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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Jan 03. 2024

두려움 없이, 그와 함께 왈츠를

#쇼스타코비치 #왈츠2번 #Come Waltz with Me

https://www.youtube.com/watch?v=0EOth967JIQ

Shostakovich, Suite for Variety Orchestra, Waltz No. 2


어디선가 들어본 낯익은 멜로디이긴 한데 완곡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 분 안에 압축된 완벽한 서사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쿵짝짝 거리는 리듬은 왈츠풍이고 곡의 제목도 왈츠다. 그런데 궁전에서 공주님과 왕자님이 로맨틱하게 나누는 왈츠의 느낌이 아니다. 이 음악이 흐르는 동안 무도회 뒤편에서는 엄청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서곡 같다. 비장하다가 밝다가 애처로움과 우수가 반복되는 밀당에 나는 완전히 홀렸다. 이 왈츠의 밀당은 달콤함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너무도 끌린다. 멜로디에 집중할수록 심장이 조여드는 건, 두려움 때문이다. 무언가 상상하지 못한 미지의 것,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에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 두려운데 내게 손짓하며 밀당을 한다. 그렇다면 뒤로 한발 물러서거나 도망가야 하는데, 쿵짝짝 리듬이 반복될수록 호기심이 든다. 곡이 끝나고 다시 듣기를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점점 더 끌린다. 


Shostakovich, Suite for Variety Orchestra, Waltz No. 2


이 모음곡에는 쇼스타코비치가 1955년, 소련 영화 <The First Echelon>에 사용했던 멜로디가 들어있다. 왈츠인데 낭만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전까지 스탈린 체제하에서 살던 국민들의 정서와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1,2차 대전과 스탈린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그동안 마음에 쌓인 슬픔을 왈츠에 담아내면서 그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멜로디만으로도 충분히 사로잡혔는데 여기에 가사까지 얹어서 본격적으로 내게 손을 내미는 곡을 듣게 되었다. 




연말을 정리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좋은 날도 많았지만 후회되고 아쉬운 순간들이 많아 새해가 밝았는데도 아직 못 버리고 있는 나에게 성큼 다가와 함께 가자고 한다. 삶이 너무 좋다고 한다. 솔깃한 제안이다. 거절하지 않고 망설이는 내게 이제는 함께 춤을 추자고 한다. 제대로 된 선물을 준다고 한다. 살만한 인생을 보여준다며 기회를 잡으란다. 



Come Waltz with Me (Demis Roussos)


Come walk with me and let go of the way you are going.

Come talk to me and I'll tell you what's really worth knowing.

Life's much too good, my friend. 

Don't let it end.


Come dance with me and I'll give you a gift worth giving.

Take a chance with me and I'll show you a life that's worth living.

Life's much too good, my friend.

Don't let it end.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비장하다. 그의 손을 잡고 제안을 받아들이려면 어지간한 각오로는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손을 잡고 따라간다면 지나간 일은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율만으로도 느껴졌던 감정, 그리고 노래를 통해 주는 확신이 쇼스타코비치의 메시지인듯 싶다. 공포의 스탈린 시대에 고통받았던 국민에게 지나간 시간은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슬픈 음악이라도 왈츠의 리듬이라면 우리는 춤을 출 수 있다. 필요한 건 무대에 나갈 용기와 에너지다. 


가장 무서운 감정은 불편한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두운 세상이 끝났지만 밝은 세상을 바로 받아들이고 적응하기에 이미 몸과 마음이 이전의 것들에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어 선뜻 새로운 희망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는 것은 비단 역사의 챕터가 바뀌는 거대한 순간이 아닐지라도 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 




타로카드에는 이와 같은 상황을 나타내는 그림들이 있다.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는 여자는 두 눈을 가린 채 두 개의 칼을 들고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 눈을 가리고 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가운데 여자는 손이 뒤로 묶여 있지만 줄이 느슨해서 얼마든지 풀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두 눈이 가려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고 있다. 오른쪽 남자는 두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고 있다.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세 카드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을 공격하고 위협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두려움과 고통에 갇혀 그대로 굳어가는 것만큼 아까운 일이 또 있을까. 가려진 두 눈을 풀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은 스스로 만들어서 가둔 허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무겁게 양손에 들었던 칼을 내려놓고 내 손으로 눈가리개를 풀 것이다. 누군가 다가와 눈가리개를 걷어준다고 하면 바로 그렇게 하고 스스로를 옭아매던 느슨한 밧줄을 풀어버릴 것이다. 두 손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침대에서 나와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위험하지 않다. 막상 직접 부딪치고 겪어보면 해볼 만하다 싶어질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로 현재마저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모두 털어내고 산뜻한 발걸음으로 무도회장에 갈 것이다. 쿵짝짝 쿵짝짝 음악이 시작되면 나에게 건네는 운명의 손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멋진 춤을 출 것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추지 않은 멋진 춤을, 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vHikE6vido

Demis Roussos, Come Waltz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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