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자와 장거리 연애는 처음이라 ep.2

손도 잡을 수가 없다

by 뉴욕꼬질이들


민익씨가 내 곁에 없는 시간은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간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할 때 가장 두려웠던 점들 중에 하나는 ‘물리적 거리감’이었다.


이제는 내가 울 때 조용히 안아 줄 넓은 가슴이 없다.

나를 지치게 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의 끝에 잠시 만나 기댈 어깨가 없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사이좋게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팝콘을 들던 그의 손이 없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쁜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미리 약속을 잡거나, 혼자서 해야 한다.

우리는 태생이 집돌이 집순이라 친구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흔하지 않다.

먼저 연락할 일을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혼자서 하고 만다는 주의다.


그러던 내게 그가 없는 기나긴 주말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


대체 해야 하지?


태평양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후, 우리는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주말을 두려워했다.


내가 먼저 미국에 살게 되었다면 일 년에 한 번이나 볼 수 있을 뻔한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배우고 싶었던 이것저것을 배우러 다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만나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내가 바쁘게 지내자 민익씨도 나와 만나느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에게 하나 둘 연락해 주말을 즐기기 시작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사랑 따윈~ 믿지 않아~~

독신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난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줄곧 외쳐대던 어린 시절 내가 하던 연애의 기조는 ’그저 곁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친구보다 조금은 더 친밀하고 가족보다는 조금 멀리 대할 수 있는 관계

그가 있어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그에게 덜어낼 수 있다는 것

맛집을 함께 다닐 사람이 있다는 것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로 내가 완성되는 듯한 느낌


그렇게 도구적인(?) 사랑을 하던 나에게 장거리 연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인생을 거쳐간 몇몇 사람들로 인해 나는 사랑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었고, 마침내 민익씨와의 장거리 연애에 도전할 마음까지 먹었다.


우리의 장거리 데이트가 이뤄지는 시각은 대체로 나의 아침 10시부터 늦어도 오후 1~2시, 저녁 10시 정도부터 새벽 1~2시까지이다. 서로 스케줄이 있는 시간을 빼면 대략 2~3시간 정도 한 두 번 정도 데이트를 할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뭐하지?”


“글쎄. 뭐 하고 싶어?”


“왕좌의 게임 볼까? 그러고 나서 또 다른 거 보자.”


같은 드라마 함께 보기는 장거리 연인이 할 수 있는 유력한 활동들 중 하나다.


민익씨는 왕좌의 게임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푹 빠져있다. 나는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 있게 보진 않았지만 보다 보니 흥미가 생겼다. 다만 마지막 회가 끝날 때까지 누가 누군지 이름을 몰랐을 뿐.


왕좌의 게임에서 마지막 시즌은 오랜 기간 동안 이어 온 명작을 망쳐놓은 걸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왕좌의 게임을 좋아한 사람들의 기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쇼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만도 한 것이, (스포일러 주의!)


친동생이 누나와 연인관계로 지내다 누나가 왕좌를 노리니 살해하고, 결국 쇼 내내 별 비중도 없이 가만히 있던 누군가가 왕좌에 오르는 스토리는 누가 누군지 모르는 내가 봐도 딱히 매력적이지는 않다.


웬만하면 비판을 하지 않는 민익씨조차 쇼를 볼 때마다 끝나고 나서 분통을 터뜨린다.


“그 이야기를 꼭 그렇게 썼어야 했을까?!”


“그러게.”


그에게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이라 나는 마냥 재밌게 들어준다.


“이번엔 뭐 볼까?”


이번에는 남녀로 구성된 구성원이 룸메이트가 되어한 집에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리얼리티 쇼로 다룬 프로그램을 본다.


하트 시그널 같은 프로그램인데 꼭 연애에만 집중되지는 않아 재미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저 사람은 이런 점이 멋있네, 이 사람은 분명히 이 사람을 좋아하네 어쩌네’ 하며 코멘트를 던진다.


이번에는 민익씨가 들어주는 쪽이 된다.


장거리 연애에서 티비쇼를 보는 방법은 조금 우습다.

노트북으로 전화를 걸고 나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시청하려면 민익씨의 얼굴도, 시청하고 있는 쇼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우리의 해결책은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걸고, 노트북으로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보는 동안 핸드폰에는 내 얼굴이 계속 나오도록 어딘가에 두고 있거나 계속 손으로 폰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나는 쇼가 끝날 때쯤 손목이 부들부들 거리 거나 어딘가에 세워놓은 폰이 자꾸 넘어지는 통에 짜증이 나서 결국 그냥 노트북으로 영상통화를 걸고, 티비 쇼는 가끔 민익씨의 얼굴을 가린다.(그는 모른다.)


하지만 민익씨는 손으로 꿋꿋이 핸드폰을 들고 티비를 본다. 가끔은 천장만 보여주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창밖 풍경을 한참 동안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가 가끔 크게 웃거나 미소를 짓거나 하면 나는 흐뭇한 눈길로 뿌듯하게 바라본다.


귀찮기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함께 볼 때 서로의 리액션을 확인하거나 해당 쇼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옵션인 것 같다.


다시 리얼리티 룸메이트 방송으로 돌아가, 그곳에 나오는 남자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니 민익씨만한 남자가 없다.

그도 막상 저기에 출연하면 저 사람들처럼 정신 못 차리고 여기저기 줏대 없이 기웃거리려나 싶다가도, 막상 저기 출연을 하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없어지겠다 생각도 들고, 이 남자는 지금 내 남자 친구인데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가끔 내가 예측한 줄거리대로 인물의 감정이 흘러가면 잘 나가는 드라마의 줄거리를 맞춘 것보다 짜릿하다.


또 흥미롭게 본 티비 쇼는 ‘더 보이즈’라는 프로그램인데 슈퍼 히어로들이 알고 보니 세계 최강 악당이라 는 내용의 이야기다. 착한 척하는 악당들이 마블의 캐릭터들을 패러디 한 의상을 입고 나와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보여준다. 마블, 디즈니, DC 할 것 없이 히어로 물을 좋아하는 나도 흥미롭게 볼 만한 쇼이다.


민익씨는 우리가 함께 볼 만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찾아본다. 게임학과를 나온 그는 장거리 데이트 아이디어가 넘친다. 오히려 함께 있을 때보다 능동적인 것 같다.


같이 있을 함께 놀러 다닐만한 곳을 알아볼 그랬어.”


집에만 있는 걸 좋아하는 집돌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귀찮아서 안 한 거였다. (...!!!)

내가 맨날 어디라도 나가서 바람 좀 쐬자고 하면 거북이 엄마와 나무늘보 아빠 사이에 태어난 아들처럼 행동하더니,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다시 만나면 여기저기 다니면 되겠네.”


‘있을 때 잘하지 그랬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꾹 참고 그에게 말한다.


물론 다시 만나면 도로 집돌이 집순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 99%의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


쇼를 보다 보면 연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왕좌의 게임에서도, 리얼리티 룸메이트 프로그램에도, 더 보이즈에서도 사랑은 빠지지 않는다.


모든 사랑들은 모두 물리적인 거리감이 가까운가?

그렇고도 아니다.


처음에 사랑에 빠지기 위해 물리적 거리감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나가는 데는 지속적이고 물리적인 터치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성향이나 상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맞춰 갈 수 있느냐 또한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와 물리적인 거리가 생긴 이후, 우리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기에 나는 한동안 내 몸에서 어느 한 부위를 뜯어 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뜯긴 부위에서는 외로움이 흘러나와 눈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와 나의 사이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질투심과 불안함이 많고, 관계의 의존성도 높은 내가 떨어져 있는 연애에서 더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인 것 같다.


설령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장거리 연애는 나에게 사랑의 새로운 얼굴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요즘 사랑을 처음 해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추천하는 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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