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9화) 나라는 습관
6층에서 내리자마자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를 향해서 달려갔다.
우리 아파트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정변이 내 기척을 느끼고 이름을 여러 번 불렀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다행히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 문은 잠기지 않은 채 있어서 쉽게 열렸다.
수전 할머니와 나는 안으로 밀듯이 들어갔다. ⠀⠀⠀⠀⠀⠀⠀ ⠀⠀⠀⠀⠀⠀⠀ ⠀⠀⠀⠀⠀⠀⠀ ⠀⠀⠀⠀⠀⠀⠀
진수덕 화백은 거실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온 집안에 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온갖 물감 접시들을 옆에 주르륵 나열해 놓은 채로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하고 있었다.
화백의 그림 그리는 모습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언제 왔는지, 정변이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조용히 끌고 나왔다.
정변이 이끄는 대로 이쪽 아파트로 건너왔다.
거실에 김경주 씨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불과 한 시간여 전에 보았던 김경주 씨가 아닌 모습이었다.
얼굴이 하얗다 못해서 파랗게 보일만큼 창백해졌다.
입이 반쯤 열린 채로 턱을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늘 단정하니 정돈된 눈빛과 말투로 자신을 명료하게 표현하던 김경주 씨라고 보기 힘들었다.
내가 다가가 그녀 앞에 서 있는 것도 못 느낄 만큼 얼이 나가 있었다.
보는 듯 아무것도 보지 않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뭐라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나는 정변을 쳐다보았다.
정변이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 ⠀⠀⠀⠀⠀⠀⠀ ⠀⠀⠀⠀⠀⠀⠀ ⠀⠀⠀⠀⠀⠀⠀ ⠀⠀⠀⠀⠀⠀⠀ ⠀⠀⠀⠀⠀⠀⠀ ⠀⠀⠀⠀⠀⠀⠀ ⠀⠀⠀⠀⠀⠀⠀
그녀 옆에 앉았다.
뛰어 오느라 거칠어진 내 숨소리가 너무 커서, 김경주 씨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호흡을 정돈시키며 뭐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이내 그녀가 반복적인 단어를 주문을 외듯이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 ⠀⠀⠀⠀⠀⠀⠀ ⠀⠀⠀⠀
“언니가.. 엄마를..”
“엄마는..”
“언니가.. 엄마를..”
“엄마는..” ⠀
김경주 씨가 덜덜 떨면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우리는 멍하니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수전 할머니가 현관에 서서, 열린 문을 두드려서 시선을 끌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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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제이의 시스터니?”
.. 네가.. 제이.. 시스터??
말이 귀에는 들어왔지만, 머리에는 입력이 안 되는 것처럼 맴맴 돌았다.
혼이 빠져서 앉았던 김경주 씨가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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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김경주 씨의 목소리에서 쇤 소리가 났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수전 할머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조용하게 이어갔다.
.. 제이 시스터.. 제이'의' 시스터..
내 머릿속에선 아직도 두 단어가 소화되지 않고 있었다.
“제이를 저 모습 그대로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 제이가 시스터 된다는 말인데.. ⠀⠀⠀⠀⠀⠀⠀ ⠀⠀⠀⠀⠀⠀⠀ ⠀⠀⠀⠀⠀⠀
“엄마는!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되었어요?” ⠀⠀⠀⠀⠀⠀⠀
김경주 씨가 수전 할머니의 말을 자르면서 닥치라는 듯이 외쳤다. ⠀
수전 할머니가 잠시 김경주 씨의 뒤 창밖으로 먼 시선을 잠시 두었다. ⠀ ⠀⠀⠀⠀⠀⠀⠀ ⠀⠀⠀⠀⠀⠀⠀⠀⠀
그러고는 곧 시선을 거두고, 짧게 호흡을 고르다가 답했다. ⠀⠀⠀⠀⠀⠀⠀
“제이가 저렇게 된 게..”⠀⠀⠀⠀⠀⠀⠀ ⠀⠀⠀⠀⠀⠀⠀
“제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야”
김경주 씨가 다시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순간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지금 무슨 말이 오가는 건지, 어떤 상황인지,
모든 것이 어떤 관계를 가진 건지, 둘 사이에 오가는 말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엄마는.. 엄마는..”
김경주 씨가 목이 메는 듯했다.
그녀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떨군 그녀의 머리 위로 마른 그녀의 두 어깨가 뼈를 보이면서 올라왔다.
수전 할머니가 김경주 씨의 흐느낌을 쳐다보았다.
아주 많이 미안하고, 정말로 딱해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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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할머니가 진수덕 화백을 제이라고 부르는 것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잠깐 스친 적이 있다.
‘진’이라고 불러도 되고, ‘수’라고 불러도 되는 데, 왜 ‘제이’라고 부를까 하고.
제이는 정선 씨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제이랑 엄마와 늘 함께였지.”
수전 할머니가 문가에 선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창밖으로 두었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충격으로 가라앉아서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깜깜해졌고,
빈틈을 지우 듯이 나머지 어둠이 집안으로 자꾸 스며들어 왔다.
타이머로 작동하는 소파 옆의 스탠드에 불이 들어와 희미하게 방안을 비췄다.
느릿느릿 수전 할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 제이의 하루는 엄마를 중심으로 돌았어. "
"엄마를 위해 일어나고, 엄마를 위해 산책하고, 엄마를 위해 쇼핑을 다녀오고,
“제이는.. 제이를..”
그녀가 뭐라 할 말을 못 찾는 듯이 보였다.
다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
수전 할머니가 아주 송구스러워하듯 침을 삼치면서 말을 이었다. ⠀⠀⠀⠀⠀⠀⠀ ⠀⠀⠀⠀⠀⠀⠀ ⠀
“그래도, 제이를 조금.., 제이는.. 좀.”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자신의 감정을 골랐다.
그 말을 하는 수전 할머니의 표정은 복잡했지만, 복잡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 심란하고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얼굴이 모두 말해 주었다.
이해하기 힘든 대상을 홀로 이해하는 그녀의 마음을 말이다.
“I am sorry for you”
한참을 말을 고르던 수전 할머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나 나갔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복도까지 따라나섰다.
수전 할머니가 생각난다는 듯이 가던 길을 멈추고 내게로 몸을 돌렸다.
얼른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며, 제이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덕 화백의 현관문 밑으로 환한 불빛이 여전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 ⠀⠀⠀⠀⠀⠀⠀ ⠀⠀⠀⠀⠀
안으로 들어와 보니, 김경주 씨가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었다.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는 그녀의 두 어깨가 계속 흔들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 그녀를 우리는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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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밤이 완전히 깊어졌다.
정변이 자기가 쓰던 방에서 침낭을 들고 나와서 사무실로 쓰던 방으로 갔다.
나는 김경주 씨를 침대가 있는 큰 방으로 이끌었다.
말없이 모두 하나씩 방을 차지하고 누었지만, 모두들 늦게까지 뒤척이는 듯했다. ⠀⠀⠀⠀⠀⠀⠀ ⠀⠀⠀⠀⠀⠀⠀ ⠀⠀⠀⠀⠀⠀⠀
하룻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가 일어났을 때엔 김경주 씨가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정변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만들었다.
김경주 씨는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밤사이 가느다란 얼굴이 더욱 수척해진 김경주 씨의 얼굴엔 또렷해 보였다.
정변이 묽게 끓인 감자 수프를 내어 왔다.
자신의 앞에 놓은 접시를 뒤적이기만 할 뿐,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던 김경주 씨가 위태로워 보였다. ⠀⠀⠀⠀⠀⠀⠀ ⠀⠀⠀⠀⠀⠀⠀ ⠀⠀⠀⠀⠀⠀⠀ ⠀⠀⠀⠀⠀
“언니랑 담판을 지어야겠어요”⠀⠀⠀
김경주 씨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우리를 쳐다보면서 한 단어씩 끊어가며 말을 했다.
정변과 나는 동시에 서로 쳐다보았다.
담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지 모르겠어서 잠자코 있었다.
김경주 씨는 우리를 앞에 두고 다시 골똘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미동도 하지 않던 그녀가 물컵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정변이 조심스레 물었다. ⠀⠀⠀⠀⠀⠀⠀ ⠀⠀⠀⠀⠀⠀⠀ ⠀⠀⠀⠀⠀⠀⠀
“무얼 말하는 거죠?”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듣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죠?”
김경주 씨가 정변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정변과 나는 그녀의 물음에 침묵으로 답했다.
잠시 우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몸만 식탁에 앉아 있을 뿐,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려졌던 음식이 치워지고, 정변과 내가 자리를 뜨고, 일상의 풍경이 흘러가도,
김경주 씨는 홀로 테이블에 앉아 시선을 주변 사물에 번갈아 가며 고정시키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가끔씩 천장을 쳐다볼 때면 그녀의 옆얼굴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 ⠀⠀⠀⠀⠀⠀⠀ ⠀⠀⠀⠀
그런 그녀에게 음식을 권하기도 차를 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내버려 두었다.
슬픔과 충격이라는 게 결국은 스스로 다루고 토닥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오후가 되었을 때까지도 그런 풍경이 계속되었다.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는 어제 밤새도록 불빛이 흘러나온 까닭에 오늘 내내 잠잠했다.
집 안에 불을 하나씩 켜고 있을 때, 김경주 씨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녀와 식탁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았다. ⠀⠀
김경주 씨가 꺼내는 말이 무엇이 될지 예상이 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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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내가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어요.”
목소리가 잠기긴 해도 정확한 발음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결국 슬픈 소식이라서요.”
그녀가 잠시 두 입술을 꽈악 다물었다가 다시 폈다.
“세라가 없었다면, 그마저도 몰랐을 일이에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 ⠀⠀⠀⠀⠀⠀⠀
“엄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디다 모셨는지. 휴우..”
한숨을 쉬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묻기 시작했다.
“언니가 내게 말해 줄 방법이 없을까요? 어제 같이 온 언니 친구는 알까요? 세라가 물어보면 말할까요?”
상대방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말을 이어가는 김경주 씨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어디 계시든.. 꽃이라도 한 송이 놓아야.."
다시 목소리가 갈라지듯 잦아졌다
"우리 엄마는.. 참.. 꽃의 여인이었는데."
김경주 씨의 눈이 이곳에 온 후로 줄곧 충혈되어 있었다.
충혈된 눈빛에 물기를 담고 말을 잇던 김경주 씨가 마지막 말을 하며 기운 없이 웃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긴장이 풀려 다리가 풀린 기분이 들었다.
앉아서 김경주 씨와 말을 나눈 게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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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김경주 씨를 보면서 정변과 침묵 속에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었다.
한 존재가 사라진 현장에 주로 남는 것은 상실에 대한 슬픔과 애도가 아니다.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아마 앞으로 내내 살면서, 그리고, 늙으면서 문득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재산이 많든 적든 간에, 소멸해 간 인간에 대한 슬픔 따위를 한 방에 날려 보낼 가정 잔혹사의 최고봉은 남겨진 혈육 간의 다툼이다.
고인이 일생에 걸쳐 형성한 감정의 축적들이 폭발하여 파편처럼 흩어지는 곳에서
그간의 편애와 상처, 해석과 차용이 제각각 다르게 적용되고,
그것들이 추도의 밤이 새도록 군불이 되어 타오른다.
괴로워하는 김경주 씨가 안 되었다고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그녀가 어떻게 나올까 내내 걱정되었다.
사람들은 흉한데, 그중에 혈육이 흉하게 나오면 더욱 흉했다. ⠀⠀⠀⠀⠀⠀⠀ ⠀⠀⠀⠀⠀⠀⠀ ⠀⠀⠀⠀⠀⠀⠀ ⠀⠀⠀⠀⠀⠀⠀ ⠀⠀⠀⠀⠀⠀⠀ ⠀⠀⠀⠀⠀⠀⠀
언니를 금치산자로 판정받도록 소송을 해달라는 말이 아니어서, 가디언으로 자기를 지정하고,
모든 그림을 자기 소유로 돌리게 도와 달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온 말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엄마에 대한 것이,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린 엄마의 유골의 행방이 궁금해하는 김경주 씨에 우선 안도했다.
그 뒤에 흘러가는 일들이 남들과 다르지 않더라도, 최소한 먼저 물어 준 말에 희망을 걸어 보면 되리라.
#글은 제 창작물이고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은 피카소
#세 번째 그림은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