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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Oct 13. 2023

책장을 비우면 영혼이 채워진다.

수집과 강박에서 벗어나다.

이사할 때마다 책이 여러 박스로 한가득이었다. 문헌정보학에 근거한 서가 정리보다 더 엄격한 나만의 정리 기준을 맞추자면 상당히 고된 작업인데 두서없이 꽂힌 채 흐트러진 모습에 내내 불편할 생각을 하면 미리 몸 고생을 하는 게 낫다 싶어 적지 않은 수고와 노력을 들였다. 책은 점점 늘어나고 그럴 때마다 책장을 새로 살 수 없어 고민이었는데 TV에 나온 정리의 여왕이 알려준 신박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넘치게 되어 빈 공간마다 쑤셔 넣으면서 책장은 빈틈없이 들어차고 강박으로 정리한 분류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내 영혼에 맑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주던 산소 같던 책들이었는데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게 되었다.


정리를 시작했다. 한 번 읽고 방치한 채 앞으로도 다시 볼일 없을 책을 가장 먼저 선별했다. 세상이 바뀌며 낡아진 기술과 지식도 골라냈다. 덜어낼 때마다 마음이 개운해졌다. 대대적인 구조조정 끝에 책장은 몇 단이 비면서 액자와 머그컵을 얹어둘 공간이 생길 만큼 여유로워졌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색이 바래도 맑고 고운 법정 스님 책, 탈무드, 명상록처럼 변함없는 지혜를 주는 책, 지식 혁명이 몇 차례 찾아와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바뀌지 않을 이론에 대한 책,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 받은 책이 살아남았다. 


아름다운 가게에 문의했더니 그 정도 분량이면 방문해서 수거해 간단다. 첫 만남의 설렘과 유용했던 지식, 그리고 진하게 주었던 감동을 떠올리며 책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다른 필요한 사람에게 잘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주었다.


전자출판물이 많아지고 대부분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새 책을 후루룩 넘길 때 스치는 떡 제본 풀냄새의 두근거리는 유혹은 여전히 반갑다. 대신 신중해졌다. 보고 싶은 책들은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마음껏 담는다. 그리고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직접 확인하며 마케팅에 홀린 책들은 삭제하고, 가벼운 책들은 그 자리에서 속독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천천히 봐야 하는 책만 신중하게 산다. 


그렇게 했는데도 액자를 비켜줘야 하는 상황이 되어 습관을 다시 바꿨다. 책장에서 수용 가능한 이상은 사지 않기로 했다. 새 책을 사고 싶으면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을 반드시 정리하고 산다. 중고서점에 팔거나 아름다운 가게로 가거나 친한 이들에게 나눈다. 줄 긋고 메모하며 읽는 습관도 고쳤다. 중고로 팔 때 최상 등급을 받아 좋은 값을 받아야 하니 조심조심 본다. 언제든 찾아볼 수 없으니 사진을 찍거나 워드 파일에 정리하거나 수기로 메모한다. 때로는 이것도 번거로워 최대한 머리로 외우고 마음에 이해하려 애쓰니 집중력이 높아진다. 집은 서점이 아니니 책이 있어야 할 곳은 책장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책을 덜어내면서 마음은 더 풍부해졌다.


다음 목표는 책장을 하나만 남기고 버리는 것이다. 그중의 반은 액자와 작은 화분, 예쁜 머그컵 한두 개로 장식할 것이다. 한 번 읽은 책은 별도의 기록 없이 바로 보내줘도 될 만큼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메모리가 페타급, 엑사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책장을 가득 채우던 수집과 강박이 다시 고개를 들려한다. 다시 절제가 필요한 순간이다. 지식을 쌓으려 하기보다는 그 뜻을 마음에 담아 은은하고 향기로운 지혜로 품게 된다면 진리로 가득한 무한한 우주의 공간을 내 영혼의 저장소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 아르헨의 엘아테네오 서점 /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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