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8화) 나라는 습관
택시에서 내린 김경주 씨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정변이 김경주 씨의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먼저 타서 6층을 눌렀다.
모두 말이 없었다.
정변이 가방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슬쩍 내 손을 잠깐 동안 꼭 잡았다가 놓았다.
그 손이 내게 아까 내게 일러두었던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서자, 김경주 씨가 먼저 얼른 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 문을 바라다보았다.
시선을 내내 그곳에 고정시키고 있던 김경주 씨를 정변이 우리가 머무는 아파트로 이끌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변이 가방을 한쪽 구석에 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무얼 마시겠냐고 물었다.
김경주 씨는 우리 아파트에서도 내내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정변이 묻는 말을 듣고서야 현관문에서 시선을 떼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물을 한 잔 청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제야 아파트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는 그녀의 마른 이마 위로 힘줄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 ⠀⠀⠀⠀⠀⠀⠀ ⠀⠀⠀⠀⠀⠀⠀
잠잠하게 앉았던 김경주 씨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 정변이 방금 막 가져다준 한 컵의 물이 출렁이는 듯했다.
그녀가 곧장 문을 열고 나가 복도를 지나서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로 향했다.
자석처럼 내 몸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정변이 나를 잡았다.
잡힌 채로 현관의 문에 기대서 김경주 씨를 지켜보았다.
아파트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위치해서, 내 쪽에서는 문 앞에 선 김경주 씨의 모습만 보였다. ⠀⠀⠀⠀⠀⠀⠀ ⠀⠀⠀⠀⠀⠀⠀ ⠀⠀⠀⠀⠀⠀⠀ ⠀⠀⠀⠀⠀⠀⠀ ⠀⠀⠀⠀⠀⠀⠀
김경주 씨가 고개를 떨구고 닫힌 문 앞에서 잠자코 서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떨군 고개 위로 그녀의 두 어깨가 들썩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진수덕 화백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어 번, 그러다가, 점점 세져서 맹렬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던 김경주 씨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문이 열렸다.⠀⠀
"엄.. 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떨리는 김경주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던 곳으로, 그녀의 모습이 흘러 들어 가 듯 사라졌다.
컴컴한 복도만 텅 비어 남았다. ⠀⠀⠀⠀⠀⠀⠀ ⠀⠀⠀⠀⠀⠀⠀ ⠀⠀⠀⠀⠀⠀⠀ ⠀⠀⠀⠀⠀⠀⠀
나는 우리 아파트 문을 열어 둔 채로 소파로 향했다.
앉은 것도 아니고, 일어 서려는 것도 아닌 자세로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긴장이 풀리는 것 같기도, 더욱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아파트의 복도도, 창밖도, 어두워져만 갔다.
진수덕 화백의 집 안은 가장 깊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갑자기 모든 사물이 고요해진 것이 더 스산했다.
차라리 무어라 소동이라도 났으면, 뛰어가 볼 텐데 말이다. ⠀⠀⠀⠀⠀⠀⠀ ⠀⠀⠀⠀⠀⠀⠀ ⠀⠀⠀⠀⠀⠀⠀ ⠀⠀⠀⠀⠀⠀
“괜찮겠지?”
마른 입술의 표면을 뜯어내다가, 정변을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괜찮겠지”
정변이 답했다.
"혹시.. 라도, 말이야."
“No 혹시, 세라”
“아니, 우리가 사건들을 보면 말이야"
“No, 아니, 세라”
“형사 사건 보면..”
“No, 형사 사건”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가, 머리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
서둘러 재킷을 집어서 집을 나왔다.
정변이 쫓아 나와서 나를 막으려고 따라 움직였다. ⠀⠀⠀⠀⠀⠀⠀ ⠀⠀⠀⠀⠀⠀⠀ ⠀⠀⠀⠀
“일층에 갈 거야. 수전 할머니가 있나 보게.”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며 외쳤다.
“문 열어 놓고, 잘 지키고 있어!”
엘리베이터까지 쫓아온 정변에게, 문이 닫히기 순간에 급하게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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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층에 파티룸에는 수전 할머니가 없었다.
할머니들이 수전은 마트에 갔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저번에 같이 가 본 적이 있는 길 건너편의 마트일 것이다.
그곳을 향해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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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안은 저녁을 앞두고 북적였다.
대형마트가 없는 맨해튼에서 이 슈퍼마켓은 근처에서 큰 곳에 속한다.
이 시간 즈음에는 신선한 샐러드용 채소나 갓 나온 빵을 사기 위해 퇴근길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완성된 요리도 요일별로 스페셜로 팔아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수전 할머니를 찾아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물건이 수북이 쌓인 미로 같은 복도들을 살피는데, 우유와 유제품을 파는 섹션을 지날 때였다.
그 복도가 끝나는 곳에서 계산대가 보였고,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가고 있는 수전 할머니가 보였다.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내 얼굴에 쏟아지는 것이 느껴져서 그곳을 쳐다보았다. ⠀⠀⠀⠀⠀⠀⠀ ⠀⠀⠀⠀⠀⠀⠀ ⠀⠀⠀⠀⠀⠀⠀⠀
전 남편이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복도 한가운데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거는 아름답지 않다.
현재의 내가 괴로우니까, 돌아보며 아름답게 꾸몄을 뿐이다.
미숙한 내가, 허접한 그를 만나서, 아주 잠깐 섬광처럼 빛나다가, 대부분 쪽팔리게 사그라져 간 기록들이 과거다
그래서 과거의 민낯은 도저히 있는 그대로 보아 줄 수가 없다.
겹겹이 콩깍지를 씌워 미화하지 않고서는 어떻게든 견딜 수가 없다.
살수록, 우리는 이런 일에 달인이 되어간다.
그렇게 발효되었고, 발효되는 중이며, 더욱 발효될 자신의 과거를 맞닥뜨린 순간은 그래서 늘 생뚱맞다
지금처럼.
나는 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방향 쪽으로 내가 움직이자, 전남편이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우유 팩을 들은 한 손을 정지화면처럼 그대로 한 채로 나를 쳐다보면서 있었다.
그런 그의 곁을 지나쳐서 출입구를 향했다.
이제는 점점 작아지는 점처럼 사라져 가는 수전 할머니를 쫒아 갔다.
가게 입구를 막 나왔을 즈음 그가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가게에서 나와 수전 할머니를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 ⠀⠀⠀⠀⠀⠀⠀ ⠀⠀⠀⠀⠀⠀⠀ ⠀⠀⠀⠀⠀⠀⠀ ⠀⠀⠀⠀⠀⠀
수전 할머니가 쇼핑한 식료품이 담긴 종이백 하나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향이 우리가 사는 아파트로 가는 길이다.
수전.. 하고 할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한창 퇴근시간이라, 전철에서 쏟아진 사람들로 길거리가 북적거렸다.
수전 할머니는 온 신경이 신호등에만 가있는 듯했다.
꼿꼿이 서서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가, 곧바로 바뀐 신호등을 보고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 ⠀⠀⠀⠀⠀⠀⠀ ⠀⠀⠀⠀⠀⠀⠀ ⠀⠀⠀⠀⠀⠀⠀ ⠀⠀⠀⠀⠀⠀
그 신호가 바뀌기 전에 나도 따라 건너기 위해서, 횡단보도 멀리서부터 찻길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횡단보도 건너편에 다다를 즈음에 수전 할머니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길 옆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튀어나온 나를 수전 할머니가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보았다. ⠀⠀⠀⠀⠀⠀⠀ ⠀⠀⠀⠀⠀⠀⠀ ⠀⠀⠀⠀⠀⠀⠀
숨이 차서 헉헉거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진.. 진.. 더 아티스트..”
수전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딸.. 딸이.. 왔어요”
“딸???”
“가족이.. 찾아.. 왔다고요”
“!!”
“.. 진.. 진을.. 도와줘요.. 집 안에.. 지금 둘이만 같이..” ⠀⠀⠀⠀⠀⠀⠀ ⠀⠀⠀⠀⠀⠀⠀ ⠀⠀⠀⠀⠀⠀⠀ ⠀⠀⠀⠀⠀⠀⠀ ⠀⠀⠀⠀
수전 할머니가 쇼핑한 봉투를 움켜쥐고 뛰기 시작했다.
짧은 연갈색 가죽재킷에 검정 색 폴라와 진을 입은 수전 할머니가 굽 높은 짧은 부츠를 신고도 잘 달렸다
그 뒤를 허덕 거리면서 따라 뛰었다.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글과 사진은 제 창작물이며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