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꼬질이들 Sep 22. 2019

할로윈의 악몽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3


할로윈 맞이 첫 번째 이야기

이번 코스튬은 뭘로 할까?


민익씨와 맞는 두 번째 할로윈이 다가오고 있다.


그와 함께 처음으로 보냈던 할로윈은 퍼레이드에 가려고 조커 코스튬을 입고 잔뜩 꾸미다가 하필 가려던 광장에 테러가 일어나 괴상한 모습으로 그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러 갔다.


“설마 또 테러가 일어나진 않겠지?”


우리는 다시 이번 할로윈 의상을 궁리했다. 여러 의견이 나왔다. 이번에도 나는 각자 하고 싶은 거 하자는 주의였고, 민익씨는 커플 코스튬을 하고 싶어 한다. 이 남자의 버킷리스트 달성을 위해 나는 그의 뜻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했다.


그가 포켓몬에 나오는 악당커플을 하잔다.

나는 포켓몬스터를 단 한 편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유행했을 때 잠시 해보긴 했다. 한 때 뉴욕에서 그 게임은 꽤 유명했다. 특히 뉴욕의 관광명소들을 가면 좋은 몬스터들이 많이 숨어있다고 했다. 센트럴파크에 있는 큰 분수에는 리자몽이 산다고 소문이 나서 그 근처에 부쩍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다만 우리 집 근처에는 쥐같이 생긴 포켓몬만 계속 나와 소름이 끼쳐서 그만뒀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싶어서 슬프기도 했다.


아무튼 올해의 코스튬을 제안하는 민익씨의 말에 (일 년 전 할로윈이라 그때는 이 만화를 만든 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답니다 ㅠㅠ) 얼른 그 악당들의 패션을 찾아보았다.


대략 이런 느낌...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

하지만 민익씨의 로망을 채워주고 싶다. 이번에도 돈을 많이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자라에 갔는데 그 의상과 비슷한 하얀색 터틀넥 니트 반팔 티셔츠가 있다. 가위로 막 자르고 뒤처리를 안 해도 올이 풀어지지 않는 옷감이라 딱이다. 십 불 조금 넘는 가격에 폴라티를 구매했다. 옷의 기장을 자르고, 정 가운데 부분을 일자로 길게 잘라 사진처럼 슬릿을 줬다. 멋진 복근이 있으면 저렇게 배를 내놓을 텐데 나는 아기 같은(?) 몸매의 소유자다. 마침 집에 있던 딱 붙는 검은색 긴팔 티셔츠를 받쳐 입고, 밑에는 흰색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부츠도 집에 있는 검정 부츠를 신었다. 이번에도 내가 산 것은 만원 남짓의 티셔츠 하나다.


민익씨의 코스튬을 사기 위해 우리는 이번에도 함께 다운타운에 있는 코스튬 스토어에 갔다. 작년 할로윈 무렵 나는 그를 같은 곳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차가 막혀서 가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차피 우리 집을 지나가야 하는 그에게 앞으로는 나를 픽업해서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부탁대로 올해는 그가 우리 집 앞에 왔다. 약속에 늦지 않아도 되고 그와 더 일찍 만나 함께 목적지로 향할 수 있다. 올해 우리는 작년보다 조금 더 커플 같다.


나는 서운하다 싶은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는 편이다.

말하지 않고 쌓아두면서 가만히 상대방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다가 결국 폭발해 헤어짐을 선언하던 나의 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한 노력이다. 다행히 민익씨는 내가 말하는 것이 있으면 잘 듣고 최대한 맞춰주려 노력한다. 비록 그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지라도, 적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반면 나도 그와 대화를 할 때 내가 생각지도 못한 개념들을 배울 때가 있다. 당시에는 나와 생각이 너무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느낌이 들어 당황스럽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면 나만의 생각이나 틀에서 벗어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가 연애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달콤한 이유다.


민익씨는 이번에도 코스튬에 70불 정도를 사용했다. 너무 아깝지만 할로윈이 자주 오는 날도 아니고, 그가 평소 돈을 헤프게 쓰는 타입도 아니니 괜찮다. 무엇보다 이 남자는 옷이 별로 없어서 코스튬 대신 리폼하거나 받쳐 입을 옷도 없다. 민익씨는 지난번 조커 분장을 지우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화장품은 사지 않았다. 다시는 분장을 하고 싶지 않단다. 나는 그걸 거의 매일같이 해. 힘들겠지?라고 묻고 싶다.


할로윈 맞이 두 번째 이야기

사진 찍기를 험난한 미션처럼 하는 커플


코스튬 샵을 나와 바로 근처에 있는 일루젼 뮤지엄(착시 박물관)에 갔다. 다양한 착시효과가 가득한 공간에서 커플들이 너도나도 사진을 찍느라 한창이다. 나도 민익씨와 사진을 많이 찍고 싶은데 그는 사진 앞에서 한없이 어색하다. 그보다 사진을 안 찍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민익씨가 가족끼리 버뮤다로 여행을 다녀왔을 때 나는 잔뜩 기대하며 그에게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하지만 떠나는 길에 크루즈에서 바다가 출렁거리는 약 5초짜리 비디오 하나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상물이었다. 이거 하나 찍어오면 구경하는 사람이 재미가 하나도 없지 않냐 말해도 씩 웃고 그만이다. 게다가 그는 흔히 말하는 ‘사진 go자’다. 사진 찍는 방식조차 정직한 그는 자신의 키에 맞춰서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는다. 그럼 나는 이 착시 박물관에 있는 피사체들 중 하나처럼 다리에 비해 상체의 비율이 매우 비대한 인간이 된다. 그가 찍어준 사진들을 검열해보면 거의 내 안티 수준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주도적으로 사진기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 통탄할 일은 내가 그보다 딱히 나은 것도 없다. 나도 평소 사진을 잘 안 찍기 때문이다.


커플끼리 알콩달콩한 샷을 기대했지만 심오한 작품세계만이 남았다.


할로윈 맞이 세 번째 이야기

사과를 굳이 주우러 간 날


‘마트에서 사면되지 않나?’


사과 줍기 농장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다.


할로윈을 전후로 수많은 미국인들은 커다란 농장에 몰려가 제철의 사과를 따오고, 무시무시한 호박귀신 얼굴을 만들기 위해(펌킨 카빙, Pumpkin Carving이라고 해요.) 호박을 주워가는 행사를 한다. 그냥 집 앞 마트에서 사면될 것을 왜 굳이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함께 가는 멤버도 오묘한 구성이라 내가 긴장이 된다. 우리가 함께 사과와 호박을 주우러 갈 멤버를 소개하자면,


민익씨의 새엄마

민익씨의 양형제들

민익씨의 친엄마

민익씨의 친형제들


내 남자 친구의 어머니 두 분이 아버지 없이 함께 농장에 간다. 양어머니 친어머니와 함께 하는 농장체험. 왠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신기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안의 조그만 동양인 하나가 거기는 그냥 안 가는 게 좋겠다고 목청껏 소리친다.


내가 안 가면 본인도 안 간다는 민익씨의 말에 결국 못 이기는 척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실수로 내가 그의 내비게이션에 워싱턴을 입력해버렸다. 우리가 갈 곳은 민익씨의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농장이고, 워싱턴은 운전으로 세네 시간이 걸리는 백악관이 있는 곳이다.(바로 그 워싱턴 맞습니다.) 한동안 워싱턴을 향해 신나게 달리던 차는 뒤늦게 내가 발견해 목적지를 바꿨다. 우리는 이미 두 시간 정도 약속시간에 늦었고 함께 타고 가던 민익씨의 친동생 닉은 뒷좌석에서 ‘엄마가 나를 죽일 거다’라고 읊조렸다.


시작이 좋지 않다.

겨우 도착한 농장은 입장료는 1인당 12불이다. 하... 비싸다. 들어가니 만화에서나 봐온 진오렌지색의 호박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호박을 괴롭히지 말라는 표지판도 곳곳에 있다.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호박 위에 앉아 호박을 마음껏 괴롭히며 사진을 찍는다. 작은 호박은 하나에 4불, 큰 호박은 10불 하는데 아무거나 주워서 들고나가는 길에 계산을 하면 된다. 한편에는 난데없이 당나귀, 토끼, 돼지를 키우는 우리도 있다.


농장 내부에는 도넛이나 사과로 만든 잼과 같이 호주머니 용돈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것들이 곳곳에 있다. 그중에 우리가 먹은 것은 30센티짜리 핫도그와 말만 들어도 심장에 기름이 낄 것 같은 튀긴 오레오(Fried Oreos)다.


그 와중에 내 걱정은 기우였다. 민익씨의 친어머니는 새어머니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며 잘 다닌다. 역시 서양의 문화는 나에게 지나치게 쿨하다.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다. 30cm짜리 핫도그를 먹는 나를 보며 민익씨의 친어머니가 깜짝 놀라 외친다.


“젠, 진짜 긴 핫도그를 먹네!”


나는 언젠가부터 잘 먹는 자부심이 있다. 뭐든 끝까지 잘 먹던 친구와 함께 다녀서인지 눈 앞의 음식을 맛있게 싹싹 비우는 버릇이 생겼다. 놀라는 민익씨의 어머니를 뒤로 하고 핫도그를 클리어 한 뒤, 튀긴 오레오를 주문했다. 심장에 기름이 껴도 신기한 건 먹어봐야 한다. 튀긴 오레오는 시중에 파는 오레오 쿠키에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 것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오레오가 기름을 가득 먹은 채 부서지는데 역시나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왜 굳이 이미 튀겨놓은 과자를 또 튀겨서 먹는 것인가. 미국에 비만과 당뇨가 그렇게 문제라면서?!

민익씨를 비롯해 처음 먹어 본다는 그의 가족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좋아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들의 입맛에 깜짝 놀란다.

막상 목적했던 사과와 호박 줍기는 뒷전이다.

뒤늦게 사과를 주우러 갔지만 우리가 시기를 놓친 것인지 농장에서 이미 거둔 것인지 맛있는 사과들은 이미 모두 따가고 없다.


‘역시 마트에서 사면되는 것을...’


사과를 담으려면 비닐백을 사야 하는데 민익씨가 산 사이즈의 비닐백은 16불이나 한다. 결국 애꿎은 사탕만 사서 채워 넣는다. 주우러 간 사과는 안 줍고 계속 군것질만 한 것이다.


할로윈 맞이 마지막 이야기

할로윈의 악몽


드디어 대망의 퍼레이드 날이다.

이미 할로윈을 기념하는 꽤 많은 행사를 거쳤는데 이제야 할로윈이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남의 나라 이야기였는데 내가 남의 나라 행사를 이렇게 여러 번 챙기는 것이 신기하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 민익씨와 함께 준비를 하고 얼른 퍼레이드 장소로 향한다. 다행히 올해는 테러 소식이 없다.


민익씨는 지난번 구입한 코스튬을 처음 입어보았는데 사이즈가 작다. 길이가 짧아서 배꼽이 보일 지경이다. 안에 받쳐 입는 검은색 티셔츠가 없었다면 나보다 섹시할 뻔했다. 그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가 게이인 줄 알고 접근해 번호를 물어본 남자 직장 동료도 있다. 올랜도에서 워터파크에 갔을 때에도 지나가던 남자들이 나보다 민익씨를 더 많이 쳐다봤다. 남자들이 보기에 예쁘장하게 생겼나 보다. 아무튼 이 나라는 정말 재밌다.


막상 거리로 나오니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불편한 부츠 때문에 발이 너무 아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캐릭터의 이름을 부른다. 나나 민익씨나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다. 둘 다 누군가가 우리를 부를 때마다 어쩔 줄 모르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쳤다. 뭐하러 꾸몄나 싶다.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데 가는 내내 민익씨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고, 걷는 것도 싫어하다 보니 그에게는 퍼레이드가 쥐약인 것이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앞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내가 나서서 사람들 사이에 작은 공간들을 비집고 돌파해 헤치고 간다. 민익씨는 행여 남에게 피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그렇다고 마냥 이 사람들 속에서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있자니 내가 못 살겠다.


퍼레이드장으로 향하는 내내 우린 서로 말이 없다.

이별여행이 되었던 지난 유니버설 스튜디오 여행이 떠오른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는 매우 닮아있다. 힘들면 힘들다, 쉬고 싶으면 잠시 쉬자, 배가 고프면 밥을 먹자 말을 하면 되는데 옆에서 얼굴만 사색이 되어 내가 가는 대로 끌려다니기만 하니 보는 내가 숨이 턱 막힌다.


“힘들어?”


“아니, 괜찮아.”


괜찮다고 하지만 그의 이목구비와 얼굴색이 안 괜찮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친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랴, 군중을 헤치랴, 퍼레이드를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 자리를 잡으랴 혼자 바쁘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애초부터 퍼레이드에 함께 가고 싶어 했던 건 내가 아니라 민익씨다. 나는 함께 즐기고 그의 희망사항을 채워주러 여기를 온 것이지 나 혼자 일인 다역을 하겠다고 온 것이 아니다. 낯선 사란들과 이야기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는 좋은 기회인데 옆 사람은 똥 먹은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 속이 터진다. 사진을 찍으려 해도, 돌아다니며 도시 구경을 해도, 주변 사람들이 어떤 코스튬을 입었는지 관찰을 해도, 이 남자랑은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오분 정도 퍼레이드를 봤으려나. 흑마술의 기운을 풍기는 이 남자를 끝까지 곁에 두고 보다가는 흑마법의 저주에 걸릴 것 같다.


“나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아. 밥 먹으러 갈래?”


“그럴래?”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묻지만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근처 음식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주변 맛집은 분명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럼 나는 다시 흑마법의 저주에 걸린다. 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자고 했다.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 비건(vegan, 유제품이나 생선류도 들어가지 않은 완전한 채식)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는 비건 햄버거를 주문했고, 민익씨는 뭘 주문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음식이 나오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다. 기분이 나아졌나 보다. 나는 퀭해진 본인 옆에서 계속 눈치만 보다 아무것도 못했는데 말이다.


“우리 디즈니랜드 여행 갔을 때 기억나?”


“응.”


“나 지금 그때랑 기분이 똑같아.”


“무슨 뜻이야?”


“놀려고 온 건데, 자기는 도착하자마자 하도 힘들고 싫은 티를 내니까 내가 아무것도 못하겠어.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싫어하고, 구경하는 것도 싫어하고, 계속 그렇게 옆에서 뚱하게만 있을 거면 도대체 나랑 여기 왜 놀러 온 건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


나온 햄버거가 다시 뜨거워질 만큼 민익씨에게 맹공격을 퍼부었다.


“미안. 내가 사람 많은 곳을 좀 싫어하는 거 같아.”


유명한 곳은 대체로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번 사람이 없는 한산한 곳을 찾아 헤매거나, 아니, 뉴욕은 대체로 어딜 가든 사람이 많으니 우린 아예 집 밖을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다.


“... 사람 많은 클럽은 가잖아!!”


엄청나게 빨리 두뇌회전이 된다. 싸울 때만 돌아가는 최첨단 메모리다.


“그럼 내가 퍼레이드랑 안 맞나 봐.”


놀이공원도 본인의 형제들이랑 갈 때는 잘만 놀고 오는 거 같던데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그냥 나랑 노는 게 재미없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나하고도 노래방이나 레스토랑, 술집 같은 건 잘 간다.


그냥 본인이 하고 싶으면 괜찮고, 하기 싫은 걸 하면 억지로 따라는 오는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내가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불호가 분명하고 하기 싫은 건 곧 죽어도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반면 나는 누군가의 제안으로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처음에 하기 싫더라도 웬만하면 순순히 받아들이고 즐기는 타입이다. 우리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 또다시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직도 한 번 씩 서로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은 일 년 전이나, 디즈니 랜드에서나, 오늘이나 색다른 충격과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럼 앞으로 퍼레이드는 안 오는 게 좋겠네.”


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 흔쾌히 동의하고 최대한 즐길 방법을 구상해 왔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답답하다. 하지만 나도 퍼레이드가 좋지는 않다. 게다가 뚱한 남자 친구가 떡하니 곁에 있으니 무엇 하나 즐거울 일이 없다. 다음부터는 꼭 친구와 함께 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나의 일방적인 퍼 부음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하루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그의 못된 버릇을 고쳐주기로 했다.


”나 여기 가보고 싶은데.”


창설 40주년인가를 기념하는 이벤트성 디즈니 팝업 뮤지엄이다. 가고 싶지 않다고 그의 얼굴이 그를 대신해 대답한다. 그 이후 몇 번 더 언급해봐도 여전하다.


“그럼 자기는 안 가도 돼. 나 혼자 갔다 올게!”


내가 생각해도 쿨내가 펄펄 난다. 처음에는 약간의 화가 섞여있었다.


“괜찮아?”


“응!”


여자 친구가 가보고 싶은 곳에서 데이트를 하자고 제안하는데, 저렇게 싫어하는 남자 친구가 있을까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든다. 처음에는 더럽고 치사해서 나 혼자 간다는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가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데려가 봤자 서로 기분만 상할게 뻔하다.


결국 뮤지엄에 혼자 갔다.
비디오와 사진도 실컷 찍고, 모르는 사람들과 한데 섞여 게임도 하고, 사은품도 받고, 작품도 하나하나 감상한다. 하나하나 내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옆에 민익씨가 있었다면 이렇게 즐기지 못했을 거다.
심각하게 즐겁다.



뮤지엄을 나오는 길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자기에게 화가 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게 묻는다.


“어땠어? 괜찮았어?”


“응!! 끝내줬어!!!”


뮤지엄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말해주고 진심으로 즐겁게 관람했던 마음을 실감 나게 표현해줬다.


“와... 나도 가보고 싶네.”


“이걸 어쩌나. 이미 늦었네. 다음에 다른 재밌어 보이는 거 있으면 가던지!”


그가 내키지 않아 하면 혼자서나 내 친구랑 하면 그만이다.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알아야 둘이서도 행복한 거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굳이 모든 일을 그와 함께 할 필요는 없다. 그가 날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필요도 없다. 나도 그를 위해 지나치게 희생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된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 지내는 게 사람과의 자연스런 관계가 아닌가.



다만 퍼레이드만큼은 둘 다 안 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요즘 사는 게 갑자기 바빠져서 글이 많이 늦었어요. 추석은 다들 잘 보내셨나요? 이제 쌀쌀한 가을인데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하트뿅뿅)





매거진의 이전글 민익씨 어머님의 50번째 생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