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4
원래는 세 번째여야 하는데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헤어진 후 따로 보내서 두 번째가 되었다.
함께 보낸 작년 크리스마스는 민익씨 할아버지의 생신 파티에 참석하고 바로 뒤에 회사에서 하는 파티에 가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민익씨의 어머님 집에서 보냈다. 생각해보니 우리 둘이 온전히 크리스마스를 보낸 기억이 없다.
이번에는 둘만의 기억을 많이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 순간 민익씨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다.
호출이다.
미셸(민익씨의 새 어머님)이 크리스마스 기념행사를 하나보다. 그녀는 자주 이벤트의 주최자를 도맡는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추억을 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그녀에게는 자폐증이 심한 열한 살 짜리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에게 사람들로부터 신선한 자극과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그녀의 낙이라고 했다. 나는 민익씨의 친어머니에 비해 그녀와 거리감이 있긴 하지만, 감정 기복이 심한 민익씨의 아버지에게 비위를 맞추고, 아픈 아들을 포함한 두 아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여러 이벤트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모든 멤버들을 확인하고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존경스럽다.
게다가 그녀가 주최하는 모든 이벤트는 무료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몸뚱이만 가면 된다. 급한 호출이긴 하긴 하지만, 재밌는 이벤트를 만들어 초대해주니 고맙다.
도착하니 무엇인가 박스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세상에, 어릴 때 내가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읽으면서 그토록 침을 흘렸던 쿠키하우스 DIY 세트다.
각자 팀을 짜서 원하는 모양의 쿠키 하우스를 고르고, 팀별로 협동해서 만들면 된다. 민익씨와 나, 민익씨의 형 빈센트, 민익씨의 동생 닉과 그의 여자 친구 레즐리, 미셸의 아들 대니, 미셸의 조카 두 명이 각자 하나씩 맡아 총 6개의 과자집이 완성된다.
미셸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지난 10월 나는 민익씨와 농장에서 주운 호박을 칼로 파서 무서운 얼굴을 만드는 (미셸이 주최한) 펌킨 카빙 행사에서 열심히 무시무시한 얼굴을 만들었지만 아무도 우리의 호박을 좋아하지 않아서 꼴찌의 고배를 마신 기억이 있다.
“악... 나는 경쟁이 싫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민익씨와 미셸이 둘 다 들었다. 민익씨는 싱긋 웃었고, 미셸은 못 들은 척하며 부엌으로 향한다. 민망함이 나의 오장육부를 타고 얼굴로 몰려온다. 열심히 준비해 준 호스트에게 예의가 아니다. 입을 다물고 열심히 참여해야겠다.
과자집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과자 바닥을 기초로 두고 네 모서리에 벽을 올리는데 아이싱(컵케익에서 빵 위에 장식을 할 때 설탕으로 만든 단단한 크림)을 미장질을 하듯 발라서 그 위에 과자 벽을 세운다. 아이싱이 담긴 튜브는 따뜻한 물에 중탕해서 조금 녹인 후, 고깔같이 생긴 통의 입구를 살짝 자르고 몸통을 지그시 누르면 잘 나온다. 아이싱을 짜는 민익씨의 모습이 영 서툴다.
“자기야, 이리 줘 봐. 내가 해 볼게.”
케이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자신이 있다. 나의 현란한 아이싱 솜씨에 탁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다.
“이런 거 해 본 적이 있어?”
빈센트가 묻는다.
“아이싱으로 하는 건 처음이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한다.
민익씨는 경쟁상황에 처하면 어떻게든 이기려고 세상 진지하고 심각해진다. 나는 그런 그가 재미있어서 훼방을 놓는다. 심각한 상황에서 웃기면 더 웃기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아이싱 다루는 실력도 뽐냈겠다 왠지 다시 오기가 생긴다. 나도 모르게 열심히 집중을 하고 있다. 빈센트야 말로 진정하게 승부에 관심이 없다. 그를 제외한 모든 팀이 쿠키 집이 불에 탈 정도로 열을 올린다.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닉이 말한다.
민익씨가 어려움을 겪다가 나는 못하겠단다.
“자기야, 할 수 있어. 힘 내.”
절벽 산을 오르는 동료 대원에게 할 법한 비장한 분위기로 그에게 말한다.
닉은 그걸 자기 여자 친구 레즐리에게 ‘저렇게 말해봐.’라고 시킨다. 그런 말이 듣고 싶나 보다. 레즐리는 그걸 또 시키는 대로 한다. 나 같으면 ‘이 남자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싶어서 다시 나온 간이 뱃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강펀치를 먹여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닉은 지난번에 호박 카빙을 할 때도 우리는 협동이 잘 되는 것 같다고 부러워했다.
닉의 여자 친구 레즐리는 어리고 예쁘고 몸매도 성격도 좋은데, 닉은 거기서 딱 하나 없는 애교를 찾고 있다.
나는 닉처럼 자기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어렵다. 나 또한 어릴 때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건 한 없이 작아 보이고(혹은 아예 보이지 않고), 남이 가진 것들은 좋아 보였다. 꼭 내가 없는 것만 보였다.
나는 종종 닉이 레즐리에게 하는 말들을 어깨너머로 듣고 닉에게 그런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급기야 나중에 닉은 그녀에게 헤어짐을 선포했고, 닉은 우리 앞에서 다른 여자를 많이 만나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속으로 격분했지만, 그 자리에 없던 레즐리는 참을성 있게 닉을 한참 동안 기다려 주었다. 결국 그들은 재결합을 했고, 지금은 잘 지낸다. 아직 스무 살 밖에 안 된 닉이기에, 연인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느꼈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디 민익씨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의 활약으로 과자 집 만들기는 성황리에 마무리가 되었고, 승자를 정하는 시간이 왔다.
민익씨의 아버지, 미셸, 그녀의 어머니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과자집을 골랐고, 이상하게도(?) 최종 일등을 결정하는 사람은 미셸의 새아버지가 되었다. 평소 나를 예뻐하던 할아버님은 당연히 우리의 작품을 뽑았고, 미셸은 몇 번이고 확실하냐고 물어봤다. (ㅠ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민익씨의 할아버지가 사는 업스테이트의 저택에 가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어려울 것 같다. 아직 12월 초니까 크리스마스까지 시간이 좀 있다. 그 사이에 둘만의 데이트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한인이 많이 사는 퀸즈라는 동네에서 유명한 찜질방에 놀러 가기로 했다. 민익씨에게 양머리도 해주고, 양념갈비와 치킨 덮밥도 먹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유명한 찜질방이라지만 한국에서는 동네 찜질방 정도의 수준이다. 다만 바깥에 있는 스파의 뷰가 끝내준다. 비키니를 입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되는데, 얼마나 락스를 부어놨는지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민익씨에게 말한다.
“자기야, 나 도저히 눈물이 나서 앉아있을 수가 없어. 들어가자.”
민익씨가 존 레전드(John Legend)의 콘서트를 보여주기로 했다. 내 생일에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예약한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결과다.
결과적으로는 민익씨가 나를 억지로 데려간 이전 콘서트가 더 감동적이었다. 존 레전드도 좋긴 했지만 너무 콘서트를 많이 해서 그런지 영혼이 좀 없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말하기 무색하게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와 함께 ‘비록 나는 지금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꼭 돌아가겠다’는 가사의 ‘by christmas eve’라는 곡을 들으며 오열을 했다.
(한 번 들어보세요. 분위기가 좋답니다.)
뉴욕에서 가장 크게 크리스마스가 오는 마을이 있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누가 누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는지 대회가 열리는 마을이라고 한다. 민익씨에게 가보고 싶다고 졸랐다. 사진을 검색해보더니 그도 흥미가 생겼는지 한 번 가보자고 한다. 밖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차 속에서 편하게 드라이브를 하며 구경을 하니 내 팔자가 상팔자다. 민익씨에게 차를 사는 건 과소비라고 잔소리를 해 왔는데, 이날부로 그 말을 접었다.
보타니컬 가든은 식물원이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나무들이 예쁘게 꾸며져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득 안고 향했다. 도착하니 평소보다 티켓을 50% 정도 싸게 판다. 좋긴 한데 뭔가 예감이 안 좋다.
식물은 겨울에는 죽었다가 봄에 다시 태어난다
자연의 대 섭리를 잠시 잊은 것이다.
나무는 별로 없고 주로 풀이나 꽃이 위주인 식물원에서 우리는 황량한 벌판에 꽃의 이름이 적힌 팻말만 잔뜩 보고 다녔다.
보타니컬 가든에 있는 나무들 앞에는 팻말이 하나씩 서 있다. 처음에는 나무 이름이 적혀 있는 줄 알았는데, 같은 종류의 나무들 앞에도 각자 하나씩 팻말이 있어 궁금해졌다.
작은 글씨를 찬찬히 읽어나가다 보니 눈에서 또 수도관이 터졌다. 나무 하나하나 가족이나 연인이 떠난 사람을 기리기 위해 메시지를 담아 팻말을 세워 둔 것이다. 아까 우리가 쉬었던 벤치의 등받이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있다.
집에 와서 룸메이트들에게 내가 본 팻말들을 설명하는 와중에도 눈물이 나서 혼났다.
뉴저지에 있는 민익씨의 할아버지 댁으로 향하는 길. 별생각 없이 차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도착하니 으리으리한 별장 같은 저택이 눈 앞에 있다.
내부는 더 화려하다. 전시관도 아닌데 집안 곳곳에 반짝이는 기차가 선물을 품고 지나다니고, 전기로 움직이는 사람만 한 인형(!)들도 있다. 응접실의 맞은편은 사방이 거울로 되어있고, 천정은 베르사유 궁전의 내부처럼 황금색 바탕에 온갖 장식과 무늬가 있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위해 지은 집 같다.
민익씨의 아버님은 이탈리안이다. 민익씨의 할아버지인가 증조할아버지 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단다. 민익씨가 사는 브롱스는 리틀 이태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을 정도로 그 시절에 정착한 이탈리안이 많이 산다.
스무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커다란 방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서 이탈리아 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다.
마치 이탈리아에 온 것 같다.
온갖 음식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에피타이저로 살라미와 하몽같은 소시지, 치즈, 비스킷 등을 먹었는데 이미 배가 부르다. 이어서 조개 구이, 파스타, 훈제 연어 등 온갖 해산물의 향연이다.
프랑스인들이 식사를 오랫동안 한다는 건 들었지만 이탈리안도 만만치 않은가 보다. 식당의 한 켠에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종류별로 있는데, 없어지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다들 말은 또 어찌나 빠르고 많은지, 현란한 손짓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난다. 오늘은 민익씨를 만난 이래로 가장 컬처쇼크를 받은 날이다.
끊임없이 리필되는 진기한 요리들과 큰 저택을 왁자지껄하게 메우는 이탈리아 어로 나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있을 즈음, 민익씨의 아버지가 묻는다.
(Jenn, are you alright?)
내가 걱정이 되셨나 보다.
이내 식탁의 맞은편으로 가시더니 맛있어 보이는 이것저것 그릇에 담아 가져오셨다.
미셸에게 한 접시를 건네주고, 하나는 내게 준다.
“우와, 너무 스윗하신데요?”
민익씨에게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낯선 대접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민익씨의 아버지는 정말 섬세하게 이것저것을 잘 챙겨주신다. 미셸에게 가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일을 하고 돌아와서 요리, 청소 등의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부터 세금, 전기세 등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도맡아서 한단다. 미셸은 집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이벤트를 주최하는 일(?)을 한단다. 어쩐지 살림에 지친 엄마라면 그 많은 이벤트들은 도저히 엄두가 안 날 일이다.
내가 진심으로 감동받은 기색을 보이자, 민익씨가 내 접시를 보더니
“이거 더 갖다 줄까?” 하고 묻는다.
민익씨의 아버지에게 덕분에 이 남자가 이런 걸 다한다고 몇 번이고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것을 보고 자랄 수 있었다면 여자를 대하는 법을 잘 알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가 쑥맥인 것이 이해가 간다.
“도미닉(민익씨의 아버지의 이름. 민익씨의 풀네임은 도미닉 제임스 주니어에요^^;)이 취했어.”
내가 선물한 목도리를 두른 미셸이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넨다. 민익씨의 아버지가 취하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이 없어지고, 뭔가 특정한 행동을 한다는 내용인데 너무 빠르게 이야기해서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결국 민익씨의 아버지가 너무 취해서 비틀대다 그대로 쓰러져 아무데서나 잠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어둑해질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장장 한 달간의 크리스마스 행사와 온갖 데이트들을 마무리하는 순간이다.
민익씨가 작은 카드를 건넨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
수많은 추억들을 기대할게.
사랑해.
메리 크리스마스!
카드 앞 면에는 ‘mistletoe’라고 부르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그려져 있다. 내게 그 그림을 머리 위로 들어보라고 하더니 뽀뽀를 쪽 한다. 미슬토 밑에서 뽀뽀를 하는 전통 같은 게 미국에 있나 보다.
가끔은 이 남자가 잘해주기 귀찮아서 쑥맥로봇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