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거리 남자 친구 덕질하기
화면 너머로 말고 이 남자를 다시 실제로 보고 싶다.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다.
지구는 왜 이렇게 크고 땅덩어리는 왜 이렇게 넓은 것인가?!
일평생 안 해 본 원망을 하늘에 내던진다.
서른 중반 남짓되도록 드라마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도 없고, 에쵸티나 젝스키스 중에 한 명쯤 타겟을 정해 열렬히 쫓아다닌다던 그 시절조차 딱히 그 누군가에게 흥미가 오래가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이렇다 할 이상형이 없다. 나는 관심 가는 사람이 생겨도 그쪽에서 흥미를 보여주지 않으면 금방 식어버리는 일명 '금사빠'인 것이다. 그런 내가 이렇게 남자 친구를 덕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를 보고 있으면 엄마미소가 이마 언저리에서부터 스며 나오면서 손오공이 초싸이언이 될 때처럼, 강백호가 '나는 지금'이라며 덩크슛을 넣을 때처럼 덕력이 치솟는다. 약 이 년 반 동안 민익씨를 덕질하고 고찰하며 그에 대한 근본적인 몇 가지 의문들을 적어보려 한다.
증거 1. 로보트 화법
민익씨는 가끔 로보트처럼 이야기를 한다.
"아이. 딧 낫. 세이 잇."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어.
성량과 어조가 바뀌지 않고 일정한 톤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표정도 그대로다. 결코 나를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투다. 그가 로봇 화법으로 이야기를 할 때는 만화 속에서 보던 깡통로봇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것 같다. 아니면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서 최첨단 인공지능 AI 로봇의 시험판 버전과 연애를 하는 기분이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의 말투를 고대로 따라 하며 뇌리에 새긴다. 덕력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니, 자기야. 말을 왜 그렇게 해? 완전 로보트같애. 깔깔깔"
증거 2. 웃음을 흉내 내는 남자
사실 이건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것인데, 민익씨는 어색할 때 웃으면 눈은 가만히 두고 입만 웃는다. 눈코입이 모두 다 커다란데, 눈은 그대로 말똥말똥 뜨고 입만 크고 환하게 웃는 것이 얼마나 어색해 보이는지 모른다. 꼭 카카오톡에서 기본으로 나눠주는 눈이 동그랗고 입만 커다랗게 웃는 그 이모티콘 같다. 그 이모티콘은 조커 같기도 하고 징그러워서 잘 안 쓰는데 민익씨가 그렇게 웃을 때는 너무 재밌다.
그의 가짜 웃음은 사진을 찍을 때 유난히 도드라진다. 나는 그가 가짜 웃음을 지은 사진을 보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최대치로 확대해서 스크린샷을 찍는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분석한 결과를 알려준다.
내가 덕질하는 남자 친구 민익씨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 싫어하는 건지 은근히 즐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싫어하는 편에 가까운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첫인상과 다르게 허당기에 백치미가 심해 주로 평생을 주변 사람들의 놀림감이었다. 나를 왜 이렇게 사람들이 놀릴까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직접 물어보니 반응이 재밌단다.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이해가 간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이 너무너무 재밌고 귀엽다. 분명한 것은 저만큼 초귀염둥이 로봇이 나온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다.(?)
티비를 잘 안 보는 내가 미국에 가기 직전까지 비정상회담과 수요 미식회를 즐겨 봤다. 알베르토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이탈리아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해 줬다. 미래의 남자 친구가 25% 이탈리안일 거라고 생각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지금은 알베르토보다 민익씨가 훨씬 더 잘생겨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처음에 나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내가 민익씨를 만나보기로 한 것도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서 였다. 나는 얼빠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잘생긴 남자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실 잘생김의 기준이 낮다. 내가 좋아하던 남자들을 본 친구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생긴 것은 내게 첫 번째 관문일 뿐이다. 성격의 2377389191가지 중 100가지는 맞아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민익씨는 100가지 까지는 아니어도 70가지 정도가 맞는다. 나머지 30은 얼굴이 채워주니까 괜찮다.
은근히 곱실거리는 어두운 갈색 머리도 멋지고
머리에서부터 타고 내려오는 수염도 좋다. 수염을 기르면 마초적인 매력이 피어나고, 자르면 샤프해진다.
예전에는 수염이 있으면 지저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민익씨의 수염은 거친 야생마를 연상하게 한다.
살짝 처진 듯한 시원하게 큰 눈에 커다란 쌍꺼풀이 좋고, 눈 밑에 자글자글 잡히는 주름도 귀엽다. 한편으론 같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웃을 때 쏙 들어가는 그의 보조개는 백만 불짜리 전매특허다.
나는 남자가 부끄러운 듯이 아래를 쳐다보고 웃는 모습에 반하곤 한다. 민익씨는 그 모습을 정말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보여준다. 친구들에게 민익씨를 소개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다.
"너 남친 귀엽게 생겼어. 잘생긴 프랑스 개그맨 같아."
같이 일하던 직장동료에게 민익씨 사진을 보여줬을 때도 장난기가 넘치는 소년 같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한가 보다. 내 눈에는 진지하게 잘생기기만 했는데 말이다.
민익씨는 요즘 매일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장거리 연애 프로젝트의 일환인데, 한 달에 각자 하나씩 목표를 정하고 더 많이 지키지 못한 사람이 일명 '서울 데이트 자금 통장'에 50불의 벌금을 낸다. 매일 운동하기, 명상하기, 다이어리 쓰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 고치기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했다. 다행히 그동안 내가 벌금을 낸 적은 한 번도 없다. ㅋㅋ
#1 안녕? 안녕.
아무튼 한국어 공부가 한창인 민익씨에게 전화가 온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으니 그가 답한다.
"잘 지내세요."
전화를 하자마자 끊으려는 건가?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가 웃는다.
"잘 지냈어요?"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웃는 걸 보니 진짜 끊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다.
#2 지금. 당장. 롸잇나우.
어제, 오늘, 내일, 지금, 오다, 가다 같은 간단한 단어들을 설명해줬다.
한 문장을 완성하는데도 내게 여러 번을 확인하던 그가 술술 말문을 연다.
#3 극존칭
오늘 저녁 대화의 끝에 그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너무 높은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라며 부담스러운 내색을 했지만 민익씨는 한사코 그 말을 하길 원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아... 그래서?
하... 괘씸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음엔 '건강하게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세요'도 가르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