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5화) 나라는 습관
몇 번을 서로 같은 말을 묻고, 같은 말을 답했는지 모르겠다.
통화가 지속될수록, 나는 의아하고 당혹스러웠다.
계속 같은 말을 묻는 김경주 씨의 질문도 당혹스러웠고,
그녀가 당황하고 혼동스러워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그 혼돈은 질문이 거듭될수록 강하게 전해져 왔다. ⠀⠀⠀⠀⠀⠀⠀
어느 순간부터 김경주 씨는 침묵하기 시작했다. ⠀⠀
"저기.."
지속되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
“직접 오셔서, 만나시는 게 어떨까요?” ⠀⠀⠀⠀.
“언니는 안 계신 거 같은데요.”
그녀의 대답이 쉽도록 말을 덧붙였다.
"아."
김경주 씨는 예상 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침묵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던 그녀가 나에게 좀 더 아파트에 머물기를 요청했다.
계속 진수덕 화백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런던에서 이곳 뉴욕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힘 들수는 있어도, 자신이 최대한 빨리 돌아 오겠다고 했다.
나는 정변을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김경주 씨와 통화를 마치고, 정변과 나는 그대로 거실에서 앉아 있었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서, 말이 없었다.
갑자기 무언가 단순치 않은 일에 연루된 느낌이었다.
정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린 채, 거실 바닥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변이 시선을 들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 클라이언트는 김경주 씨니까."
내뱉은 정변의 말이 그가 바라보던 거실 바닥 한 곳에 떨어져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침묵 모드로 들어갔다.
맞다.
어쨌든 우리의 클라이언트는 김경주 씨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진술한 내용과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그녀가 우리를 고용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각자 할 수 있는 생각을 해 본 후에 우리는 함께 시나리오를 여러 가지로 써 볼 것이다.
그 다양한 시나리오들 중에서 대충 그림이 나올 것이고,
그 윤곽 속에서 이해가 갈리는 이쪽 편과 저쪽 편으로 나눈다.
그리고 논리와 당위의 창과 방패로 가상의 격돌을 하고 승부를 지을 것이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가사 사건이라서 결국 모두의 입맛이 쓰게 끝날 테지만 말이다.⠀⠀⠀⠀⠀ ⠀⠀⠀⠀⠀⠀⠀ ⠀⠀⠀⠀⠀⠀⠀ ⠀⠀⠀⠀⠀⠀⠀ ⠀⠀⠀⠀⠀⠀⠀
기운이 빠졌다.
어떠한 일에도 마무리를 맞이하면, 결말을 떠나 마음이 후련하다
짐을 싸고, 랭까지 챙겨서, 정변의 차를 타고,
아직도 부담스러운 맨해튼을 떠나 페어팩스로 갈 생각에 좋았었다.
그 계획이 또다시 미정이 되었다.
그 사이 저녁때가 지나고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문자로 랭에게 변경된 계획을 알리려다가,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문을 열고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 보이는 반응은 다 다르다.
주로 멍하니 늘어져 있는 나와 달리 정변은 부지런을 떠는 스타일이었나 보다.
모든 점에서 나와는 극단의 대척점에 서 있는 정변다운 일이다.
정변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쓸고 닦았다.
쓸고 닦다가 더 쓸고 닦을 것이 없으면, 쓸고 닦다가 더러워진 자신을 씻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한 사이클이 끝날 때마다, 늘어져 있는 나를 찾았다.
그러고는 김경주 씨와 진수덕 화백의 관계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고 갔다. ⠀⠀⠀⠀⠀⠀⠀ ⠀⠀⠀⠀⠀⠀⠀ ⠀⠀⠀⠀⠀⠀⠀ ⠀⠀⠀⠀⠀
부엌과 거실을 돌고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정변이 청소까지 하고 나왔다.
긴 시간 화장실을 참은 내가 볼 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동안 생각한 시나리오 하나를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시나리오는 물론 끝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내게 까였다. ⠀⠀⠀⠀⠀⠀⠀ ⠀⠀⠀⠀⠀⠀⠀ ⠀⠀⠀⠀⠀⠀⠀ ⠀⠀⠀⠀⠀⠀⠀
“정변”
“응”
“아무리 생각해도, 정변은 강박이야”
“음”
강박을 예전에 이미 말한 적이 있던가.
어려운 말인데도 알아듣는 투다.
“그만 좀 사부작사부작해”
“왜?”
“옆에 게으른 사람 죄책감 느끼니까”
“안 느끼면서.”
“헐”
몸 움직이는 걸 겨우 말려 놓았더니,
그 다음에는 노트북을 펴고 머리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색이었다.
이 모습은 사무실에서 많이 본 장면으로, 조만간 나랑 주거니 받거니 논쟁을 연습하러 들 것이다.
노트북에 코를 박고 진수덕 화백의 예술세계를 탐험하는 정변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슬그머니 일어나서 집을 나왔다.
이미 하루 분의 기력을 소진한 기분이 들어서, 정변을 피해 일층으로 내려갔다. ⠀⠀⠀⠀⠀⠀⠀ ⠀⠀⠀⠀⠀⠀⠀ ⠀⠀⠀⠀
일층은 여전하였다.
파티룸의 할머니들은 카드 삼매경에 빠져 있고 로비는 한가했다.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추운 겨울 거리를 내다보았다.
아무리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맨해튼이라도, 상가가 없는 이곳 골목은 사람들이 드물었고,
오직 바람만이 빈 거리의 주인이 된 것처럼 그득했다.
그동안 혼자 있었던 시간이 그리웠는지, 인적 드문 빈 골목이 반가웠다. ⠀⠀⠀⠀⠀⠀⠀ ⠀⠀⠀⠀⠀⠀⠀ ⠀⠀⠀⠀⠀
나는 바깥 골목으로 향한 창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그림을 구경하듯 내다 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짧은 겨울 해가 그 새를 못 참고 저물었다.
그때였다.
진수덕 화백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파티룸으로 향했다.
몸을 일으켜서 화백을 따라 파티룸으로 갔다.
펑퍼짐한 검정색 배기바지를 입은 진 화백은 손에 지폐가 쥐어져 있었다.
진수덕 화백이 수전을 찾았다.
늘 같이 담배를 피우던 할머니의 이름이 수전인듯하다.
파티룸의 할머니들이 수전이 없다고 대답하니, 진수덕 화백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린다.
나는 진수덕 화백에게 다가서서,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다. ⠀⠀⠀⠀⠀⠀⠀ ⠀⠀⠀⠀⠀⠀⠀ ⠀⠀⠀⠀
돌아서 나를 바라보던 진수덕 화백이 퍼뜩 생각이 난듯이 물었다.
“장미꽃 좀 사다 줄 수 있어?”
“장미요?”
“응, 활짝 많이 핀 놈으로, 겁나 화려한 놈으로..”
"다녀올게요"
망설임없이 얼른 대답하였다.
진수덕 화백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지폐를 건네주는 그녀의 손이 온통 물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돈을 펼쳐 보았다.
백 불짜리가 두 장 있었다.
정변을 불러 내렸다.
벼락같이 내려온 정변에게 최적의 보직인 마당쇠 역을 맡기고, 우리는 장미 쇼핑에 나섰다.
우리는 내내 김경주 파와 반 김경주 파로 나누어, 어찌 된 일인가를 추측하고 논쟁하였다.
질 것 같은 편에 서서 논리를 세우는 걸 정변은 즐긴다.
이번 케이스에서 그는 김경주 파였다.
그런 정변을 불러서 대가의 작품에 크게 공헌하는 꽃 심부름의 영광을 나눠주었다.
대가도, 대가의 편도, 대인배이다.
꽃을 사러 나서기 전에, 정변과 나는 맨해튼에 있는 수많은 꽃집들을 검색했다.
아무리 겨울이고, 아무리 맨해튼이라고 해도, 이백 불로 살 수 있는 장미의 수는 많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 전철로 미드타운으로 가서 내리기로 했다.
그곳에서부터 집으로 걸어오면서 근처에 있는 꽃집들을 훑기로 했다.
각 꽃집에서 가장 크고 좋은 것으로만 몇 송이씩 사기로 했다. ⠀⠀⠀⠀⠀⠀⠀
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정변은 꽃다발을 들고 내 앞에 서서 인파를 헤쳐나갔다.
나는 그의 뒤에서, 그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얼마 지나서 돈이 떨어져 갔고, 꽃이 그것에 비례하여 많아졌다.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함께 걷던 정변을 쳐다보았다.
무쇠 팔과 무쇠 다리에 붉은 장미꽃을 잔뜩 들고 있는 그의 조합은
맨해튼 거리 한가운데에서도 역시 튀었다.
그가 내 시선을 느끼는지, 꽃다발 사이로 얼굴을 갸웃하며 나를 쳐다본다. ⠀
나는 그와 마주친 시선을 눈동자만 옆으로 돌리면서, 대 놓고 딴청을 했다.
예전부터 그가 내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찾아와서 말을 걸면 주로 쓰는 방법이었다.
정변이 풋 하고 웃었다.
“쎄라”
정변이 꽃다발 사이에 얼굴을 끼고 나를 불렀다.
"응”
“내가 페어팩스에서 전화했을 때, 뭔가가 missing 한 거 같다고 했지?”
“어”
“그게 이런 거야”
“뭐?”
“지금 같은 거”
“지금?”
“어, 뭔가 팀워크로 함께 하면서, 막 긴장되고 뭔가 하고 이런 건데. 방금처럼 세라가 날 쳐다보면서, 뭔가 나를 놀리려고 노리는 거 말이야."
“아.”
“다른 사무실에서 일하면 다들 좋은 말만 해줘. 나한테.”
“다른 데서는 잘하는가 보지?”
“그들은 좋은 코멘트만 하는데, 그 코멘트가 거짓말이 아닌데도 허전했어. 그래서, 세라의 말이 그리웠어. 세라의 한숨도.”
“즐겼구나”
내 대답을 듣는 장미꽃 사이에 묻힌 정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이다.
바보가 따로 없다
#부지런한 사람은 걸어 다니는 죄책감 제조기
#세상은 그들의 것
#가지라우
#첫 번째, 두 번째 그림 피카소
#세 번째 그림은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