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빈 Feb 08. 2024

비가 내리면 노란 우비에 탭댄스를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썸남

2003년, 요즘 말로 하면 썸남이 뮤지컬 초대권이 생겼다며 함께 가잔다. 그 무엇을 하든 ‘누구와’가 중요한 지금의 에피쿠로스적인 마인드가 많지 않던 어린 시절에는 ‘무엇을’이 결정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아주 좋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누구와’ 함께는 ‘무엇을’에 따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공연 광고를 찾아보니 실제 브로드웨이의 무대 세트를 그대로 들여왔다는 화려한 의상과 장치, 무엇보다도 빗속에서 춤추는 장면을 실감나게 구현하기 위해 1톤의 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스케일에 엄청난 기대를 품고 함께 가겠노라고 말했다. 초여름 저녁, 퇴근 후 시청 근처의 극장으로 갔고,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무대 위로 비가 내리면서 배우들이 노란 우비에 우산을 들고 탭댄스를 추던 장면이 어렴풋하다.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은 그렇게 비와 함께 추억이 되었다.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 (2003)


거의 20여 년 만에 이 사연이 소환된 것은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들으면서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이 곡을 들으면서 노란 우비에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 자연스러운 매칭을 그냥 지나칠 뻔했으나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이 두 조각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곰곰이 되새겨 보니 노래 제목에 ‘비’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전혀 다른 곡과 장면을 섞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님 은혜>를 부르다가 <스승의 은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처럼 이 두 작품과 각각의 노래는 머리와 꼬리를 한 몸으로 내 머릿속 같은 저장소에 머물고 있었나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VyA2f6hGW4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 -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OST인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나오는 장면은 비와는 상관이 없다. 두 남녀가 자전거를 타는 꽁냥꽁냥한 장면에서 흐르는데 날씨는 계속 화창하다. 이 영화는 작품 전체를 다 본 적도 없고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왔다는 것 이외에는 줄거리도 잘 모른다.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도 스토리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두 작품 모두 원작에 대한 기억과 감동은 없다. 그렇다고 제목과 장면을 마음대로 조작해서 저장하고 있었다니 내 기억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건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할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Rs5NeTvzro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Boston Pops Orchestra, Arthur Fiedler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정말 비가 내리는 느낌이 든다. 싱그럽고 산뜻한 음악을 듣다 보면 나도 화사한 우비를 입고 예쁜 빗방울 따라 경쾌하게 걷고 싶다. 건조한 시골길에서 먼지 날리며 자전거 타는 장면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곡을 몇 번 반복해서 듣는 내내 무대 위로 비가 쏟아지며 배우들이 탭댄스를 추던 장면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꼭 <싱잉 인 더 레인>에 맞춰서만 우비 입고 춤추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누구와’보다 ‘무엇을’이 더 중요했던 그 당시, 뮤지컬을 함께 봤던 썸남에 대한 기억은 조작 없이 생생하다. 온 마음 열고 따뜻하게 잘 챙겨주던 그에게 괜스레 튕기던 어린 자존심이었을 뿐 어쩌면 나는 그때도 ‘무엇을’보다는 ‘누구와’를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대체로 밝았지만 종종 우울해지던 내게 늘 긍정적인 생각과 웃는 얼굴로 힘을 주던 그의 응원이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의 가사와 겹친다. 


“It won't be long 'till happiness steps up to greet me.” 

이전 02화 우아하고 아름답게 슬픔을 외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