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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Aug 03. 2024

목소리로 그리는 그림

# 전문성과 진정성을 전하고 싶다면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낭독 봉사를 하다 보면 다양한 책들을 읽게 됩니다. 에세이가 가장 읽기에 좋아요. 소설은 직접 화법이 큰 숙제예요. 목소리 연기하는 게 영 어색하고 힘들거든요. 500페이지 분량에 다섯 살짜리 꼬마부터 90세를 넘긴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남녀노소가 등장하는 소설을 녹음한 적이 있는데 성우도 아닌 제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하고 푹 빠져서 열심히 했던 적이 있어요. 슬픈 대사는 눈물까지 흘리며 몰입했었죠. 그 파일을 듣는 분들께는 늘 죄송한 마음이 커요. 


그림을 말로만 설명해야 한다면


가장 어려운 녹음으로 기억되는 책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내용이 적었어요. 전체 녹음 분량이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적었죠. 여행 서적인 <뚜르드몽드>였습니다. 책을 펼치면 세계 곳곳 아름다운 여행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죠. 그리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작은 글씨로 나와 있는데 그 부분을 녹음하는 거였어요. 비슷한 맥락으로 서양화에 대한 책도 있었죠. 아름다운 풍경과 그림을 즐길 권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했습니다. 


파란색은 '파랗게' 읽고, 넓은 곳은 '넓게' 읽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읽는다


그저 인쇄된 종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어디가 하늘인지 바다인지 경계를 모를 만큼 조화로운 푸른빛에 풍덩 빠져들고 싶었어요. 노을로 물든 하늘의 붉은빛은 황홀했습니다. 그 느낌을 최대한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조도 하고 목소리 톤도 바꾸고 작게 속삭이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던 중, 눈을 감고 녹음을 듣는데 사진과 비슷한 그림이 펼쳐지는 순간이 왔어요. 파란색은 '파랗게' 읽고, 넓은 곳은 '넓게' 읽고, 아름다운 곳은 '아름답게' 읽는 거였어요. 시각적인 정보가 가진 에너지와 기운을 최대한 마음속 진심에 담아서 읽으면 청각적인 정보로 변환이 되면서 느낌이 비슷하게 전달됐어요. 


목소리로 그림을 그리다


그렇게 매월 새로운 <뚜르드몽드>를 받을 때마다 목소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에세이나 교재를 녹음할 때처럼 감정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또박또박 읽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고, 다른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기법'을 다른 스피치에도 조금씩 적용해 봤어요. 일반 도서를 녹음할 때, 강의할 때, 프레젠테이션 할 때, 사회 볼 때 했더니 좋은 피드백을 받게 되었어요. 프레젠테이션이나 사회는 제 입장에서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여러 번 해왔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전문성이 있다, 강의나 강연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목소리에는 표정이 있어요


그림 그리듯이 읽는다는 게 생소할 수 있는데요, 성우처럼 연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마음에 담아서 읽어주세요. 사람의 목소리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기운이,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기운이 나온다는 건 살면서 많이 느끼셨을 거예요. 목소리에는 표정이 있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웃는 표정으로 읽을 때와 인상 쓴 얼굴로 읽을 때의 느낌이 달라요. 곁에서 듣는 사람은 바로 알고, 녹음해서 들어보시면 뉘앙스가 느껴질 겁니다. 


"잘했다!"   


이 간단한 동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과를 거둔 이에게 말할 때는 축하와 기쁨의 에너지가 담긴 '잘했다'가 될 거고, 게으름 피우다가 뭔가를 놓친 경우에는 비아냥거리는 에너지가 담긴 '잘했다'가 될 거예요. 


경청이 어려운 거라고 하죠. 맞아요. 대부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남의 이야기를 그렇게 귀 기울여 듣지는 않아요. 그렇기에 말하는 사람이 크고 강력한 에너지로 전달해야 듣는 사람에게 '그나마' 전해집니다. 안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 혹은 못 듣는 사람, 안 들리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내용을 전해야한다는 마음으로 말해보세요. 적극적인 태도가 반영되면서 전달력이 달라집니다.


이런 가정을 하면 좋아요. 귀마개를 해서 희미하게 들리는 사람이 내가 말한 내용을 듣고 받아쓰기를 해서 다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회는 한 번뿐. 그러면 발음도 또렷해지고 목소리도 커지게 됩니다.


눈을 가린 사람이 내가 하는 묘사를 듣고 그대로 그림을 그렸을 때 내가 가진 그림과 똑같아지도록 생생하게 말하는 거예요. 하얀 구름은 정말 하얗게 말하고, 귀여운 강아지는 정말 귀엽게 말하면 됩니다. 


지난번 글의 제목이 <지휘자는 악보를 다 외울까> 였는데요, 제가 그 글에서 말씀드리고 싶었던 결론은 '프레젠테이션 할 때 내용을 다 외우지 않아도 된다, 스크립트를 봐도 된다'라는 거였습니다. 애매하게 외워서 기억이 나지 않아 말하다가 끊기고 더듬거리는 것보다, 스크립트를 보며 안정감 있게 읽는 게 듣는 사람의 귀에는 훨씬 덜 피로한 일입니다. 대신 초등학생들이 국어책 읽듯이 하면 안 되고, 그 내용을 그림 그리듯이 생생하게, 받아쓰기 시험 보듯이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저 단순하게 암기해서 AI 스피커처럼 영혼없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단, 가장 좋은 것은 내용을 숙지하고 모두 완벽하게 외워서 하는 발표임은 사실은 잊지 마세요.


발표할 때 스크립트를 보면 고개를 숙이게 되어 사람들과 아이 컨택을 못 하게 되는데요, 이를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몇 회차 뒤에 발표할 때의 바디랭귀지를 다루면서 말씀드릴게요.


지휘자의 암보에 대해서는 관련된 여러 글을 찾아보다가 스피치에 대한 저의 생각과 비슷한 내용있어 남겨봅니다. 




결국 암보를 하고 안 하고는 지휘자의 스타일일 뿐 암보 자체로 연주력을 평가해선 안 된다. 허명현 클래식평론가는 “빠르게 암보하는 능력은 분명 테크닉 중 하나지만 지휘자가 곡을 암보했는지 안 했는지가 실제로 곡을 지휘하는 데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며 “암보 여부가 음악에 대한 진정성이나 전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고 무대에서 아이디어의 손실 없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음악을 제시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악보 통째로 외우는 '암보',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암기법은? (한겨례, 2019.04.28.)




발표도 '말'입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설득할 때와 같이 말에 진심을 담고, 간절함을 담고, 열심히 준비한 내용과 에너지가 효과적으로 잘 전달되는 게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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