십이 되는 날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만으로 성년이 되는 21살 파티(성년식), 그리고 오십이 되는 해부터 10년마다 성대하게 파티를 하는 것 같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민익씨의 어머님과 꽤 친하게 지낸다. 겉으론 세 보이지만 속이 많이 여린 그녀는 내가 이때까지 만나 온 사람들과 은근히 닮아 정이 간다. 가끔 이해 못 할 행동이나 발언을 해도 그러려니 한다. 얼마 전 민익씨와 함께 그녀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민익씨가 잠시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 그녀는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I broke up with my boyfriend.”

(나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그녀는 몇 년 전 데이트를 시작해 함께 살고 있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다. 그 이유는 내가 그(이하 ㅇㅇ씨)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ㅇㅇ씨는 준수한 이목구비를 갖췄지만, 미간에 내 천자로 깊은 주름이 있고, 늘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ㅇㅇ씨는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민익씨의 어머님에게 따뜻하지 않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대놓고 종종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민익씨의 어머님이 추수감사절 기념으로 그에게 비싼 시계를 선물했을 때에도, ㅇㅇ씨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본인의 남자 친구는 자신보다 차를 더 좋아한다고 애교 섞인 불만을 털어놓자, 그는 그만 하라고 짜증을 부렸다. 심지어 각자 알아서 먹을 만큼 퍼다 먹어야 하는 저녁 식사에서 민익씨 어머님은 음식을 손수 준비한 것에도 모자라 그릇에 모든 음식을 골고루 담아 ㅇㅇ씨에게 갖다 바쳤다. 그는 음식을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그릇을 비우고 이내 어머니 집에 간다며 자리를 떴다. 민익씨의 아버님은 현재 민익씨의 새어머니에게 매너 있게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사람으로 보였는데, 가끔 짜증을 부리고 소리를 지르고 하는 모습이 지나쳐 보였다. 슬프게도 지금 만나는 남자 친구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민익씨 어머님이 워낙 독립적이고 똑똑한 분이라 도움을 주지 않는 남자로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인간이 비슷한 성질의 사람에게 끌리기 때문에 다시 비슷한 종류의 사람을 만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자기야, 자기 어머님한테는 비밀인데, 난 ㅇㅇ씨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나는 민익씨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화가 치밀었다.


“응? 왜?”


민익씨가 언제나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그분은 자기 어머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이지가 않아.”


곰곰이 생각하던 민익씨가 한 마디를 보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다. 저녁 먹을 때 자기 음식은 자기가 갖다 먹었어야 했어.”


민익씨는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포인트 중 하나라도 그가 맞춘 것이 신기했다. 원체 남일에 관심이 없는 민익씨라 예전 같았으면 애초부터 감도 잡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사유하며 학습하는 영물인 것이다!!!)


“응, 맞아. 어머님에게 좀 더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시면 좋을 텐데.”


민익씨의 어머님은 그 후로도 가끔 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길게 늘여서 의식의 흐름대로 에둘러 말하긴 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한 마디다.


난 이제 50살이야.
앞으로는 연애를 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아.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털어놓는 그녀를 바라보니, 사랑이 많고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늘 영혼의 단짝을 갈구하는 나와 닮아 마음이 간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진심을 담은 문자를 꾹꾹 눌러 보냈다.


“어머님은 강하고 당당하고 존경스러운 멋진 사람이에요. 힘드시겠지만 마음을 잘 추스르시면, 꼭 좋은 사람 만나실 거예요. 어머님이 좋은 사람이니까요.”


‘정말 고마워 젠. 하트하트’


확실히 민익씨 어머님과 나의 관계는 내가 한국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 어머님과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어머님’이라는 호칭 대신 ‘You’라고 지칭할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후에 그녀의 집에 놀러 갔을 때는 본인의 생일에 입을 점프슈트를 보여주며 나에게 의견을 물으셨다. 우리나라 오십 세 생신파티에서 입기엔 상상조차 못 할 파격적인 옷이다.


캣우먼을 연상하게 하는 몸에 딱 달라붙고 온몸이 반짝이는 스팽글이 달린 점프슈트에, 더욱 파격적인 건 몸의 옆라인이 끈 같은 것으로 묶여있어 옆에서 보면 맨살이 그대로 다 보인다. 속옷을 입을 수가 없는 옷인 것이다. 신발도 의상과 맞춰서 큐빅이 잔뜩 박혀 반짝이는 뾰족한 플랫폼 힐이다.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은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고 외치던 나도 가끔은 현타가 온다. 지금이 그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 51세 생일파티에 이런 의상을 입으면 과연 잔치에 온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중에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


마냥 할 말을 잃은 표정만 짓고 있을 수는 없다. 예쁘고 섹시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마치 머라이어 캐리 같을 거라고 덧붙였다. (칭찬이라고 받아들여 주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생일 파티가 기대가 된다.


“ㅇㅇ씨 가족들도 올 거야. 그는 안 오지만. 엄청 예쁘게 입고 그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준 다음에, 그가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녀가 파격적인 의상을 선택한 데는 헤어진 남자 친구라는 이유 또한 숨어있었던 것이다. 아직 전 남자 친구에게 미련이 남은 듯하다. 마음이 소녀 같은 내 또래의 친구가 할 법한 말이다.


“그 남자 엄청 후회할 것 같은데요!!??”


상대방 부모님 앞에서 늘 얼음이 되고, 함께 밥이라도 먹는 날에는 꼭 배탈이 나던 내가 이렇게 사회생활을 잘할 줄이야.


내 변화된 모습에 화답하듯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그녀의 의상을 보고, 나도 특별한 날에 입으려고 샀던 크림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장미 자수가 새겨진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맞춰 신을 신발이 필요한데 요즘 들어 유난히 새빨간 에나멜 구두가 사고 싶다. 그녀와 같이 과감해지기로 했다. 내가 미국에서 구두를 사는 곳들은 딱 두 군데가 있는데, DSW(Designer Shoes Warehouse, 디자이너 슈즈 웨어하우스, 디자이너 슈즈를 파는 창고형 신발가게)와 알도(Aldo)다. 알도와 자라는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끊이지를 않는다. 알도에서 마치 내가 꿈에서 직접 디자인한 것처럼 마음에 쏙 드는 구두를 만났다. 약간의 분홍빛이 돌고 굽이 8-9cm 정도 되는 새빨간 에나멜 구두다. 다만 사이즈가 품절이라 주문을 하고 매장으로 찾아가 받아보기로 했다. 생일 파티 전날 아슬아슬하게 받아볼 수 있다.


드디어 생일파티 당일이다.

민익씨와 만나서 파티 장소로 향했다. 민익씨의 어머님은 예정대로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나는 50이야, 이제 인생 시작이지!’라고 쓰여있는 케이크를 배경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실제로 그녀는 예쁘고 섹시했다. 중년 남자가 중후한 매력이 있듯 중년 여성의 여유롭고 농염한 매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조금 취한 상태였는데, 노래에 맞춰서 추는 살사댄스가 수준급이다. 예사롭지 않은 몸동작을 보니 젊은 시절이 화려하셨을 것 같다. 이렇게 흥겹고 신나는 50세 생일 파티는 처음 본다.


나도 민익씨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음악에 맞춰 덩달아 춤을 췄다. 민익씨는 몸치다. 나도 내가 춤을 추면서 거울을 본 적은 없지만, 친구들이 말하길 내 춤이 웃기다고 했다. 나는 엉덩이로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단다. 민익씨는 고장 난 로봇같이 춤을 춘다.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고장 난 정도가 심해진다. 민익씨 어머님이 아들의 춤사위를 보더니 순간 눈살을 찌푸린다. 달려들어서 민익씨를 도왔다. 몸치 커플의 활약이다.


파티가 끝을 향하자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 아들 셋이 다가가서 그녀를 도왔다. 첫째가 가장 다정하게 엄마의 손을 붙잡고 타일렀다. 장남의 매력이 터져 나온다. 민익씨와 민익씨의 동생 닉은 옆에서 마냥 헤벌쭉이다. 둘도 나름 귀엽다. 아들 키운 보람이 저런 데서 느껴지겠구나 싶다.


나는 민익씨가 화장실에 갔을 때 틈틈이 앉아서 물도 마시고 체력을 보강하다가, 그가 돌아오자마자 다시 댄싱머신 풀가동을 했다. 새 구두를 신고 춤을 너무 열심히 췄더니 마지막엔 발에 감각이 없어서 맨발로 택시를 탔는데도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하얗게 불태운 즐거운 밤이었다.


민익씨의 어머님은 그녀의 뜻대로 파티 이후 남자 친구와 재결합했다.(결국은 헤어졌지만) 그녀의 계획대로 전 남자 친구의 가족들이 생일날 본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머라이어 캐리 여사님의 승리다.





 



조만간 130세 인생이 온다는데, 50세면 청소년기~청년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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