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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의 나에게

#과거의나에게 #시간여행 #다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by 은수빈

갑자기 아득하고 한숨이 쉬어지네. 2000년의 나에게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줘야 할까. 앞으로 보내야 할 2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몰려올지 상상도 못 하고 있던 그때의 나에게 미래에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기출문제도 알고, 어디서 틀렸는지도 아는데, 이제야 고사장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너에게 어떤 말을 하면 도움이 될까. 단단하게 봉인된 시험 문제가 문밖에 얼마나 가득 쌓여 있는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시간여행을 좀더 해볼까. 어렸을 때 보물섬이라는 만화책 기억나? 여러 편이 연재되는 두툼한 만화잡지였잖아. 그중에 <내일뉴스>라는 만화가 있었어. 주인공이 라디오인지 워키토키에서 내일의 뉴스를 먼저 듣게 되는 설정이었어. 남자애였던 것 같은데 그 귀한 정보로 뭘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어떤 의도로 그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을까. 미래를 예측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귀한 정보니 작품 속에서 대리 만족했을까, 아니면 미리 알아도 소용없으니 현재를 잘 살자는 철학적인 교훈을 담고 싶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너에게 이 카드가 닿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게 좋을까.


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 있긴 하다. 주식이 있었네. 이건 해석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숫자니까 알려줘도 확실하지. 그런데 빚내서 올인하라는 조언은 안 할 거야. 거품 가득한 채로 난립하는 닷컴 기업은 조심해야 해. 세 군데만 알려줄게. 월급에서 조금씩 적립식 펀드처럼 꾸준히 사라고 조언하고 싶다. 오르면 흥분해서 금세 팔고 다시 사고 하지 말고, 지금 내 나이가 될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 성장하는 회사들의 기업 가치를 공부하고, 투자자로서 보람을 느끼면 좋겠다. 중간에 몇 번 주식이 반 토막 나는 때가 올 거야. 그때 놀라지 말고 기획 상품 특가 할인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넉넉히 좀 더 사. 무서워서 못 사겠다면 그냥 있어도 돼. 대신 절대 팔지 말고,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아예 주식 계좌에 접속하지 말기다. 생각보다 일찍 회복된다.


그리고 2년 후에 로또라는 게 도입되는데 몇 달 후에 역대급 당첨금이 나오게 돼. 그런데 이건 모르는 게 낫겠다. 그때의 너라면 입단속도 안 될 거고 포커페이스도 불가능해. 400억은 너에게 행운이 아니라 불행이 될 거야. 앞으로 남은 생에 차례대로 찾아올 행운을 그렇게 한 번에 당겨쓰는 건 하지 말자. 네가 감당할 그릇이 커질수록 점점 더 많은 기회와 행운이 올 거야.


첫 직장이 평생의 커리어를 좌우하게 될 것 같지만 너는 다양한 길을 걷게 될 거야. 그리고 사회도 그렇게 바뀌어 갈 거야. 나중에는 직업이 여러 개인 사람을 N잡러라고 부르는 신조어도 나와. 너는 어디에서나 열심히 하기는 할 텐데, 단, 너의 순수한 열정을 일에만 몰입해야지 사람을 향하지는 않도록 조심해. 공부나 일은 내가 공들인 만큼 보상을 주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 순수한 것과 순진한 것은 정말 다른 개념이야. 순진함은 일찍 털어낼수록 사는데 유리해. 안 그러면 손해를 많이 보게 돼. 상사나 동료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건 너 자신의 몫도 일부 있는 것 같아. 쉽게 이용당해주고, 한 번, 두 번 봐주고 양보하면 그들은 너에게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길 거야. 거절하는 거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하면 괜찮아.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애초에 선을 긋고 그들이 너에게 많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자.


어릴 때는 경험이 없으니 진심으로 대해도 되는 좋은 사람인지, 나를 이용할 나쁜 사람인지 구분이 잘 안될 거야. 그때는 일단 친절하게 잘해주는 거야. 너무 진심을 다하지는 말고 마음속으로는 거리 두기를 해야 해. 상대방의 가면을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변함없는 너의 친절에 감동받은 좋은 사람들은 그들 역시 시간이 흘러도 너에게 늘 감사하면서 서로가 믿음이 견고한 사이가 될 거야. 그런데 너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너의 친절에 감사하는 강도가 점점 줄어들면서 언젠가부터 이용하려 들고 나중에는 당연한 듯 여기고 오히려 너에게 강요할 거야. 살아보니 나에게는 늘 매 순간마다 남다른 예감과 촉이 이었어.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좋게 좋게만 생각했던 게 후회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너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이상하다,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생기면 일단 의심해 보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확인차 지켜보고, 세 번째에 확신을 하면 돼. 기회는 세 번이면 충분해. 이를 무시하고 계속 배려해 주면 나중에는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꼭 기억하면 좋겠어.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이 찾아오게 될 거야.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어느 순간에도 너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혹시 상대방이 꽤나 대단한 사람이라도 절대 주눅 들거나 초라한 마음 느끼지 말아야 해. 연애하는 관계에서는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 이렇게 동등한 입장이야. 아니, 가능하면 칼자루는 네가 쥐는 게 좋아. 상대방에게 칼을 휘두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 너 자신을 가장 최우선에 놓아야 하는 결정의 순간들이 있을 때, 그 칼로 냉정하게 상황을 끊어야 할 때가 오거든. 사랑할 때는 푹 빠져서 마음껏 행복하고, 인연의 유효 기간이 다해갈 때는 깔끔하게 마무리하자. 이별을 잘하는 연습은 어렸을 때 많이 해두는 게 좋아. 살면서 새로운 기회와 만남이 많이 다가오듯이, 헤어지는 순간도 많이 겪게 돼. 연애 관계가 아니라도 친구, 알고 지내던 사람들, 회사 등 삶 자체가 만나고 헤어지고의 연속이야. 헤어진 후에는 후유증이 있게 마련인데, 어려서는 이별을 잘 다루지 못하더라도 감당할 게 그렇게 크지 않고, 또 금세 털고 일어날 수가 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게 참 힘들어. 어른이 된다는 거, 나이 들어간다는 거는, 마무리를 얼마나 산뜻하게 잘하느냐를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 잘 만나고, 잘 헤어지길 바라.


다른 사람도 아닌 너의 미래가 건네는 조언이니 그래도 조금은 신경써서 읽었겠지? 보내는 내용이 많아질수록 네가 기억하는 분량은 오히려 줄어들 테니, 앞의 내용 하나도 안 봤어도 이것만은 봐주라. 일단은 살아봐. 언제나 당당하고, 대충 타협하지 말고,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살면 돼. 그리고 이 한 가지는 정말 꼭 기억해야 해. 너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너 자신을 가장 사랑하자. 자존감, 자존심 모두 도도하게 높게 갖자.


내 기억에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는 참 행복했어. 몸과 마음 걱정 없이 편안했고, 따뜻한 시간이었지. 참, 베니건스가 지금은 없어. 몬테크리스토, 베스트샘플러, 컨츄리치킨샐러드, 비프퀘사디아는 필수, 그리고 외식산업이 몰라보게 성장한 23년 후에도 이를 대체할 디저트는 없으니 브라우니버텀파이를 마음껏 즐겨줘. 메리 크리스마스 ♡


2023년의 은수빈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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