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ser #Haslam #Varela #리베란테 #팬텀싱어즈
중학교 3학년 음악 시간, 장 3도 단 3도에 1등도 반장도 나가떨어졌다. 음악 시험 가채점 점수를 담임 선생님이 불러주시는데 90점 이상이 거의 없었다. 음악 이론 시험은 국영수에 비해 연비가 좋은 과목이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중간고사는 많은 아이들에게 충격이었다.
미술 시간, 음악 시간은 어려운 숙제도 쪽지시험도 없으니 수업 시간이라는 명분 아래 쉬어가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필기만 잘해두면 시험 볼 때 편했다. 때로 흥미로운 내용도 있었다. 교양이 높아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1년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음악 시간이었다. 장 3도 단 3도는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났지만 그보다 더한 긴장감과 공포가 1년을 장악했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음악 교사였다.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지난 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내 세대에게 학생 주임은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었고 때로 혹독한 체벌도 허용되었다. 남녀공학 합반이던 중학교 3학년 교실, 학생주임의 기준은 덩치 크고 말 안 듣고 어른 흉내 내는 골칫덩이 운동부 남자 녀석들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에 여학생들은 그저 학생다움만 유지하면 요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늘 노기를 띠고 사는 그분의 건강은 괜찮았을까 싶다. 언제나 속에 화가 많고, 얼굴은 분노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누구든 걸리기만 해 보라는 아우라를 풍기고 다녔으니, 거친 녀석들 혼내주다가 자칫 당신이 먼저 목덜미를 부여잡고 쓰러지기 좋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우리 앞에서만 그렇지 실제로는 화를 다스리는 경로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음악 교사였지 않은가. 한때는 예술에 대한 낭만과 감성으로 가득한 음대생 오빠였을 테니.
중학교 3학년의 1년을 제외한 음악 수업은 늘 좋았다. 클래식 감상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런 날이면 선생님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와서 덜컥거리며 테이프를 넣고 볼륨을 최대치로 하고 음악을 들려주셨다.
얼마 전 서울시향 연주회에 다녀왔는데 같이 갔던 후배가 말하길, A석에서만 듣다가 금관악기 파트가 지속될 때 연주자들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 보이는 앞자리에서 들으니 사운드가 완전히 다르다며 감동해 마지않았다. 그런 스케일의 음악을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스피커로 들었던 학창 시절의 음악 감상 시간이었지만 좋았다. 헨델의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가 기억난다.
듣는 순간 마음속 저 깊은 곳부터 호수가 서서히 차오르는 듯한 선율에 매료된 곡이 있다.
Air on the G String (J. S. Bach), HAUSER
https://www.youtube.com/watch?v=CvglW3KNSsQ
바이올린으로는 그동안 많이 접했으니 첼로 연주로 들어본다. 묵직하게 흐르는 선율은 어린 시절 바이올린으로 채워진 호수의 심연, 그 깊은 어딘가에 숨겨진 신비에 대한 환상을 일으킨다. 어쩌면 스테판 하우저에 대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2022년에 있었던 공연 『First EVER 'Rebel With a Cello' show』를 보면서 요즘 완전히 홀려 있다. 첼로에 홀린 건지 하우저에 홀린 건지는 모르겠는데 <Livin' La Vida Loca>를 연주하던 양반이 슈트를 입고 앉아 저러고 있으니 더 섹시하다. 하우저에게 홀린 거군.
이 아름다운 곡을 음악 하는 사람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가. 다양하게 가사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Still Life, Annie Haslam
이 곡이 실린 앨범에는 클래식에 가사를 붙인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팝의 느낌을 더했는데 요즘 우리가 듣는 크로스오버와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클래식의 근엄함이 있으면서도 현대적이다. 묘하기보다는 다소 애매하다. 보컬의 음색이 곡의 캐릭터를 많이 차지한다. <Still life>는 발라드처럼 평이하게 들리다가 간주에 울리는 높은 옥타브의 스캣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보인다. 귀족의 복장 그대로 입은 채 궁전 밖으로 양산을 쓰고 나온 잠깐의 산책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W4eC1h1sMKo
Cuore, Fernando Varela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페르난도 바렐라가 부른 <Cuore>는 내 마음속 호수에 수십 년 만에 강력한 바람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잔잔하게 고립되어 있던 호수에 감미롭고 웅장한 바람이 불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감돈다. 기승전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온전하게 흐름을 느낀다. 저 매력적인 목소리가 말하길 그대로 인해 감정이 넘치고, 사랑이 점점 커져가고, 자신의 마음은 사랑의 노예란다. 바이올린에서 G현이 혼자 다 했다면, 노래에서는 페르난도 바렐라의 목소리가 다했다. <All by myself>와 <The winner takes it all>를 부를 때의 호소력도 대단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U8oYzbl7DVQ
Cuore, 리베란테
페르난도 바렐라가 혼자 다 한 것을 이번에는 세 사람이 나눠서 했다. 넘치지도 어색하지도 않다. 부드럽고 웅장하다. 진지하고 묵직한데 싱그럽고 귀엽다. Cuore를 처음 들은 건 리베란테가 부르는 무대였다. 삼중창으로 먼저 듣고 원곡이 궁금해 찾다가 바렐라를 듣게 되었다. 혼자 해도 부족함이 없고, 셋이 나눠도 완벽하니, 명작은 어떻게 해도 훌륭하고, 바렐라와 리베란테도 멋있다.
진원의 솔로가 시작되면서 나직한 선율이 조용히 흐른다. 그러다가 정승원이 이어받으면서 저음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두 명의 테너를 지지하는 바리톤 노현우의 목소리다. 묵직한 소리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포근하게 감싸주는 목소리가 아늑하다. 그의 솔로 파트에서는 노블한 중저음을 한껏 과시하는데 하우저의 첼로만큼 깊고 원숙하다. "Sentirmi re..." 이탈리아어 악센트에 멋있음과 귀여움이 함께한다. 2000년생 막내의 든든한 매력이 한껏 느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zN7wzp1Kjg0
You, 김민석 최성훈 박현수 김바울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첼로, #G선상의 아리아, #남자 중창, 연관 키워드로 내 기억이 검색한 또 하나의 멋진 곡을 오늘의 피날레로 정했다.『팬텀싱어 올스타전』에서 나왔던 곡이다. 봄 소풍에 어울리는 따사로운 햇살과 산뜻한 바람 같은 A Great Big World의 <You>를 김민석, 최성훈, 박현수, 김바울이 불렀다. 원래부터 사중창 크로스오버 곡인 듯 조화로운데 간주에 두 곡이 함께하면서 탁월한 작품이 되었다. Good to great다.
간주에 삽입된 두 곡 중 하나가 <G선상의 아리아>다. 카운터테너 최성훈의 아름다운 솔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베이스 김바울의 목소리가 들린다. "둠, 둠, 둠, 둠..." 사람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바이올린과 첼로다. 마치 같은 곡인 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을 사중창으로 부르다가 다시 You로 돌아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Eqqmj8ok54s
고전으로 시작해 팬텀싱어로 마무리된 오늘의 여정, 화산보다 뜨겁고 관능적인 하우저와 폭풍 같은 바렐라에 못지않게 우리나라의 뮤지션들도 매력적이고 재능 있고 자랑스럽다.
행복하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득한 지구에 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