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1
내가 좋아하는 가수인가?
아니다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콘서트 인가?
아니다
내가 잘 아는 가수인가?
아니다
그가 좋아하는 가수이고 그가 가고 싶어 하는 콘서트인가?
아직도 가끔 나는 그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내 생일인데 왜 네가 가고 싶은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표를 선물하느냐고 물어봤다. 약간은 화도 났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대체로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 그렇다고 딱히 불만도 없다.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뭘 해야 재밌는지 잘 모른다. 천성이 집순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다. 전시회나 쇼핑은 주로 혼자 간다. 나는 천천히 시간을 갖고 둘러봐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옆에서 지루해하면 마음껏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보기나 여행은 혼자서 가면 몰입이 잘 된다. 그래서 데이트라고 하면 밖에서 밥을 먹고 디저트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는 거 말고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내가 뭔가를 하자고 했을 때 상대방을 내 뜻대로 끌고 가는 과정이 피곤하다. 재미없어 보이는 상대의 모습을 보게 될까 부담스럽다. 상대방이 감사하게도 나를 이끌어 준다면 그저 따라가다 재미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재미있으면 재밌다고 말하는 쪽이 되는 것이 편하다. 물론 재미없다고 말할 때는 대안책을 제시해줘야 하는데 그것도 피곤하긴 하다.
하지만 내 생일선물까지 나의 의지가 반영이 안 된다는 건 별로다. 말을 해야겠다.
자기야, 나는 그 가수 노래를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도 아닌데, 내 생일 선물로 그 콘서트 표를 받는 건 조금 섭섭해.
꽤 비싼 콘서트 표일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생일이라고 선물을 사준 게 어딘가 싶다. 상대방이 민익씨라서 가능한 범위의 이해심이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콘서트장은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MSG라고 불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라는 커다란 공연장이다. 그곳에서는 유명한 농구 경기, 하키 경기와 같은 스포츠부터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공연이나 무대가 펼쳐지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잠실 종합 경기장의 실내 버전이랄까. 그동안 그곳에서 공연을 하는 인물들을 나열해보자면, 엘튼 존, 보티첼리, 빌 버(유명 코미디언) 기타 등등이 있다.
이번에 우리가 볼 공연은 차일디시 감비노라고 하는 힙합 알앤비 가수의 공연이다.
그의 공연을 앞두고 노래들을 들어보니 꽤 괜찮다. 워낙 유명해서 틈틈이 어깨너머로 들어보긴 했지만 자세히 들으니 더 좋다. 민익씨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 내가 왜 민익씨를 좋아하는지도 알겠다.
우리 집 바로 길 건너가 공연장이다 보니 미리 룸메이트들의 양해를 구하고 우리 집에서 먼저 만나 약간의 음주를 하기로 했다. 그가 양주를 가져왔고, 나는 너무 독해서 먹지 않았다. 민익씨는 잭 온 더 락이라는 단 한 가지 종류의 술만 마시는데, 잭 다니엘에 얼음을 넣은 술이다. 본인에게 가장 잘 맞고 숙취가 없단다.
나도 술을 좋아하기에, 어려서부터 내가 무슨 술이 잘 맞는지 내 몸으로 생체실험을 해 왔다. 결론은 약할수록 좋고, 그 이유는 무슨 술을 마시든 두 세잔이 넘어가면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다음날 숙취를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가져온 잭다니엘은 나에겐 너무 세다. 집에서 미리 만나 술을 마시려고 한 이유는 돈을 아끼려고 그런 건데, 나는 안 마셨고 민익씨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콘서트 장에서 더 마시기로 했다.
공연장에 입장하는 데 아무 일이 없으면 서운하다. 민익씨의 호주머니에서 맥가이버 칼이 나왔다. 나는 대체 누가 공연장에 가는데 칼을 들고 오냐고 물었지만 민익씨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뺏긴 칼을 아까워했다. 그는 할렘보다도 위에 있는 브롱스라는 동네에 산다. 거긴 칼을 들고 다녀야 하나보다. (상대가 총으로 쏘면 끝일 텐데 굳이...?) 나는 비교적 안전한 맨해튼에 살 수 있어 감사하다.
차일디시 감비노는 섹시하고, 멋있고, 노래도 잘하고, 그루브 한 감성이 있고, 왠지 반항적이고, 개성 있고 예술적인 가수였다. MSG에서 하는 공연은 하도 비싸서 나는 근처에 살지만 한 번도 못 갈 줄 알았다. 나를 데려와 준 민익씨에게 고맙다.
그는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나를 한 번 더 그 공연장에 데려갔는데,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인 존 레전드였다. (인간은 학습과 습득의 영물이다!!)
나 또한 그에게 보답하고자 보이즈 투 맨이라는 가수의 공연에 데려갔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가수이다 보니 민익씨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알고 보니 보이즈 투 맨 25주년 기념 공연이라는데, 트로트 디너쇼의 느낌이 난다.
존 레전드도 보이즈 투 맨도, 그리고 내가 데려간 할렘의 재즈바도 관객층은 늘 내 또래 혹은 그 이상이다. 내가 데려가는 공연들에서 그는 어딜 가도 제일 어려 보인다. 그가 하나도 모르는 노래를 들으며 공감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걸 보고 있으니 괜히 민망하다. 이게 바로 세대차이인가 싶다.
그렇게 우리는 온 뉴욕을 헤집으며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러 다녔다. 비록 관객의 연령층에서 세대차이가 느껴지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겹치는 접점이 있다. 그가 옛날 음악도 좋아하는 취향이 있고, 나는 요즘 음악 또한 좋아하는 취향이 있는 것이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우리의 취향은 곧잘 만난다.
알고 보니 그는 내가 말한 가수의 열렬한 팬이었고, 우린 좋아하는 가수나 음악의 장르가 비슷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팝송을 듣는다는 걸 신기해했고, 나는 그가 옛날 노래를 어떻게 아는지가 신기했다.
국적이 달라도 좋아하는 가수가 겹치듯, 우린 그렇게 같고도 다르고, 다르고도 같다.
좋아하는 것들로 말문을 열어보는 건 외국인과 대화할 때 꽤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