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7화) 나라는 습관
처음에는 전 남편의 어머니로부터 봉변당하는 걸 도와주어서 진수덕 화백에게 고마웠다.
그러나, 그 일을 제외하더라도 진 화백은 분명 한 개인으로, 또, 한 예술가로 존중받을만한 인물이다.
개인적인 친밀감으로 쌓거나 오가는 교류가 없어도, 이곳에 지내는 내내 본 것이 있지 않은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진수덕 화백이 내게 느끼게 해 주었던 인간적인 신뢰가 떠올랐다.
도통 계산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진수덕 화백이 받을 쇼크가 상상이 되었다. ⠀⠀⠀⠀⠀⠀⠀ ⠀⠀⠀⠀⠀⠀⠀ ⠀⠀⠀⠀⠀⠀⠀ ⠀⠀⠀⠀⠀⠀⠀ ⠀⠀⠀⠀⠀⠀⠀ ⠀⠀⠀⠀⠀⠀⠀ ⠀⠀⠀⠀⠀⠀⠀
김경주 씨가 미리 여러 가지 가능성이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장기판에 놓인 말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이다.
진수덕 화백에게 가서 미리 귀띔을 해줘야 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정변이 애초에 내게 못 박은 것도 있지만, 그가 말리지 않았어도 나 역시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우리를 고용한 사람은 김경주 씨니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근처에 응급 전화번호들을 찾아,
전화기에 번호를 저장해 놓았다.⠀⠀⠀⠀⠀⠀⠀ ⠀⠀⠀⠀⠀⠀⠀ ⠀⠀⠀⠀⠀⠀⠀ ⠀⠀⠀⠀⠀⠀⠀ ⠀⠀⠀⠀⠀⠀⠀
“정변, 다시는 이런 사건 맡지 말자”
정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가사 사건은 거리 조절이 재판의 승패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처음부터 의뢰인과의 거리를 멀리 두고 시작하지 않으면 진이 빠지기 쉽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겪을수록 거리두기는 더욱 교묘해져 힘들고, 그렇기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많아진다.
진수덕 화백의 나이를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그 세대는 봉건시대부터 신자유주의까지 경험한 세대이다.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었고, 그 이후에는 엄청난 속도의 산업의 발전을 겪었다.
그 무서운 변화 과정 속에 무한 경쟁하며 부를 쌓고 성공한 경험도 있다.
그렇게 겪은 모든 요소를 섞어서, 자기 가정마다 쌓인 특수한 요소를 효소처럼 발효시키고,
갈등을 증폭하여 발전시켰으리라.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진 화백의 집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문제가 되는 집안의 가정사를 들어보면 잔혹하기가 형언하기도 힘들고,
잔인함과 집요함이 지속된 시간은 세대를 넘는다.
가정마다 사는 시대도 다르고,
집마다 싸우는 무기도 다르며 가족마다 정한 법칙과 룰도 다르다. ⠀⠀⠀⠀⠀⠀⠀ ⠀⠀⠀⠀⠀⠀⠀⠀⠀⠀⠀⠀ ⠀⠀⠀⠀⠀⠀
가족은 안다.
어찌하면 최소한의 무기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지를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슬픈 것은 이 처절한 전쟁의 끝이 언제나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찌르고 피 흘리면서도, ‘결국’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족이다.
그 사실 하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끝난다. ⠀⠀ ⠀
김경주 씨가 런던에서 뉴욕을 향해 돌아오기까지 남은 이틀 동안 나는 자꾸 한숨이 나왔다.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도 끊임없이 나오는 내 한숨소리에 스스로가 들으면서도 민망하였다.
한 공간에 있는 정변에게도 못할 짓인 것 같았다.
랭마저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으로 가버린 요즘에는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일층 로비에 내려가 소파에 앉았다.
오직 겨울이라는 계절 하나만 가득한 빈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하며 한층 부드러워져 얼굴에 닿았다.
눈을 감듯이 뜨고 있었다.
옆에 누군가가 조용히 앉았다.
수전 할머니였다.
할머니를 쳐다보며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꽃이 아니라도, 햇빛은 필요하지요."
그녀가 잔잔히 웃었다.
"맞아."
나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따스했다.
"남편이 떠나고 나니까.."
그녀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남편만이 떠난 것이 아니라, 남편과 쌓은 모든 인간관계가 떠나더군."
"난 우리가 만든 그 모든 관계에서 오십 퍼센트의 지분이 있는 줄 알았는데..'
"둘이 함께한 친구들은 우리 둘의 친구였을 뿐, 홀로 남은 내 친구가 아니었어."
"그는 그렇게 나에게 모든 걸 주고, 또 그렇게 내게 준 걸 다 챙겨 가지고 떠났지."
할머니께 물었다.
"두 분이 친구들이 많으셨나요?"
"친구라기보다는 그가 발굴해내고 지원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많았지"
그녀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좋은 것들은 아무것도 내게 남지 않았더군."
"명성도, 인맥도, 화려하게 빛나던 그의 시간에 조연이었을 뿐."
건물 안으로 지는 햇살이 마지막 힘을 내뿜으며 쏟아져 들어왔다.
수전 할머니가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전 남편과 결혼 중에 알게 된 사람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그와 이혼 후에 사라져 갔다.
화제를 바꿔서 진수덕 화백 이야기를 물었다.
수전 할머니도 퍼뜩 정신이 드는 듯이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빨라졌다.
"지금은 제이가 몰두해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는 때야"
"정말 대단하지 않니?"
"제이도 나처럼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데, 제이에게는 재능이 있잖아."
"재능은 홀로 남은 시간을 버티게 해 줘."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무리 세련되어도 할머니는 할머니다.
우연한 질문 하나가 무척이나 긴 수다를 낳는다.
지금은 내가 머릿속을 비우고, 두 귀를 활짝 열 시간이다.
다행이다.
다음날 오후 다섯 시 즈음, 김경주 씨가 탄 비행기가 JFK에 도착했다는 텍스트가 왔다.
나는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나는 내내 시간을 확인했다.
긴장된 몸이 오후가 되니, 결리고 아파왔다. ⠀⠀⠀⠀⠀⠀⠀ ⠀⠀⠀⠀⠀⠀⠀ ⠀⠀⠀⠀⠀⠀⠀ ⠀⠀⠀⠀⠀⠀⠀
정변이 내 방의 문을 두드리며,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방 위의 침대에서 늘어져 있다가 나와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정변이 거실 소파에서 나를 기다렸다.
엉덩이를 반만 의자에 걸치고 앉아 있다가 다가오는 나를 올려 보았다.
두 손을 깍지를 낀 채로 무릎 위에 얹은 채로 나를 쳐다보며, 또박또박한 영어로 말을 시작한다.
네모난 얼굴에 턱이 뾰족하게 나온 형태로 역 오각형이 되었다.
이렇게 역 오각형의 얼굴을 하고 눈빛이 매서워지면서 영어로 말을 할 때면, 상황이 엄중할 때이다. ⠀⠀⠀⠀⠀⠀⠀ ⠀⠀⠀⠀⠀⠀⠀ ⠀⠀⠀⠀⠀⠀
“세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김경주 씨가 오면 Estate Sale 이외에 어떠한 일도 언급하지 마."
"어떠한 일에도 연루되지 마.”
“진수덕 화백과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하지 마.”
“STAY OUT OF THIS”
정변이 마지막 문장을 반복했다.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정변이 이렇게까지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것도, 나에 대해 이리 간섭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정말로 간절하게 내가 복잡한 문제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경주 씨가 우버를 타고 아파트로 오고 있다면서 텍스트를 보냈다.
10여 분 후에 도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맞이하러 일층 현관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문을 나서며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 현관을 보았다.
불빛이 문 밑의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즘에는 밤을 새 가며 그림을 그리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오후가 되면 작업에 몰두하는 기색이었다. ⠀⠀⠀⠀ ⠀⠀⠀⠀⠀⠀⠀ ⠀⠀⠀⠀⠀⠀⠀
김경주 씨가 캐리어 가방 하나를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정변이 얼른 그 가방을 받아 들었다.
짧은 머리에 피곤해 보이기는 해도 여전히 정돈된 얼굴을 한 김경주 씨가 택시에서 내렸다.
그녀가 택시에서 내려서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진수덕 화백의 코너 아파트에서 나오는 불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거리에서 조그맣게 반짝였다.
김경주 씨는 이내 충혈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첫 번째 그림은 조지아 오키프, ' 레이크 조지의 숲 속 수영장, 1922'
#두 번째 그림은 에디 호퍼, " Room in Brooklyn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