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한 성깔 한다

(소설 26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정변과 함께 산 꽃을 한 아름 안고 아파트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진수덕 화백과 늘 함께 담배를 피우던 수전 할머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전은 로비의 의자에서 입구 쪽을 향한 채로 앉았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다가왔다.


“이게 제이가 사 달라고 한 꽃이니?”

진수덕 화백을 제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우리가 사 온 꽃들을 샅샅이 훑는다.

“네, 맞아요. 아까, 찾는데 안 계셔..”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게 눈을 마주치면서 내 말을 잘랐다.

“제이는 그림을 그릴 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않아.”

“그래요?”

"꽃과 함께 간단한 음식도 사다가 줘야 해”


아까 휘청거리며 내려오던 진수덕 화백의 모습이 생각났다

얼른 가게에 다녀오겠다며, 내가 다시 서둘렀다.

꽃을 들고 있던 정변에게 아파트로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근처 가게로 서둘러 향했다.

수전 할머니가 말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가게에서 진수덕 화백이 즐겨 먹는 음식들을 지목했다.

요리를 할 필요가 없는 바나나, 오트밀, 통밀빵, 소이 밀크 같은 것들을 사서 들었다.

그제야 수전 할머니의 굳었던 얼굴이 풀리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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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커트머리, 자그마한 체구에, 짧은 까만 밍크재킷을 입은 수전 할머니는

꽤나 감각이 있어 보였다.

그리 애써서 가꾸는 느낌은 아니면서도,

볼 때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센스가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수전 할머니는 파티룸 할머니들의 고정 멤버는 아니지만,

진수덕 화백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는 자주 보였다.

파티룸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어울리면서도, 수전 할머니는 묘하게 그들과 달랐다.

자신만 세계와 영역을 오래 가꾸어 온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홀로 로비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면, 방해하면 안 될 것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진수덕 화백과는 애연가 동지로 건물 입구에서 함께 끽연을 만끽해도 어울리고,

파티룸의 할머니들 무리 속에 있어도 어울리고,

홀로 따로 있어도 무척 어울렸다.

물리적으로도, 인적으로도 말이다.

타인과는 구별된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찾기 힘들다.

그러기에, 더욱 눈에 띄였는 지 모르겠다.


우리는 쇼핑한 음식들을 손에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는 지는 석양 속에 있었다.

해 지는 곳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바람 많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수전 할머니가 익숙하게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본의 아니게 수전 할머니의 일을 뺏은 듯한 느낌이었던 나는

쏟아지는 오후 햇살에 눈이 부셔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선글라스가 멋지다며 칭찬을 하였다.

수전 할머니가 처음으로 웃었다. ⠀⠀⠀⠀⠀⠀⠀ ⠀⠀⠀⠀⠀⠀⠀ ⠀⠀⠀⠀⠀⠀⠀


“수전도 예술가 같아요.”

수전 할머니 입가에서 사라지는 짧은 미소를 보며, 덧 붙였다.

“맞아, 한때는..”

“그럴 것 같았어요. 어느 분야의 예술 인가요?”

“그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위로 밀어 올리면서, 수전 할머니가 혼잣말을 하듯이 덧 붙였다.


"젊은 날, 내가 오하이오에서 이곳에 그림 공부하러 올 때는 내가 재능이 많은 줄 알았지. 하지만, 이곳에서 진짜 재능을 가진, 정말 많고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곧 알게 되었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럴 때는 어찌 답해야 하나 망설여져 침묵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난 괜찮아. 나를 사랑해서, 내 예술마저 재능이 넘친다고 생각했던 아트디렉터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니까”


“그래요. 좋네요”

나는 놓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응, 그가 나한테 잘못한 거라곤, 나보다 먼저 죽은 일밖에 없어”


어느덧 우리는 아파트 건물 앞에 다다랐다.

그녀가 입구에서 양손에 물건을 든 나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손잡이를 잡아주며, 내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그녀가 물었다.

"오래 살아 슬픈 것이 무엇인지 아니?"

그녀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나치는 내 귀에 답을 불어넣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걸 보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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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정변에게 꽃을 들고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6층에서 내리고 보니, 정변이 꽃을 들고 진수덕 화백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서는 우리를 보고, 정변이 진수덕 화백의 문을 노크했다. ⠀⠀⠀⠀⠀⠀⠀ ⠀⠀⠀⠀⠀⠀⠀ ⠀⠀⠀⠀⠀⠀⠀


진수덕 화백이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뒤로 작업 중인 듯 그녀의 그림이 보였다.

숱한 접시들에는 색색의 물감들이 풀어져 있었고,

눕혀진 커다란 캔버스 옆으로 스케치가 된 여러 종이들이 펼쳐져 있었다.

한 개의 소파 이외에는 아무 가구도 없는 넓은 거실은 온통 그림을 그리는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하나 제대로 서 있을 곳이 없을 만큼.

진수덕 화백은 얼른 꽃을 받아 안고, 꽃들의 상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전 할머니는 얼른 내 손에 들고 있던 음식들을 받아서, 냉장고에 들여 놓고 식탁 위에도 놓았다.

그리고는 진수덕 화백에게 당부를 했다. ⠀⠀⠀⠀⠀⠀⠀ ⠀


“제이, 먹을 것은 꼭 먹고 해”

온통 그림에 정신이 가 있는 듯한 진수덕 화백은 꽃들을 쳐다보던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했다.

활짝 핀 장미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느라 무슨 말에도 대충 반응했다.

우리는 그녀의 아파트 문을 닫아주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 ⠀⠀⠀⠀⠀⠀⠀⠀⠀⠀⠀⠀⠀⠀ ⠀⠀⠀⠀⠀⠀⠀ ⠀⠀⠀⠀

“수전 할머니가 매니저 같아”

“수전?”

“저 할머니 말이야"

정변이 묵묵히 생각에 잠긴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의 얼개를 세워 보느라, 머릿속이 바빠서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거실의 탁자 위에 장미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정변을 쳐다보았다.


정변의 시선이 이내 시선을 따라서 움직이더니 변명을 하듯 말을 한다. ⠀⠀⠀⠀⠀⠀⠀ ⠀⠀⠀⠀⠀⠀⠀

“세라도.”⠀⠀⠀⠀⠀⠀⠀

“장미 한 송이는.”⠀⠀⠀⠀⠀⠀⠀

“받을 자격이 있을 듯해서.”


그렇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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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송이를 들여놓은 것뿐인데, 오가는 바람만 들리던 집 같던 풍경이 변해 버렸다.

만개한 장미가 온 집안을 밝히는 불빛처럼 주변을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다 따뜻한 실내 공기는 찬바람을 헤집고 들어온 나를 포옹하듯이 감쌌다.

창피를 당한 것처럼 난데없는 훈기 앞에서 두 볼과 두 귀가 화끈거리며 빨갛게 변한 게 느껴졌다. ⠀⠀⠀⠀⠀⠀⠀ ⠀⠀⠀⠀⠀⠀⠀ ⠀⠀⠀⠀⠀⠀⠀ ⠀⠀⠀⠀⠀⠀⠀ ⠀⠀⠀⠀⠀⠀⠀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서 꽃 앞에 앉았다.

양말을 벗어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아픈 두 발을 습관처럼 소파 위에 올려 뻗었다.

피곤이 밀려오고 온몸이 노곤하니 저혈당이 도는 듯했다.

정변이 소파에 누울 자리 잡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녁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것 같았다.

체력이 약하면 염치가 없어진다.

그대로 소파에 기대서 늘어져 있었다.


명색에 보스를 이리 마구 활용하는 이곳 뉴욕 시스템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가까이서 은은하게 장미 향이 풍겨 나왔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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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한 성깔 하는 존재이다.

오롯이 아름다움 하나만으로 승부하여 생존하는 건, 이 세상에 꽃 하나이다.

아주 짧은 순간만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나비와 벌을 모아 번식하고,

그 단명하는 아름다움으로 인간에게 선택받아 재배된다.

시선을 사로잡고 계속 쳐다보게 하며 존재함으로 존재감을 뽐낸다.

피어 내기까지의 고단함도, 볼 품 없이 사라지는 스산함도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일부가 된다. ⠀⠀⠀⠀⠀⠀⠀ ⠀⠀⠀⠀⠀⠀⠀ ⠀⠀⠀⠀⠀⠀⠀ ⠀⠀⠀⠀⠀⠀⠀ ⠀⠀⠀⠀

새삼스레 진수덕 화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많은 화가들이 무수히 그려내었던 꽃을 대상으로 그리도 독특한 분위기를 내다니 말이다.

대체 얼마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그 빨아들이는 듯한 아름다운 한 가운데의 어둠을 낚아챌 수 있는지.

그런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름다움의 어두움을 그려내는 능력이 진수덕 화백의 꽃 그림을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을 지금처럼, 혼이 나간듯한 집중력으로 그려 냈을 것이다. ⠀⠀⠀⠀⠀⠀⠀ ⠀⠀⠀⠀⠀⠀⠀ ⠀⠀⠀⠀⠀⠀⠀ ⠀⠀⠀⠀⠀⠀⠀ ⠀⠀⠀⠀⠀⠀⠀

김경주 씨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던 장미가 그 꽃잎을 하나씩 초라하게 떨어뜨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김경주 씨가 그 동안 비행기표를 수소문하여 구해서, 예정보다 빠르게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와 지난번에 통화를 한 후부터 틈날 때마다 항공사에 연락을 해서 표를 구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의 좌석이 한자리 밖에 나지 않아서 남편분은 동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김경주 씨만 혼자 먼저 뉴욕으로 오게 되었다.


김경주 씨가 온다는 소식에 심란해졌다.

지난 추수감사절 무렵부터 지금까지 머물렀던 이곳 생활을 마무리 짓는 것은 홀가분한 일이다.

하지만, 그간 우리가 목격한 것은 그녀가 진술했던 내용과 많이 어긋나 있었다.

진수덕 화백과의 만남을 방해한다는 언니는 보이지도 않았고,

건강이 걱정된다던 화백은 저리도 열정적으로 작업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청난 액수의 그림값을 자랑하는 그림들은 지금 화백이 홀로 머무는 아파트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훌쩍 스케치 여행을 떠날 만큼 정정한 진수덕 화백이 딸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 ⠀⠀⠀⠀⠀⠀⠀


“돈이 많아도, 돈을 더 원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어”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에 정변이 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우리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가정사에 연루시키잖아”

"교묘하게 말이야"

정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 ⠀⠀⠀⠀⠀⠀⠀ ⠀⠀⠀⠀⠀⠀⠀ ⠀⠀⠀⠀⠀

“싸움이라도 나서, 격해지면 어떡하지?"

“진 화백은 지금 며칠째 그림만 그려서 기력이 약해졌을 텐데..”

내가 걱정을 이어가자, 정변이 답을 했다.


“건강하시던데. 뭐.”

“저 나이에는 멀쩡해 보여도, 한순간에 훅.”

정변이 나를 말끄러미 보았다.

그러더니,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반복해서 주고받았던 질문과 답을 다시 시작했다.

“세라, 우리가 왜 이곳에 왔지?”

“우리 클라이언트가 이 아파트를 Estate Sale로 사서, 그 일을 마무리하러 왔지”

“우리 클라이언트는 지금 왜 이곳에 오지?”

“그 세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보러.”⠀⠀⠀⠀⠀⠀⠀ ⠀⠀⠀⠀⠀⠀⠀ ⠀⠀⠀⠀⠀⠀⠀ ⠀⠀⠀⠀⠀⠀⠀ ⠀⠀⠀⠀⠀⠀⠀ ⠀⠀


그의 말이 맞다.

우리 명분과 역할은 단순하고 한정적이다.

그러나, 진수덕 화백은 어찌 받아들이고 반응할지 고민되었다. ⠀⠀⠀⠀⠀⠀⠀ ⠀⠀⠀⠀⠀⠀⠀


김경주 씨의 알 수 없는 속내 때문에 복잡한 가정 싸움에 말려들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정변은 그 문제는 그들의 문제고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잘랐다.

우리는 계약서에 쓰인 부분만 책임지고 행할 뿐이라면서 선을 분명히 그었다.

나 역시 맨 처음에는 그리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는 게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게 선 그리는 대로 살아지던가.

그동안 진수덕 화백을 지척에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면서 나는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피어나는 모든 것은 한 성깔 한다

#첫 번째 그림은 피카소. ' 마리 테레즈, 1937'

#두 번째 그림은 블라미르 쿠쉬. '최후의 만찬, 2009'

#세 번째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 '판도라의 상자, 1951'

#네 번째와 마지막 그림은 조지아 오키프, '소의 머리뼈와 갤리코 장미,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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