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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Aug 02. 2024

지휘자는 악보를 다 외울까?

# 발표, 외우느냐 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행사가 있을 때 전문 사회자를 외부에서 섭외하듯이 다른 회사의 프리젠터로 일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중 한 회사가 떠오릅니다. 열심히 일 잘하는 회사였어요. 특히 사장님의 영업력이 상당히 좋았어요.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만큼 일하는 회사는 시장에 많았고 후발 업체의 진입 장벽도 높지 않기에 사장님의 로비 실력이 회사의 중요한 강점 중 하나였다고 해두죠. 덕분에 주요 거래선과 공고한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는데 보는 눈도 많고 공정성 문제에 감사도 신경이 쓰이니 거래처들이 하나둘씩 경쟁 입찰로 업체 선정 방식을 바꾸게 됩니다. 공정 입찰의 가면을 쓴 수의 계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신은 유리한 입장이라고 사장은 생각했어요.


발표, 승부수가 되다


해당 사업의 담당 PM이던 팀장이 자연스럽게 발표자가 되었습니다. 사업 제안서는 늘 팀장이 만들었고, 실무 경험도 많고, 늘 하는 일에, 계속 일하던 거래처니까 특별히 어려울 게 없어 보였죠. 발표용으로 제안서를 다듬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었고 다만 일해야 하는 시간에 입찰에 다녀와야 하는 '번거로움'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업체에 할당된 시간은 총 30분으로 20분의 발표는 팀장이, 10분의 질의응답은 사장이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거래처로 향했습니다. 사장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고, 팀장도 몇 번 와본 곳이라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 오전에 3개 조, 점심시간 이후 오후에 2개 조가 편성되었는데 이 회사는 오전의 마지막인 세 번째 순서였습니다. 


"이팀장, 연습 좀 했나?"

"연습이요? 무슨 연습이요?"

"발표하는 거 말이야."

"그거 다 아는 거니까 그냥 말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팀장의 너무도 긴장하지 않는 태도에 사장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조의 발표가 한창인 회의실은 가끔 웃는 소리도 들리면서 분위기가 좋습니다.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사장이 혼잣말인 듯 팀장에게 말합니다.


"분위기가 심각하고 그런 건 아닌가 보네. 하긴 어차피 (우리로) 다 정해진 건데 힘 뺄 거 뭐 있나. 심사하는 척 흉내만 내는 거지."


회의실로 들어가니 임원 두 명과 실무자 네 명이 앉아 있습니다. 사장과는 모두 구면인데 오늘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고 낯설게 보입니다. 사장은 따로 마련된 의자에 앉고 팀장은 스크린 앞에 자리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다 된 밥에 내 손으로 재 뿌리기


팀장은 굽신거리며 몇 번 인사를 하더니 발표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회사, 담당 부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데 버벅거리면서 몇 번을 틀립니다.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은 표정입니다. 사장이 무성음으로 다급하게 외칩니다. "이팀장! 이팀장! 뭐하고 있어!?"


팀장은 정신을 수습하고 스크린을 봅니다. 첫 장에 큼지막하게 쓰인 이번 사업 과제명을 읽으면서 세 번을 틀렸습니다. 다음 슬라이드는 목차입니다. 팀장은 아예 심사위원을 등지고 스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목차를 읽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내용보다 "어, 저기, 죄송합니다"를 더 많이 말합니다. 3분이 지났습니다. 다음으로 해당 사업의 개요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역시나 버벅거리며 진도를 나가지 못하니 답답함을 참지 못하던 실무자가 말합니다. 


"그건 다 아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시고 본론부터 하세요."


당황한 팀장은 슬라이드 넘기는데도 한참 걸립니다. 그렇게 겨우 찾은 <시장 현황>을 말하려는 순간 실무진이 또 말합니다. "그것도 우리 다 아는 내용이니까 넘어가세요. OOO 회사가 어떻게 할지 본론을 말하세요, 본론을."


급하게 슬라이드를 넘기는데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멈춥니다. 무선 프리젠터를 하도 눌러대다 보니 노트북마저 과부하에 걸렸습니다. 노트북을 다시 부팅하고 파일을 열고 발표하던 곳까지 찾아서 다시 왔을 때 시간은 이미 10분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이미 영혼이 가출한 팀장은 계속 심사위원을 등진 채 스크린을 바라보며 우리 회사의 경쟁력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며 버벅대고 있습니다. 이미 눈으로 내용을 모두 읽은 심사위원들은 팀장이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리는 분위기입니다. 이내 최후통첩이 떨어집니다.


"이번 업체는 준비를 전혀 안 한 것 같네요. 남은 시간 동안 더 할 게 없을 것 같으니 발표는 여기서 그만합시다. 제안서 보고 평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심사는 공정했다


그렇게 쫓겨나다시피 한 덕분에 거래처는 새로운 회사에 일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그동안 쌓은 정과 의리와 영업 비용이 아쉬워 사장은 가장 친하던 실무자를 찾아가 하소연을 합니다. 


"사장님, 아무리 점수를 주려 해도 어지간해야죠. 정상적으로 발표를 마치기만 했어도 다른 걸로 어필할 수 있는데, 아니 말을 못 하는데 무슨 내용으로 심사를 합니까..."


업계에서 '공정한 경쟁 입찰' 바람이 불면서 사장의 영업력보다 발표가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입찰 발표 트라우마가 워낙 컸던 나머지 팀장은 또 발표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사직서를 내겠다 하고 다른 직원들도 모두 도망갑니다. 사장이 지목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돌아가면서 직원들이 발표를 했지만 결과는 늘 참패였습니다. 기존 거래처들을 그렇게 하나둘씩 잃어갈 무렵, 참다못한 사장이 결심했습니다. 


"그래, 그까짓 발표, 내가 한다!"


그러나 평소에 말을 잘하는 것과 공식적인 무대에서 발표를 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 오히려 사장의 버벅거리는 발표는 회사 체면만 더 깎는 일이 되었습니다. 


기존 거래처를 놓치게 되었지만 대신 지금까지 뚫지 못해 아쉬웠던 더 큰 거래처에 들어갈 기회도 생겼습니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발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으니 외부에서 전문가를 부르자는 얘기가 나왔고 그렇게 하여 저와 인연이 된 사연입니다.


회의부터 발표 내용 기획과 편집까지 참여하면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드디어 입찰의 그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 발표인데 오전에 회사에 먼저 가서 시범적으로 리허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회의실에 빼곡하게 자리한 직원들이 실제 심사위원보다 부담스러웠습니다. 돈을 주고 사람을 불렀으니 얼마나 잘하는지 한 번 두고 보자는 시선도 있었고, 궁금하게 여기며 구경 온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앞 쪽에 삐딱하게 앉은 사람이 삐딱한 표정으로 저에게 말하더군요. 


"다 외워서 하는 거죠?"


저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외우지 않았거든요. 아니 못 외웠죠. 내용이 계속 바뀌면서 최종본을 어젯밤 자정에야 받았는데 어떻게 외웁니까. 발표를 마친 저는 직원들에게 환호와 박수를 받았고, 마치 이미 입찰에 성공한 사장의 기쁜 표정은 현실이 되어 기존에 잃었던 거래처들보다 높은 금액의 사업비로 새로운 거래처의 계약에 성공합니다.


저는 사업 내용도 생소했고 외우지도 않았지만, 업무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느냐면서 좋은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프리젠터는 발표의 내용을 숙지해야 하는 게 기본이지만 여건 상 외우지 못하고 시간은 촉박할 때 어떻게 하면 전문가처럼 보일 수 있는지, 혹은 실력은 전문가인데 발표 스킬이 부족해서 그만큼 전달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다음 시간부터 소개해 드리려 해요. 


문득 글을 쓰다가 궁금해졌습니다. 20분 동안 발표하는 프리젠터도 내용을 외워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그렇다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악보를 외울까요?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워지기도 하겠지만 100명 가까운 단원들의 포지션과 역할이 다르고 구간마다 곡의 해석과 뉘앙스로 가득한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궁금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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