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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Mar 06. 2024

라흐마니노프와 카페 마끼아또

#좋은 날 #포르테 디 콰트로 #손태진

헤이즐넛, 블루마운틴, 파르페, 논알코올 피나콜라다와 골드메달리스트...


지난 세기말, 그러니까 카페에 가면 테이블마다 전화기와 재떨이가 있던 시절에 즐기던 메뉴들이다. 딸기크림치즈타르트, 생크림 가득한 시폰 케이크, 얇디얇은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겹친 크레이프 케이크가 커피보다 비싸던 카페에 가면 카푸치노와 비엔나커피를 마셨다.  


그러다가 별다방, 콩다방이 들어오면서 메뉴판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 '카페'로 시작하는 메뉴판 속 낯선 이름들을 순서대로 몇 가지 시도해 보다가 한동안 정착했던 것은 진한 코코아 가루에 커피 맛은 묻혀 버린 채 생크림을 듬뿍 얹은 카페 모카였다. 어린 입맛에는 최고였다. 


나이가 들면서는 언젠가부터 연중 '따뜻한 카페 라떼'에 정착했고, 뜨거운 한여름 속 무더위에만 가끔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신다. 아이스 카페 라떼에 카라멜 시럽과 생크림을 추가한 맛인데 '아이스 카라멜 카페 라떼'가 아니라 왜 마끼아또라고 하는지는 크게 궁금한 적이 없다. 샷이 더 들어갔는지 좀 진한 느낌은 있었다. 커피 추출하는 방법이 다른 건가 하며 그저 투명한 아이스컵 밑바닥에 가라앉은 카러멜 시럽을 부지런히 저으며 달콤하고 시원하게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 가사에 나오는 fàcile가 [파실레]가 맞는지 [파칠레]가 맞는지에서 출발한 호기심에 기초 이탈리아어 교재를 사게 되었다. 모음에 따라 자음의 발음이 다양해지는 상황에 언제 발음 편을 다 마치고 '본 조르노'로 들어가나 슬슬 열정이 식어가던 그때, 교재를 뒤적이다가 '쉬어가는 페이지' 같은 코너에서 정말 머리를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이탈리아어로 커피 이름에 대한 설명이었다.


커피를 이탈리아어로는 caffè(카페)라고 한다. 소주잔 크기의 잔에 진한 커피 원액을 담은 espresso(에스프레소)는 커피 픽업 데스크에서 기다리면서 수없이 봤다. 다만 그 원액에 설탕을 듬뿍 넣어 원샷한다는 현지들의 시도는 굳이 안 해봤다. 재밌는 건 지금부터다. caffè macchiato(카페 마끼아또)가 무엇인가 하니, macchiato는 '얼룩지게 하다'는 뜻의 동사 macchiare에서 왔다. 카페 에스프레소의 맛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여기에 따뜻한 우유를 넣어 마셨는데 이때 커피에 우유 얼룩이 생기는 것을 보고 '우유에 얼룩진 커피'라 부르게 된 것이다. latte macchiato(라떼 마끼아또)는 우유만 마시기 허전할 때 카페 에스프레소를 섞어서 마시는 건데 이때는 '커피에 얼룩진 우유'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한여름에 즐기는 아이스 음료는 '카라멜에 얼룩진 커피'가 되는 거다. 마끼아또라는 단어를 1999년에 처음 접한 후 22년 만에 풀린 답이었다. 이렇게 재밌는 표현을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니 아쉬웠다. 


카페 표현들이 나온 김에 하나 더, affogato al caffè(아포카또 카페)는 우리나라 카페 메뉴판에는 단순하게 '아포가토'라고 쓰인 경우가 많은데, affogato의 원형은 affogare로 '익사시키다'는 뜻이다. 진한 카페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이 익사한 것이다. 이 재치고 귀여운 표현을 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커피에 붙여 쓰는 이탈리아라는 나라, 안드레아 보첼리 보유국답게 역시 매력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 반드시 여행하리라는 바람이 한 겹 더 얹어졌다.


카페 라떼는 우유의 양이 훨씬 많으니 여기에 커피가 얼룩진 라떼 마끼아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얼룩진다고 하면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 듯싶다. 과거는 슬픔으로 얼룩지고, 옷에 묻은 얼룩은 빠지지 않는 골칫거리다. 그러나 커피와 우유는 서로를 얼룩지게 하면서 더 풍부한 맛을 낸다. 진한 에스프레소는 부드러워지고, 아이들이 마시는 우유는 어른이 즐기는 매력적인 음료가 된다. 내가 즐겨 마시는 카페 라떼는 얼룩의 단계를 넘어서 뜨거운 우유 거품으로 에스프레소를 거의 삼켜버리지만 그래도 우유의 고소한 맛으 은은하게 채워진 그 커피가 나는 참 좋다. 바리스타의 손맛을 상당히 탄다는 게 문제다. 에스프레소 샷과 우유의 비율, 그리고 우유를 스팀 시키면서 거품의 정도를 조절하는 재주는 상당히 섬세한 작업인가 보다. 내 입맛에 최적인 카페 라떼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정말 최고다.  


음악을 듣다가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9cLZSkkjPA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E단조 Op. 27 3악장


귀에 익숙한 라흐마니노프의 고향곡이 흘러나오다가 남자들의 사중창이 이어졌다. '포르테 디 콰트로'가 부른 <좋은 날>이었다. 이 아름다운 교향곡을 어떤 우유에 비유해야 할지 고민이 되지만, 세상에서 가장 신선하고 부드럽고 건강한 우유라서 그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은 채 맑고 순수한 상태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신의 음료이기에 아무 거나 섞어서는 결코 안 될 것 같은데, '포디콰' 사람의 목소리가 마치 고급스럽고 훌륭한 원두로 추출한 에스프레소 원액이 되어 얼룩지게 만든 매력적인 마끼아또였다. 일 디보, 일 볼로, 알렉산드로 사피나가 불러도 좋은 곡이 나왔겠지만 우리나라 크로스오버 그룹의 시도라서 더 애정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XSBhPeoII

좋은 날, 포르테 디 콰트로, 열린음악회 (2020)


'포르테 디 콰트로'는 몰라도 그룹에서 베이스 바리톤을 담당하는 손태진을 아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시즌1에서 두 번이나 1등을 하다니 그의 사주에 명예운이 단단히 있는가 싶을 만큼 운도 따랐겠지만 실력도 인성도 좋은 그가 얼마 전 김재중과 함께 유튜브 채널에 나와했던 이야기가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가수가 되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하게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가 성인 가요이기에 트로트에 도전을 했다고 한다. 이전에도 그가 재즈나 올드팝을 즐겨 부르는 모습에서 음악에 대해 다양하게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트로트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의 큰 그림에 있어 하나의 시도였던 것이다. 세상의 다양한 음악에 '마끼아또'되며,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겹쳐진, 그리고 '아포카토'처럼 깊이 있고 진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그의 음악이라면 얼마든지 익사해도 행복할 훌륭한 보컬리스트가 되길 응원한다.  


깊은 밤인데 커피가 마시고 싶다. 인스턴트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라도 만들어야겠다. 하지만 충분하다. 신선한 카페 에스프레소와 프로 바리스타가 만든 스팀 우유의 부족함은 음악이 채워줄 테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kFi1qS_4K1w

Come Fly With Me, 손태진, 열린음악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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