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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Mar 13. 2024

잔디 향이 나는 와인, 잔디가 자라는 소리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초원의 빛 #와인 #잔디

서늘한 기후에서 자라면 사과, 배와 같은 녹색 과일, 그리고 감귤류 중에서도 레몬의 풍미가 난다. 때로 오이 향이 나기도 한다.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면 레몬, 자몽, 그리고 핵과류 중에서도 복숭아, 그중에서도 백도의 향이 나고, 열대 과일 중에서는 멜론 향이 난다. 더운 기후에서 자라면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무화과와 같은 열대 과일의 풍미가 강해지고 역시 복숭아 향이 나는데 이번에는 황도다.


샤르도네, 기후에 따라 이토록 다양한 풍미를 가진 이 포도 품종은 숙성 과정에서 버터, 크림 같은 낙농제품의 향이 나게 되고, 죽은 효모 세포를 만나면 빵의 구수한 풍미를 갖게 된다. 오크와 접촉하면 토스트, 바닐라, 코코넛 향을 품은 근사한 와인으로 완성된다. 


어쩌다 와인을 배웠다. 학원에 다니면서 소믈리에 자격증을 제대로 공부했다. '레벨 1'은 100점을 맞았다. 와인에 대한 자신의 앎을 널리 전파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들은 풍월로 80점은 가능하다. 다음 중 로제 와인의 재료로 주로 쓰이는 품종을 고르라고 했을 때 남자친구가 100일 기념으로 레스토랑에서 주문했던 진판델이 떠오르면 충분히 맞출 수 있다. 와인에 입문할 때 주로 까베르네 쇼비뇽과 메를로, 샤르도네로 시작하니 진판델을 몰라도 4지 선다에서 충분히 고를 수 있다. 그러다가 '레벨 2'로 올라가면 깊이가 달라진다.  진판델은 말린 블랙 베리 향에 감초의 달콤한 풍미를 가진 풀바디 레드와인이 된다. 


테이스팅 노트를 적을 때 색상, 산도, 당도를 단계별로 나누어 감별하는 것까지는 몇 번 하고 나니 기준이 생기면서 금방 적응했는데, 후각과 미각으로 감지되는 풍미를 적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때 유행하던 <신의 물방울>에서 들어본 듯한 '말의 땀 냄새', '부엽토 냄새'는 작품을 위해 동원한 비유려니 했는데 실제 다양하고 재밌는 풍미의 묘사들이 등장했다. 과일 향은 색상과 지역, 건조 여부에 따라 섬세하게 나뉘고, 유제품과 향신료에서도 표현을 가져온다. 서늘한 기후에서 자란 피노 누아는 젖은 나뭇잎, 사냥 고기 향이 난다. 메를로가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면 개잎갈나무, 담배, 훈연의 풍미를 갖게 된다. 


와인을 시음한 후 수강생들이 이런저런 향이 난다고 말하면 강사가 향을 정리해 주고 더불어 어떤 향도 난다고 보충하는 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는데 수강생들의 감각치와 표현은 아무래도 한정적이라 강사가 말해주는 것 이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소아베를 시음했는데 누군가가 신문지 향이 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강사도 킁킁거리며 동의하더니 이어서 말하길, 코르크가 상하면 젖은 신문지 냄새가 날 수 있으니 의심해 봐야 한단다. 맛있거나 비싼 와인을 시음할 때는 꿀꺽 넘기곤 했는데 이번에는 굴리다가 스핏하기 잘했다며 안도했다. 


한번은 와인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는 왕초보 수강생이 '방금 깎은 신선한 잔디 냄새'가 난다 했다. 강사는 매우 놀랐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 느낄 수 있는 향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는 전직 테니스 선수였다. 아무리 이론으로 무장해도 경험을 능가할 수는 없다. 파마약 냄새가 난다고 고집을 부리며 강사와 오랜 시간 대치하며 수업 시간을 낭비하던 수강생도 기억난다. 가죽 뉘앙스나 석유 냄새로 느꼈으면 좋으련만.


'레벨 2'까지 90점 이상의 훌륭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고 '레벨 3'을 준비하려던 즈음 ('레벨 3'을 취득하면 소믈리에로 취직할 수 있다) 건강 문제로 공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위해 많은 와인을 경험해야 하는데 시험 핑계로 맛있고 다양한 와인을 실컷 즐기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굴리다가 스핏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벨 2'까지도 큰 의미가 있음을 느낀 것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을 때다. 와인 리스트를 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까막눈이 문맹을 벗어난 신세계였다. 와인 타이틀과 잔글씨로 쓰인 설명만 봐도 맛과 향이 느껴져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와인 풍미에 정의된 다양한 표현들 가운데 내가 가진 감각으로는 약간의 과일, 유제품, 견과류, 정향까지 느낄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이다. 남은 평생을 프루테리언으로 살아도 좋을 만큼 과일과 견과류를 즐기고, 파리바게트 '그대로 토스트'를 구우면 고소한 버터 향에 행복해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만나는 스타벅스 토피넛 라떼에서는 정향을 느낀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다양한 향들을 베웠어도 결국은 내 경험치 안에서 익숙한 향을 가져왔다. 쉬운 과일 향보다 느끼기 훨씬 어렵지만 전직 테니스 선수가 자신에게 친근하고 익숙했던 잔디 향을 먼저 찾은 것처럼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L-_DiZlrUI

Splendor in the Grass - Pink Martini ft. Storm Large | Live from Washington 2011



박웅현 씨가 쓴 <책은 도끼다>에 보면 저자가 단단히 꽂혀서 한동안 무한 반복한 노래를 추천하는데 '핑크 마티니'가 부른 '초원의 빛'이라는 곡이다. 노래를 듣다 보면 "우리 머리를 잔디 위에 쉬게 하면서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을래?"라는 부분이 지나고 간주로 넘어가면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흐른다. 'All by myself'나 '좋은 날'처럼 부드럽게 흐르면서 어우러지는 연출에 비해 다소 난데없다 싶다가도 자연스럽다. 저자의 말처럼 잔디가 자라는 소리와 그 속도의 느낌이 잘 맞아서 그런 걸까. '잔디가 자라는 소리'라니, 식물이 자라면서 사운드를 출력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그런데 인간의 가청 영역을 넘어선 그 개념을 이토록 웅장하고 가슴 벅찬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져오다니 더욱 놀랍다.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어떤 경험을 가졌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배경이 궁금해진다. 


박웅현, <책은 도끼다> 중에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찾아보다가 키신과 조성진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화면을 보는데 이어폰은 손에 든 채 화면만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는 건 두 눈인데 귀에 어떤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청각에 감지된 그것은, 혹시 잔디가 자라는 소리였을까. 그렇다면 핑크 마티니와 박웅현 작가님, give me a high five!



https://www.youtube.com/watch?v=YXL0dkG-Qro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 조성진, 정명훈



https://www.youtube.com/watch?v=sGJfHwSe7Sg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 키신,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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