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꼬질이들 Oct 16. 2019

우리가 싸우는 방법 (feat. 밸런타인데이)

미국 남자와 연애는 처음이라 ep.26


두 번째로 우리가 함께 맞는 밸런타인데이다.


지난해에는 그를 도와 내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과연 그가 나를 어떻게 놀라게 해 줄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는 기념일을 챙기지 말자 주의였다.

전 남자 친구는 서로가 첫 번째 연애 상대여서 그런지 100일, 200일, 300일부터 1년 모두 챙기려고 했다. 나는 기념일이 무슨 소용이냐며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둘 중 하나가 까먹으면 괜히 싸움만 난다고 했었다.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민익씨가 열심히 챙겨줄 때 기쁘다. 평소 표현이 크게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쩜 태생은 엄청나게 표현이 풍부한 나라인 미국이라는 데, 표현만으로 보자면 조선 시대에 태어난 선비라 해도 무방하다.


나는 민익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데이 케어에서 ‘앤지’라는 그녀의 친구가 일하는 걸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평소에 그를 일주일에 주말에 한 번에서 두 번만 봤다면 이제는 마음을 먹고 기다리면 매일매일도 볼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그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나 오늘 일 끝나고 기다릴게. 어디쯤이야?”


“이제 집에 돌아가고 있어.”


그가 이번 해에는 나와 함께 이벤트를 준비하지 않기 위해서 뭔가를 마련해서 오고 있을까? 한 손에는 장미가 가득하고 한 손에는 초콜릿이 들려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흐뭇하다. 기념일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외치던 소녀는 이미 온데간데없다.


역시나 그는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빈 손이다.


그래도 주인을 본 강아지마냥 반갑게 맞아준다.


“나 배고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응!”


“어디 갈래?”


“자기가 혹시 추천할만한데 있어? 아, 근데 오늘 왠지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다! 내가 한 번 찾아볼게.”


그는 맨날 똑같은 레스토랑만 가고 똑같은 메뉴만 먹는다는 것이 떠오른다. 황급히 내가 레스토랑을 골라보기로 했다.


”여기 가보고 싶어.”


제일 평점이 높고 근사해 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음식들이 맛있어 보인다.


브롱스에 위치한 안토니오 트라토리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브롱스에는 이탈리안 이민자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인 리틀 이태리가 있다. 맨해튼에 있는 리틀 이태리가 상업적이라면 브롱스에 있는 리틀 이태리는 조금 더 로컬스럽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삼청동과 청학동의 차이랄까.


아무튼 이곳에 가고 싶다.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지.


“거긴 주차할 장소가 있는지 모르겠어.”


“그럼 어디 가?”


“엔조(Enzo’s)?”


엔조와 패트리샤는 우리가 항상 가는 레스토랑이다. 나보고 가고 싶은데 있냐고 해서 열심히 기껏 찾아봤더니 결국은 맨날 가던 똑같은 데로 가자니. 맥이 빠진다. 뭐하러 찾아보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 초콜릿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하루를 때우려고 하는 건가. 작년 하고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자 머리에 열이 오른다.


분노가 쌓인다.

삐지기 직전이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삐지다’의 표현을 비슷하게 영어로 표현하자면 ‘passive aggressive(수동적 공격성)’이라고 표현을 한다.


마음속에 grudge(원한;;)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소심하게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나는 이전의 연애를 하면서는 삐지고 화내기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미국인과 연애를 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첫째, 영어적 표현력의 한계이다.

삐지면 감칠 나게 툭툭 뱉는 말에 나의 분노를 은근히 표현해야 하는데 영어로 마땅한 뉘앙스를 찾기가 어렵다. 자칫하면 굉장히 무례하게 들리거나, 아예 이해를 못하거나, 지나치게 큰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둘째, 민익씨는 나에게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평화주의자다.

돌이켜보면 나만 그에게 화가 나거나 싫은 소리를 하고, 바라는 점도 많다. 그가 나에게 이야기를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든 내게 불만을 표하지 않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너무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예전 연애도 생각해보면 같은 상황이지만 맘껏 화를 냈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셋째, 싸울 기력이 없다.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요즘 같은 경우는 편한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도 금방 힘이 달린다. 집에 오면 지쳐서 쓰러질 정도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에너지 소모가 크다. 겉으로는 활달하고 말도 많지만, 이야기를 하는 도중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하지 않을까, 상대방의 기분은 어떤가 살피느라 내 상태를 체크하는 것을 종종 잊는다. 내가 명상, 요가, 운동 등으로 이완하는 방법을 꾸준히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고쳐나가야 할 숙제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삐지기의 달인’에서 ‘잠시 시간 차를 두고 차근차근 따질 말을 고민하는 여자’가 되었다.


화가 날 때 잠시 시간 차를 두고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럼 우선

1. 흥분이 가라앉고,

2.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3.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정리가 된다.


해결중심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름 나에게는 여태까지 발전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방법인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거나, 이미 기억에도 없는 일을 도로 가져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보통 기분이 나빠지는 일이 있을 때 타임아웃은 24시간을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은 가벼운 일이다.


그의 차를 타러 가는 길에 할 말을 생각한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별 말없이 머릿속에 할 말을 생각하며 걷는다.


‘이건 내가 삐질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때 내게 벌어진 일에 나는 100% 만족할 수 있는가?

어떻게 말하면 되도록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고 내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까?’


주차장을 가는 동안 누군가 내 표정을 봤다면 세기말에 악마와 계약을 하러 가는 길처럼 비장해 보였을 것이다.


결정했다.


이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냥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가고 싶은 데 찾아보라고 해서 기껏 찾아봤더니 주차장 없다고 똑같은 델 가다니 기분이 안 좋아.”


꿍얼꿍얼 불만을 표출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럽다. 내 목소리는 액체 괴물처럼 자동차 시트에 눌어붙는다.


“그래. 그럼 자기가 찾아본 데로 가자.”


“응?”


의외로 쉽다.

뭐야. 그냥 말하면 되는 건데.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왜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어?


머릿속에 있는 또 다른 나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눈다.


“주차장 없대며.”


입을 삐죽 내민다. 삐지기 기술을 시전 하기 직전이다.


“주차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주변에 차 댈 데가 있나 찾아보면 돼.”


씨익. 진작 그럴 것이지. 그 당시에 내가 폭발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니!! 뭐야!!!! 그럼 왜 찾아보라고 한 건데!!!!’


이랬다면 레스토랑은커녕 그대로 지금쯤 집에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스토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댄다. 견인의 공포가 엄습한다.


‘빨리 먹고 오면 될 거야.’


여기까지 온 것이 헛되지 않도록 맛있었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이 레스토랑의 열렬한 팬이거나, 날 때부터 고집불통 천하장사다.


나는 해산물이 들어간 크림 파스타를, 민익씨는 항상 먹는 토마토 치킨 파스타를 주문했다. 나 혼자 와인도 마시고, 끝으로는 둘이서 레몬 소르베도 나눠 먹었다. 배가 고파서 더 예민했던 것 같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느슨해진다. 그래도 아까 따지던 것은 마저 따져야겠다.


“아니, 이벤트도 없고 초콜릿도 없고 맨날 가던 음식점을 또 가려고 하다니. 아무리 두 번째 밸런타인데이라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거 아니야?”


“흥. you’ve changed(변했어).”


드디어 한국 필살기 ‘변했어 스킬’을 시전 한다. 이 미국 남자는 반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웃음) 미안해.”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는 데 어쩌겠는가. 그대로 싸움 끝이다.


다음 날 민익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 초콜릿과 케이크, 장미 한 다발을 놔두고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가 직접 손으로 쓴 카드도 있다.



‘Happy belated Valentine’s Day.’

(뒤늦은) 밸런타인데이 축하해!









오늘의 교훈: (아주 가끔은) 바가지를 긁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기 단계 도민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