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4화) 나라는 습관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왔다.
오늘은 랭이 시험을 끝내는 날이라, 저녁을 먹으러 올 것이다.
이제 이곳 생활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으니, 랭과 저녁을 같이 먹을 일상도 곧 끝날 것이다.
랭이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하기로 했다.
정변이 있으니 배달 걱정이 없어서, 안심하고 닭과 야채를 넉넉히 살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가지고 온 물건들을 채 풀기도 전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을 울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습관을 가진 랭이었다.
길고도 고단했던 박사 과정의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난 랭의 표정이 곧 날아갈 듯 하였다.
전보다는 수척해졌지만, 그 사이 샤워까지 새로 한 깔끔한 얼굴에는 윤기가 흘렀다
아직 젖은 머리를 연신 만져대는 랭에게서 설렘이 느껴졌다.
랭이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게 건넸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 딸기 한 팩, 초콜릿 시럽이 한통 들어 있었다.
계획을 바꿔서 저녁으로 먹으려던 닭을 점심에 해서 먹기로 했다.
지난밤에도 늦게까지 공부했을 랭이 그전에 쓰러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변과 랭을 좁은 부엌으로 밀어 넣고 이것저것 시키면서 나는 양념장만 만들었다.
그들은 식탁의 한 코너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감자를 까고 양파를 깠다.
식사가 끝나고 모두 다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을 때, 랭에게 앞으로 우리의 일정에 대해 알렸다.
이곳에 일이 마무리가 되어서, 우리가 페어팩스로 곧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예상대로 랭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랭에게 우리가 이곳에서 철수할 때, 모두 다 같이 정변의 차를 타고 페어팩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어차피 랭도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패어팩스의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생중계하는 랭의 얼굴이 내 제안에 다시 밝아졌다.
나는 그런 랭의 표정이 가장 잘 보이는 각도에 앉아서, 그녀를 보았다.
랭이 표현하는 감정들이 그녀를 참 풍요롭게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나타나는 시시각각의 그녀의 감정들 하나하나가 부러웠다.
랭은 표정 부자다.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드러내는 일은 스스로에게 손해를 초래하는 일이라며,
내 희로애락을 안으로 감추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지혜로 믿고 단련해 왔는데,
랭을 보면, 그 믿음에 균열이 가곤 했다.
거리낄 것 없이 만드는 그녀의 표정들이 랭을 험한 세상 안에서도 꿋꿋하게 보이고,
당당하게 만들며, 더욱 사랑스럽게 하였다.
랭의 표정은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고 ,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마구마구 사는 진정한 부자보다도
훨씬 더 부유해 보였다.
랭처럼 저렇게 얼굴에 내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적이 언제였던가 까마득하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안전하긴 했다.
상황이 어찌 되어도, 내 감정을 들키지는 않으면, 충격이 완화되었다.
내 희로애락은 내 것이기만 하면 되었다.
타인에게 알려서, 그 감정들마저 객관화되고, 그들의 훈계의 대상이 되는 듯한 것을 견디기 힘이 든다.
특히나, 가족이라도 알면, 자신들의 염려와 걱정이 보태져서 복리이자로 돌아 온다.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구인지도 잊어 먹을 만큼, 그 때는 내가 그들의 공포를 달래 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염려라는 이름의 집요한 평가를 감내해야 한다.
무참한 팩트로 토막토막 잘라져 나가는 내 감정에 대한 값매김은 파력력이 세서,
아픔을 넘어선 참혹함이 있다.
감정은 언제나 진행 속도가 한 발짝씩 느리다.
사랑같이 좋은 감정들은 상대를 알아 보는 안목도 없고, 상대가 그럴만한 대상이 아닌 것을 알아도,
한번에 쉬이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을 숨기기로 했었다.
그렇게 숨기기 시작하니까 나마저도 익숙해졌다.
그러다 어떤 감정이 진짜인지,
내가 무얼 느끼는지도 모르게 무감각해져 갔다.
나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랭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퍼서 딸기를 썰어 얹고, 초콜릿 시럽까지 뿌려 디저트로 내어 왔다.
"여기 삼합"
"삼합?"
정변이 한국말 중에 모르는 것이 나왔다.
영어와 한국어 중에 모르는 단어나 문화콘텐츠가 나올 경우, 우리는 서로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한다.
"한국요리 중에..."
홍어와 수육, 그리고, 묵은지까지 삼합의 구성요소를 돌다 보면 아이스크림은 녹고 없을 것이다.
"몰라. 설명이 길다. 다음에 해줄게"
정변이 발끈했다.
"세라. 컴 온. 왜 설명을 하다가 말아. 길어도 해"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면서, 내게 계속 질문을 구하는 자의 당당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려줄 사람은 세라밖에 없어. 세라는 지금 이 테이블에 한국 문화 대사라고."
정변이 이리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그래, 정변은 새해에 계획이 뭐야?"
화제부터 바꾸고.
"새해 계획?"
"응. 프로페셔널한 거는 말하지도 말고, 뭐 기필코 장가를 갈 거라든지. 그런 사적인 걸로 말해봐."
랭의 눈에서 무언가가 반짝했다.
"사적인 거를?"
"그래, 사적인 거. 제발 네 정치적 계획 같은 건 말하지 마라. 나 나간다. 밖에 추운 거 봤지?!"
"사적인 거를 왜 말을 해?"
"궁금하니까. 너의 한국인 코 워커이자 이 테이블의 한국대사가 한국인 스몰토크의 정석을 따르고 있어. 협조해 줄래?"
랭의 눈동자가 핑퐁 공을 보는 관객처럼 정변과 나를 따라다녔다.
"뭐가 궁금할까?"
"뭐긴. 너의 그.. 스펙트럼.. 넓.."
두 팔을 양옆으로 올려서 그가 만난 여자들의 스펙트럼 넓음을 표시하려다가,
팔을 다시 내리고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먹으면서 물었다.
"이제는 정착 아니 취향을 정할 때가 되지 않았어?"
"내 여자 친구를 묻는 거야?"
그럼 내 여자 친구겠니.
"이미 헤어진 사람은 언급 말고,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말해봐. 혹시 알아? 내가 어떻게든 구해 줄 수 있는지"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랭을 힐끗 보았다.
"Thank you, Serah but, No thank you."
"아? 왜?"
"난 내 취향이 확실히 있고.."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새.. 또?"
랭과 나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정변을 쳐다보았다.
정변은 그릇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싹싹 긁어먹고 있었다.
정변이 김경주 씨에게 전화를 한 건, 랭의 동그란 얼굴을 기다랗게 늘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였다.
뭐라 아는 척하기도, 모른 척하기도, 어정쩡해서 말없이 돌아가는 랭의 어깨를 감싸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나중에 페어팩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 여섯 시간 동안 내내 정변을 심문하여 진실을 알아내자고 나는 수선을 떨었다.
랭은 내 말을 묵묵히 들었다.
랭을 보내고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정변이 부엌을 정리하고 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조금 전에 대화 내용에 대해 물으려 들었지만,
정변은 이미 공적인 보스의 모습으로 모드를 전환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소파로 가서 앉더니, 김경주 씨와 통화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다가 가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변은 내가 정리해 온 파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난 11월부터 지금까지 이곳에 와서 한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
일의 목록과 사용된 시간, 그리고, 물품들을 기증하고 받은 수령증 등을
순서대로 정리해서 파일을 만들고 프린트를 해 놓았다.
정변이 김경주 씨에게 통화가 가능한 지를 묻는 텍스트를 보냈다. ⠀⠀⠀⠀⠀⠀⠀ ⠀⠀⠀⠀⠀⠀⠀ ⠀⠀⠀⠀⠀⠀⠀
얼마가 지난 후에 김경주 씨와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녀는 지금 런던에 있는 딸을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가벼운 인사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변이 김경주 씨에게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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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하는 그의 옆에 있다가 일어서서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겨울 한낮의 햇빛이 강을 데웠는지, 허드슨 강이 따사롭게 한가하게 흐르고 있었다.
명료하게 진행되던 정변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주위가 잠잠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정변이 상대방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도 가만히 눈을 들어 내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상대방의 말을 듣기만 한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무슨 일이냐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정변이 세라가 지금 옆에 있는데, 직접 통화를 하시겠냐고 물었다.
정변이 전화기를 내게 건넸다.⠀⠀⠀⠀⠀ ⠀⠀⠀⠀⠀⠀⠀ ⠀⠀⠀⠀⠀⠀⠀ ⠀⠀⠀⠀⠀⠀⠀ ⠀⠀⠀⠀⠀⠀⠀ ⠀⠀⠀⠀⠀⠀⠀
“세라? 그게 사실인가요?”
“네, 안녕하세요. 뭐를 말씀..”
김경주 씨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끝이 갈라지고 쉰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엄마가 그림을 그리시더라는.”
“네? "
뭐가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직접 그림을 그리시는 걸 보았나요?"
목소리에서 상기된 감정이 느껴졌다.
정확히 진술해야 한다.
"저기, 제가 정확히 그림을 그리는 그 현장을 보지는 못했고요.”
“네.”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보았어요.”
“아.”
목소리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저는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커피 한 잔만 얻어 마시고 나왔어요.”
“커피? 커피요???”
“네,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라면서, 저도 한잔 주시던데요. 제가...”
“엄마..가요??”
끝에 있는 말이 올라 가면서, 김경주 씨가 쇳소리를 내었다.
“제가 김치를 가져가서.."
내 말을 끊고, 김경주 씨가 다시 물었다.
“엄마가 커피를..? 엄마가 커피를.. 세라에게 만들어 줬다는 거죠?”
“네.”
“그럴 리가.. 엄마가 커피를..” ⠀⠀⠀⠀⠀⠀⠀ ⠀⠀⠀⠀⠀⠀⠀ ⠀⠀⠀⠀⠀⠀⠀ ⠀⠀⠀⠀⠀⠀⠀ ⠀⠀⠀⠀⠀ ⠀⠀⠀⠀⠀⠀⠀
반복적으로 커피와 커피를 마신 거를 물어보는 김경주 씨의 질문에,
나는 계속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힐끗 정변의 얼굴을 보니, 네모난 얼굴이 온통 심각이라고 낙서되어 있었다.
#글은 제 창작물이고
#첫 번째 그림은 프리다 칼로
#두 번째 그림은 폴 고갱
#세 번째 그림은 빈센트 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