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막 일생
지난 초여름에, 관공서에 볼 일이 있어서, 어릴 적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를 간 적이 있다.
일처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곧장 집으로 돌아오려던 마음을 바꾸고, 그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랜만에 아이들을 떨구고 나와서, 겨드랑이 밑으로 날개라도 나는지 들뜬 기분이었는데, 익숙한 골목들을 보니, 왕년에 신발주머니를 휘두르고 다녔던 내 양팔이 더욱 간질거렸다.
오래된 강북의 골목은 변한 듯 변하지 않고 여전하였다.
한옥의 기와 처마가 서로 맞닿아 있던 비좁은 골목길은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섰고,
친구네 집이었던 커다란 한옥은 그 와중에 운 좋게도 그 모습 고대로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그런 구경들을 하면 길을 걷다가, 예전 우리 부모님이 일 년 36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열었던 가겟집이 있었던 장소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는 일제시대에 지어졌던 낡고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아빠와 엄마는 그곳에서 구멍가게보다는 크고, 마트보다는 적은 규모의 상회를 운영하셨다. 가게의 한쪽 귀퉁이에는 방과 부엌이 있어서 그곳에 살면서, 눈을 뜨자마자, 가게문을 열고, 잠들기 직전에 문을 닫는 생활을 하셨다. 그런 곳에서 어린 남매를 키우며 하는 살림이었으니, 우리의 밥상은 늘 단촐했다.
그곳에서 어린 내 눈으로 관찰한 손님들은 참 이상한 습성을 가진 듯했다. 그들은 가게에 집중하고 있으면, 한 명도 오지 않다가, 라면이라도 끓여서 한입 떠먹으려는 찰나, 지쳐 보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화장실이 급한 순간이나, 진짜로 긴박한 결승골이 터지는 축구경기 혹은, 진범이 밝혀지는 수사반장의 그 순간들 역시 손님들이 짠하고 물건을 사러 오기 참 좋은 시간들이었다. 한창 입맛이 돌고, 한창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젊디 젊은 부부였던 우리 부모님은 숟가락을 든 채로, 휴지를 한 손에 말은 채로, 혹은, 눈을 텔레비젼에 고정한채로 기꺼이 손님들을 응대했었다. 그런 형편이라, 식사를 할 때도, 가겟방의 한쪽 문을 열고, 다리를 방문 밖으로 걸쳐 놓으며,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며, 밥상을 받았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영호남 부부이시라, 먹는 해산물과 생선이 서울사람들에 비해무척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신선한 꼴뚜기를 무를 채 썰어 놓고 무친다거나, 추어탕에 넣는 제피가루를 넣고,겉절이를 한다든가, 장어로 탕을 끓인다든가 하면, 고향이 같은 동네 아저씨는 물건 사러 들렸다가, 우리의 밥상을 쳐다보고는, 염치 불고하고 한 그릇을 엄마에게 청해서 먹고 가셨다. 또, 손님이 물건을 집다가 헛짚어 뭉개 놓고 간 두부 몇 모를 놓고, 고민하는 엄마에게 동네 이북 출신 할머니는 만두 빚는 법을 알려 주셔서, 어는 한 겨울은 만두빚기에 재미들린 엄마덕에 내내 만두를 먹기도 했다.
부부 중 하나는 가게를 지켜야 했고, 또 다른 하나는 계속 배달로 밖으로 다녀야 했기에, 늘 바빴었다. 시장을 다녀 올 새가 있었을 때에는 생선이 올라왔고, 그마저도 없는 날이면, 가게에서 팔던 꽁치통조림을 묵은 김치와 조려서 내었다.
그래도, 찬바람이 불면, 남도인들의 밥상답게 꼬막이 늘 올라왔었다. 커다란 냉면사발에 수북한 꼬막이 양념장에 넉넉히 잠긴 채로 말이다. 엄마는 꼬막을 많이 사서, 커다란 들통에 가득 넣어, 한소끔 짧게 후루룩 끓여 통째로 가게에 앉아 있는 아빠 앞으로 내려놓으셨다. 무뚜뚝한 엄마가 나직막히 ' 묵고 싶은 사람이 까시오'하고 부엌으로 사라지면, 아빠가 숟가락 하나를 들고, 꼬막의 단단히 붙은 궁둥이 부분을 이리 어찌 비틀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꼬막을 까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를 힐끔힐끔 봐가면서, 속살이 많이 붙어 지저분하게 떨어진 꼬막은 옆에 앉은 남매 입속으로 넣어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 까서, 부엌으로 다시 들여주면, 엄마가 양념장을 하셨다.
꼬막을 끓인 물의 윗부분을 조금 넣고, 집간장을 조금, 마늘 다진 거, 고춧가루 파를 넣은 다음에
숟가락으로 양념이 골고루 배어 들도록 뒤적였다. 가끔씩 도시락 반찬으로도 그 꼬막들을 싸주기도 했는데, 사대문 안의 여학교를 다니던 나는 시큰둥하였는데, 부모님부터 서울 토박이인 친구가 너희 집 조개 반찬이 맛있다며 무척 좋아했었다.
나는 미국에 사는데, 학교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나갈 때면, 방학이 있는 여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름은 내 입맛이 기억하는 꼬막을 맛보기 힘든 계절이다.
큰 마트마다 껍질의 양 날개를 떼고, 깔끔하게 포장되어, 이제는 대중화된 꼬막 봉지들을 보기도 하고,
숱한 꼬막전문 맛집이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산더미처럼 수북하고, 짭조름한 국물을 후룩후룩 떠먹는 꼬막장더 이제 없다.
나 혼자 좋아하던 실력 있던 가수가, 드디어 고군분투를 끝내고, 모두가 좋아하는 대스타가 되었을 때, 팬으로서 그를 위해 행복하지만, 그 기쁨 어딘가에 정든 무엇과의 이별한 느낌이 있다지.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 내 꼬막 타령의 어딘가에 있다.
그래도, 그 시절의 입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마음 가벼워서 좋은 욕망이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욕망하면 나는 늘 죄책감이 드니까 말이다.
늘 기미 있는 부은 얼굴로 가게에서 신문 한 한구석의 연재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젊은 엄마와
자유로웠던 청춘의 한 날이 그리우면, 홀연히 한나절 잠적하곤 했던 철없는 미남이었던 아빠를 떠올려 본다.
지금의 나보다 어렸고, 미숙했으며, 먹고살기 힘들어서. 늘 허덕였고, 투덜거려서, 엄마와 아빠가 우리 남매랑 같이 자라고 철드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 삶을 잘 살아내었고, 우리를 길러 내었고, 우야둥둥 이리 꼬막 맛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찬바람 부는 철의 꼬막맛을 들먹였더니, 요번 여름에 동생이 전해준 이야기가 있다.
아빠가 조개만 먹으면 배가 살살 아프시다고 말씀을 하시기에
"어?, 아빠는 꼬막을 먹으면, 멀쩡하잖아?"라고 했더니.
아빠께서 버럭 하며 받아치시더란다.
"꼬막이 어디 조개 간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더라는 동생의 말이었다.
맞다. 꼬막이 어디 조개였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