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습관

(소설 30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막상 방향이 정해지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가야 하는지 막막해졌다.

모두 말이 없이, 식탁에 앉아 각각 생각에 빠져 있었다.

좁은 테이블 위로 세 사람의 머리에서 나는 열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듯했다.

스스로를 진수덕 화백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을 설득하여,

진수덕 화백이 어찌 임종을 했고, 그 유골은 어디에 보관했는지 묻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정변이 먼저 일어나서 자신이 머무는 서재로 향했다.

김경주 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처음부터 앞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잊은 듯 보였다.

나도 일어나서 아파의 일층으로 내려갔다. ⠀⠀⠀⠀⠀⠀

수전 할머니가 일층에 있었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로비의 소파에 홀로 앉아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

그녀가 나를 기다린 듯이 보였다.

김경주 씨의 안부를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자신의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김경주 씨가 엄마의 마지막을 궁금해한다고 전했다.

그녀가 이해한다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수전 할머니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바깥으로 향했다.

나는 그런 수전 할머니 옆에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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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언제나 누군가를 중심으로 돌아."

조용조용 수전 할머니가 말을 시작했다.

"한쪽의 힘이 언제나 더 세서, 상대를 빨아들이거든"

"그러면, 다른 한 축은 그 주위를 돌지."

"위성들처럼."

수전 할머니가 작은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더 사랑하는 쪽이 위성이 되지."

미소를 마무리하는 입매가 일그러졌다.

“전부였던 사람이, 중심이었던 사람이, 빛나던 스타였던 사람이..”

“한 없이 무력해지고, 사그라들고, 희미해지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건."

수전 할머니가 호흡을 다듬었다.

"힘든 일이지. 아니, 힘듦을 떠나, 고통스럽고, 괴롭고, 지옥이지”

“엄마가 찾던 최고의 색 안료를 사 가지고 와도, 더 이상 그릴 힘을 잃었고, 화려하고 고운 꽃을 구해 와도, 의미가 없었지.”

“제이가 정말 최고의 매니저였고, 딸이었고, 동반 자였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해!”

촉촉이 잦아들던 목소리가 급격하게 단호해지고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어.”

“그 무엇도.."

수전 할머니가 침을 삼켰다.

"그 무엇도 이기지 못하는 세월인걸.”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기운 없이 잦아들었다.


“어느 날부터 소파에 누워 있기만 한 엄마 앞에서, 엄마가 그렸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

나는 고개를 돌려서 수전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이미 제이 엄마에게 그림의 의미는.."

"그마저 잊힌 뒤였지만.”

수전 할머니도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제이가 저리 살지 않았다면, 제이가 살 수 있었을까.”

수전 할머니의 눈빛이 성성했다.

“특별한 사람을 잃은 평범한 사람의 사랑을 사람들은 알까.”


할 말이 없었다.

말을 마친 수전 할머니가 선글라스를 꺼내서 쓰고, 해바라기를 하듯이 정오의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겨울답지 않게 따가운 햇살이 들어오는 창밖을 같이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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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파트로 올라오니, 정변과 김경주 씨가 아까의 모습 그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주로 김경주 씨가 말을 하고, 정변은 듣고만 있었다.

김경주 씨는 정면돌파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정선 씨를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물어볼 것이라고 했다.

멘탈이 약해 보이는 언니를 상대로 그래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김경주 씨를 말리려 했다.

정변은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은 채, 침묵했다.


입이 말라서 침을 계속 삼키면서 김경주 씨를 설득하려 했다.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파국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김경주 씨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라. 걱정 말아요"

"가족인데요."

"가족은.."

"죽이도록 싸우고, 죽도록 미워하고, 그러다가 미쳐 버려도.."

"결국에 괜찮을 거예요"

"가족이니까."

그녀가 마지막 말을 끝내고 입을 앙다물었다.


김경주 씨가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의 문을 두드린 것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나도 그녀와 같이 문 앞에 서있었다.

수전 할머니가 근처 마트에서 산 브로콜리 치즈 수프가 든 통과 빵을 내게 주고 갔다.

양 손에 음식을 들고 기다렸다.

눈에 익은 진수덕 화백의 모습으로 이정선 씨가 문을 열었다. ⠀⠀

잠에서 깨어 난지 얼마가 안된 듯 머리는 부스스했지만, 피곤은 가신 모습이었다.⠀⠀⠀⠀⠀ ⠀⠀⠀⠀⠀⠀⠀ ⠀⠀⠀⠀⠀⠀⠀ ⠀⠀⠀⠀⠀⠀

“아이고, 막둥아”

“어디 갔뿌렸냐”

“넌 엄마 그림 그리는, 고 새를 못 참고..” ⠀⠀⠀⠀⠀⠀⠀

진수덕화백이, 아니, 이정선 씨가,

아니, 그냥 화백이, 고쟁이 바람에 물감 때를 묻힌 손으로 김경주 씨를 반갑게 감쌌다.

김경주 씨는 그대로 묵묵히 언니의 포옹을 받아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마른 쇄골이 보였다.

한참을 서로 안고 있다가, 김경주 씨가 몸을 떼며 화백에게 말을 건넸다. ⠀⠀⠀⠀⠀⠀⠀ ⠀⠀⠀⠀⠀⠀⠀ ⠀⠀⠀⠀⠀⠀⠀ ⠀⠀⠀⠀⠀⠀⠀ ⠀⠀⠀⠀⠀⠀⠀ ⠀⠀⠀⠀⠀⠀⠀

“밥은 챙겨 먹고 하는 거지”

“그럼.. 그럼..”

나는 잽싸게 화백을 식탁에 끌어 앉히고, 가져온 수프와 빵을 끌러 놓았다.

화백이 생각났다는 듯이, 맛있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내게 연신 맛나다며 인사를 했다.

그 사이에 김경주 씨가 바닥에 놓인 작업 중인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 ⠀⠀⠀⠀⠀⠀⠀ ⠀⠀⠀⠀⠀⠀⠀ ⠀⠀⠀⠀⠀⠀⠀

“그림이 좋네”

“어째, 맘에 드냐”

“어.”

최근에 읽은 진수덕 화백의 그림에 대한 기사를 생각했다.

모작도 좋은 가격에 팔린다던.

정선 씨가 그린 그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경주 씨가 내내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화백은 빵을 뜯어서 수프와 찍어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 ⠀⠀⠀⠀⠀⠀⠀ ⠀⠀⠀⠀


“근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 ⠀⠀⠀⠀⠀⠀⠀ ⠀⠀⠀⠀⠀⠀⠀ ⠀⠀⠀⠀⠀⠀⠀ ⠀⠀⠀⠀⠀⠀⠀

식사를 끝내고 한결 평안해진 얼굴의 화백 앞에 김경주 씨가 앉으며 말을 시작했다.

화백이 뭔가 하는 말알간 얼굴로 쳐다보았다. ⠀⠀⠀⠀⠀⠀⠀ ⠀⠀⠀⠀⠀⠀⠀ ⠀⠀⠀⠀⠀⠀⠀ ⠀⠀⠀⠀⠀⠀⠀ ⠀⠀⠀⠀⠀

“언니는 어디 갔데?”

“...”

“정선 언니 말이야”

“...”

김경주 씨가 화백의 눈을 맞추며, 다시 그 특유의 명료한 발음으로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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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언니는 어디로 갔냐고!


언니의 행방을 묻는 김경주 씨를 바라보는 화백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리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화백의 얼굴빛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화백의 눈빛이 아주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빛을 보이다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김경주 씨의 눈빛도, 화백의 눈빛에 변화를 따라갔다.


화백이 버럭 하며 화를 냈다. ⠀⠀⠀⠀⠀⠀⠀

“그 년을 왜 찾아!”⠀

대답과 함께, 화백이 김경주 씨로부터 몸을 틀어 시선을 돌렸다.⠀⠀⠀

“언니니까!”⠀⠀⠀⠀⠀⠀⠀ ⠀⠀⠀

김경주 씨가 같이 버럭 하며 외쳤다. ⠀⠀⠀⠀⠀⠀⠀ ⠀⠀⠀⠀⠀⠀⠀

“그 몹쓸 년은 잊어 부러”

화백이 외면한 채로 으르렁 거리듯이 말했다

“왜?!”

김경주 씨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몹쓸년이니께!”

화백은 말과 태도가 전에 없이 단호했다.

결론 지은 일을 돌이키는 것에 대한 서슬이 시퍼런 경고 같은 것이 있었다.

다 알아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화백이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김경주 씨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 ⠀⠀⠀⠀⠀⠀⠀ ⠀⠀⠀⠀⠀

그녀도 화백을 따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던 그림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화백의 등 뒤를 따라가며 선언하듯이 외쳤다. ⠀⠀⠀⠀⠀⠀⠀ ⠀⠀⠀⠀⠀⠀⠀

“왜? 언니가 몹쓸 년이야?!”

"엄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말이야!"

“언니가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데!”⠀

"언니가..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데.."⠀⠀⠀⠀⠀⠀ ⠀⠀⠀⠀⠀⠀⠀

화백의 어깨가 움찔했다.

화백이 서서히 돌아섰다.

김경주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백은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백 뒤로 오후의 빛나는 햇살이 강물 위로 비늘을 달아가며 한참을 번들거리며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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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끝에 화백이 몸을 움직였다.

복도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김경주 씨가 따라서 복도로 향했다.

나도 정변도 자석처럼 그들의 발걸음을 쫒았다.

복도의 끝에 있는 세 개의 방들이 모두 입을 다문 듯이 닫혀 있었다.

화백이 그중에 제일 깊숙한 방의 문을 열었다.


화백을 뒤따라 가던 김경주 씨가 문 앞에서 우뚝 섰다.

그렇게 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뒤따르던 나도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안의 광경을 바라보는 김경주 씨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얼른 김경주 씨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가 쳐다보는 곳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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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무당의 방 같기도, 하나의 화려한 불교의 제단 같기도 하였다.

커다란 탁자가 창 쪽으로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도 없이 놓인 높은 탁자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탁자 위에는 꽃병에 가득 담긴 커다란 장미꽃이 있는 대로 만개한 채 피어 있었고,

그 양옆으로 사진 액자들이 주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모두 다 비슷한 머리 모양과 비슷한 얼굴을 한 두 여인의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한눈에 진수덕 화백과 이정선 씨가 같이 찍었던 사진들임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이 온통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가 가득해서 조금 어질 한 느낌이 들었다.

방에 모습에 조금 익숙해지니 시선을 온통 뺏어가는 장미 꽃다발 뒤로,

청동처럼 보이는 병이 제단 너머에서 창가를 내려다보며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경주 씨가 빨려 들어가듯이 걸음을 재단 앞으로 옮겨 다가갔다.

먼지 한 톨도 없이 정리된 방안으로 바람이 괜한 창문만 흔들다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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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씨가 손을 들어 청동 용기로 뻗었다.

손이 떨리는지, 멈칫 거리는 지, 알 수 없는 손짓이 더디게 보였다.

김경주 씨가 마침내 청동 용기를 잡고, 한참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

다가서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도 보았다. ⠀⠀⠀⠀⠀⠀⠀

청동용기에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지난해 10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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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씨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 ⠀⠀⠀⠀⠀⠀⠀⠀⠀⠀⠀⠀

“몹쓸 것이라 하지 않았냐..”

화백이 그런 김경주 씨를 쳐다보다가 힘 없이 말했다.

그러고는 방안을 휘청휘청 걸어 나갔다.

거실 바닥에는 그녀가 그리던 그림들이 흩어져 있었다.

화백의 시선에 그림이 들어오자, 그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김경주 씨는 제단 앞에 쓰러지듯 엎드려서 한참을 있었다.

낮은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라고도, 가끔은 언니..라고도 부르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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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느껴졌다.

정변이었다.

그 손이 따스해서 나는 두 손으로 맞잡았다.

정변이 나를 돌려세워 화백의 집 밖으로 이끌었다.

화백은 거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커다란 캔버스를 새삼 고운 색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 바깥은 자신의 루틴대로 어둠으로 온 창을 채웠다.

정변의 두툼한 손이 어두운 길을 이끌었다.


고마웠다.



_The End-




#글은 제 글이고

#그림은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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