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나를 떠나보낸 후
눈을 뜬다.
전화를 받는다.
“Hello”
여보세요
“Good morning Honey.”
좋은 아침이야
“My sleep was good. How was your day?”
잘 잤어. 오늘 하루 어땠어?
“My day was good so far. I did this, this and this...”
내 하루는 좋았어. 난 이것도 했고. 이것도 했고. 이런 일도 있었고~
나는 민익씨의 미래에 산다.
나는 여름에 그보다 13시간, 겨울에는 14시간 앞서있다.
나의 아침 8시는 그의 오후 6시이고, 나의 밤 10시는 그의 오전 8시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와 끝을 함께 시작하고 함께 마칠 수 있다.
장거리 연애의 몇 안 되는 장점이다.
또 하나의 장점을 꼽자면, 같이 붙어 있었을 때 보다 세세한 일들을 모두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떠나기 전 우리는 ‘장거리 연애 성공하는 방법’에 관한 글을 섭렵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데이트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주말마다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라.
상대방을 믿어라.
그리고 서로를 믿어라.
민익씨는 나를 따라서 한국에 오겠다고 했다.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닐 것이다.
그가 구체적인 계획을 고민하지 않아도,
실제로 실행하지 않아도,
나는 이해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이제 대충은 민익씨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는 말이 없지만 한 말은 진심이고, 대부분 지킨다.
그가 나를 따라오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올 수 있을지는 왜인지 모를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름을 들으면 알 법한 유명 패션회사다.
박봉인 패션 세계에서 돈도 제법 주고, 유명한 브랜드이다 보니 내가 첫 발을 내딛기에 괜찮은 곳 같다.
“근데 나이가 좀 걸리네요.”
미국에선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다.
“걱정하시는 것이 무색할 만큼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한다.
‘네, 그럼 시간을 되돌려 어려지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회사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노력 중인 듯하다.
그리고 내 열정에 발목을 잡는 말들이 이어진다.
대충 정리해보자면,
월요일부터 금요일 출근은 엄수 퇴근은 보장할 수 없다. 주말 근무에 동원되어야 하고, 가끔 창고 정리나 몸을 쓰는 일도 해야 하며, 백화점에서 팝업 스토어가 열리면 거기도 동원돼야 한다.
사장이 웃으며 말한다.
이 말은 초과 근무에 동원이 되어도 돈은 안 줄 거라는 말이다.
과연 이 대사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
“휴가는 있나요?”
이쯤 되면 이 판 사판이다. 신입이 해서는 안 될 질문도 던졌다.
“여름에 5일 쓸 수 있고, 혹시 일주일에 7일을 일하면 우리가 매번 대체 휴일을 줄 수는 없지만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인터넷에서 리뷰를 봤을 때는 휴가도 눈치보며 써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에 7일동안 초과해서 일하는 날도 있을거란 생각에 가슴이 턱 막혀온다.
그리고 내 장거리 남자 친구, 민익씨가 생각난다.
그가 오기도 전에 우리는 연락도 없이 지내다 헤어지게 될 수도 있다.
나를 위해 한국까지 와준다는 남자 친구를 떠올리다 이번에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쁜 삶은 좋다.
누군가를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바쁘더라도 보람차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틈틈이 데이트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회사를 위해 희생한다는 피해의식 없이 살 수 있다.
여러 고민을 했지만, 내가 과연 그런 엄청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지난번 인터뷰 본 회사 ㅇㅇㅇ입니다.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아서 문자 드립니다. 연락 주세요.
합격인가? 기쁜데 기쁘지 않다.
거절할 말을 생각하고 전화를 건다.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어요. 언제부터 일하실 수 있나요?”
내가 고민도 없이 당장 일 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만하면 인터뷰는 성공적이다.
죄송하지만 내게 더 잘 맞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전화를 맺었다. 말을 듣자마자 사장은 기분이 상한 듯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그 후로도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여러 차례 이곳 저곳에서 인터뷰를 보았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만 진다. 알고보니 가장 처음 인터뷰를 봤던 곳이 획기적이었다. 합격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웃는 상인 데다, 열심히 몸바쳐 일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
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기로 한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면 너무 바빠서 통화도 못할 거고, 우리는 8개월 넘는 시간 동안 점점 멀어질 것만 같아. 그래서 취직할 용기가 안나.”
“조금이라도 짬을 내서 연락하면 돼. 카톡을 해도 되고, 주말도 있잖아.”
“주말도 일하게 될 것 같던데...”
“한국 사람들은 진짜 열심히 일 하는구나.”
“패션계가 유난히 심한 것 같아...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가 그렇게 살고 싶은지 모르겠어.”
“잘 생각해봐. 난 어느 쪽이든 자기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민익씨와 내가 입장이 바뀌었다.
늘 그가 힘들어할 때 내가 토닥여주는 상황이 많아 아들 키우는 것 같다고 핀잔을 줬는데, 그새 아들이 다 컸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그만뒀다.
회사에서 대량으로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내는 일 대신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뭐 하자는 거지?’
분노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너는 네 인생을 사는 그의 아메리칸 마인드가 슬금슬금 피어올라 내 신경을 건든다.
“응.”
당연하다는 듯이 그가 말한다.
“어떻게 올 건데?”
비행기 타고 라고 말하면 당장 날아가서 손모가지를 살짝쿵 꺾어버릴 요량이다.
“글쎄.”
이것 또한 손모가지 꺾을만한 답변이다.
나는 가끔 그가 오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나 링크들을 보내주곤 한다. 그는 고맙다며 체크를 한다. 하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돼. 괜히 온다고 하면 나는 벌써부터 이런저런 걱정들을 하잖아. 자기가 오든 안 오든 내 삶이 지금 하고 특별히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 줬으면 좋겠어.”
“응. 알겠어.”
선언을 한 뒤 며칠간 그의 정황을 살핀다.
굼벵이가 뜨듯한 화롯가에서 파리가 되기를 기다리며 뒹굴 거려도 민익씨보단 빠를 것 같다. 속이 터진다.
마음을 추스르고 최종 선전포고를 한다.
“자기가 오겠다면 나는 이번 해 까지는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만약 오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어쩔 수 없이 늦어지는 경우라면 내년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처럼 자기가 딱히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그때도 보인다면 나는 자기가 오고 싶지 않은 걸로 간주하고 헤어지자고 할 거야.”
다음날 민익씨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데 필요한 교사 자격증 과정에 등록했다.
박박박..... 이 소리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바가지를 긁는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