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통수를 너에게 내어 줄 때

(소설 23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변호사가 맞는 뒤통수 중에 가장 흔하고 아픈 것은 대부분 자신의 클라이언트에게로부터 온다.

모든 의뢰인은 재판에서 이기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로 변호사에게 의뢰하지만,

모두 각각 다른 방식으로 변호사를 활용한다. ⠀⠀⠀⠀⠀⠀⠀ ⠀⠀⠀⠀⠀⠀⠀ ⠀⠀⠀⠀⠀⠀⠀ ⠀⠀⠀⠀⠀⠀⠀ ⠀⠀⠀⠀⠀⠀⠀

변호사를 마법사로 알고, 전지전능하게 모든 걸 헤쳐 나가길 바라는 의뢰인은

그나마 단순하고 순진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한 유형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제공하고 철저하게 자기가 잘못한 일은 숨겨서,

법정에서 자신의 변호인을 상대방에게 기습당하게 하는 경우가 가장 흔한 케이스다.

그럴 경우에 대부분의 의뢰인들은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왜 그걸 논리로 못 뒤엎었냐면서 화를 낸다.


그들은 오만가지 이유로 말을 안 한다.

변호사 앞에서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까 민망해서, 또는, 그 잘못때문에 도리어 자신의 변호사에게 약점으로 잡힐까바, 혹은, 그들만의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비밀로 부친다.

그런 결정적인 증거에 대해서 자신이 언급하지 않아도, 변호사가 탐정처럼 알아서 눈치채길 바란다.

직접 자신의 실수를 고하여서, 자신의 면이 떨어지는 일 없이, 알아서 그 정도는 처리하길 바란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귀신같이 처리하는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의무도, 여력도 없다.

그런 의뢰인은 자신이 그렇게 철저히 숨겨 놓고도,

법원에서 나온 선고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영문 모르고 나가서, 무방비한 채로 역습을 당한 변호인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변호사가 무능해서 재판에 졌다는 것처럼 흔한 변명은 없다.

마법사 이론보다 훨씬 더 피곤하지만, 의뢰인이 가장 많이 쓰는 변호사 활용법이다. ⠀⠀⠀⠀⠀⠀⠀ ⠀⠀⠀⠀⠀⠀⠀ ⠀⠀⠀⠀⠀⠀⠀ ⠀⠀⠀⠀ ⠀⠀⠀⠀⠀⠀⠀

변호사들은 경험이 많아지고 이력이 늘어날수록,

의뢰를 하는 클라이언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듣지 않는다.

들으면서 대충 알아가며 깎아서 듣는다.

진실을 말하는 의뢰인도 없고, 진실에 관심 있는 변호인도 없어지는,

그런 흔한 변호사와 의뢰인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 ⠀⠀⠀⠀⠀⠀⠀


김경주 씨는 어떤 의뢰인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녀 정도의 재력이면, 변호사를 장기판 위에 말처럼 사용하는 의뢰인이다.

홀로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그 일부의 역할을 우리 로펌에 의뢰한 것이다.

그 커다란 그림이 어떤 것인지 대해서는 그녀가 우리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저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면 되는 것이다.


정변과 나는 각자 생각에 잠겼다. ⠀⠀⠀⠀⠀⠀⠀ ⠀⠀⠀⠀⠀⠀⠀ ⠀⠀⠀⠀⠀⠀⠀

“세라, 화백의 집안에 그림이 많아?”


정변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아파트 한쪽 벽에 채곡하게 세워졌던 캔버스들이 생각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 패어팩스에서 진수덕 화백에 대하여 검색했을 때,

그녀가 더 이상 그림을 내다 팔지 않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진수덕 화백의 그림은 연로해진 화가의 연령과 더불어 희귀성이 높아져서,

그사이 그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시중에는 화백 그림을 모작으로 그린 것도 적지 않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했다.

진수덕 화백의 그림 한 장이면, 지금 우리가 머무는 아파트를 하나 사고도 남는 돈이다. ⠀⠀⠀⠀⠀⠀⠀ ⠀⠀⠀⠀⠀⠀⠀ ⠀⠀⠀⠀⠀⠀⠀ ⠀⠀⠀⠀⠀⠀⠀

“정변, 그런데 김경주 씨는 엄청 부자잖아”

정변과 나는 눈을 마주치고는 둘이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더하면 더했지, 부자라고 다르지 않다는 건, 인간의 소송의 역사가 기록하여 증명하고 있다. ⠀⠀⠀⠀⠀⠀⠀ ⠀⠀⠀⠀⠀⠀⠀ ⠀⠀⠀⠀⠀⠀⠀ ⠀⠀⠀⠀⠀⠀⠀

“이정선 씨는 본 적이 있어?”

중요한 걸, 정변이 묻는다.


“아니”

언니 이정선 씨가 맹렬하게 진수덕 화백와 김경주 씨가 만나는 걸 막았다고 했다.

이정선 씨는 엄마랑 늘 함께 하면서, 진수덕 화백의 일상을 통제한다고도 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근본적인 의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


“이정선 씨가 진짜 그랬을까? 아니, 이정선 씨가 여기 있기는 할까?” ⠀⠀⠀⠀⠀⠀⠀ ⠀⠀⠀⠀⠀⠀⠀ ⠀⠀⠀⠀⠀⠀⠀

같은 뱀이 정변의 머릿속에도 똬리를 트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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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긴 정변의 수북한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창이든, 방패든, 둘 중의 하나를 기질로 타고난다.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는 사람은 디테일하게 처리하고 벌린 일을 수습하는 것에 약하고,

디테일하고 마무리 수습을 잘하는 사람은 무얼 앞서 나가며 진행시키지 않는다.


나는 방패형 인간이다.

내게 벌어진 일을 감당하고 받아들인다.

아주 가끔은 선을 긋고 쳐내기도 하지만, 냉정함과 단호함이 약하다.

내가 그은 선은 상대에게 질척거릴 공간을 많이 내어 준다. ⠀⠀⠀⠀⠀⠀⠀ ⠀⠀⠀⠀⠀⠀⠀ ⠀⠀⠀⠀⠀⠀⠀ ⠀⠀⠀⠀⠀⠀ ⠀⠀⠀⠀⠀⠀⠀

정변은 창과 방패를 균형적으로 가진 드문 인간형이다.

먼저 치고 나가면서도 자신의 저지른 일의 뒤처리를 스스로 수습한다.

그렇게 오지랖 넓게 일을 벌이고 다니는데도,

내가 구시렁만 거리지 크게 탓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속 없는 일에 연루되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선을 명확하게 그어서,

상대도 본인도 헷갈리지 않게 정리한다.

같은 결론을 내리고도 발을 제때에 빼지 못하는 나와 달리,

정변의 선은 상대방에게도 정확하게 같은 의미의 선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마무리는 짧고 명확하며 매끄럽다.

그걸 두고, 나는 정변을 늘 허허실실 사람 좋은 듯하지만,

이익 앞에 차가운 진정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좋은 예라고 불렀다.


김경주 씨의 케이스 역시 그가 적정한 선에서 우리의 역할을 한정 짓고 발을 뺄 것이다.

물론 상대에게도 큰 불만이 없을 만큼의 필요한 정보를 적당히 안겨줄 것이다.

스펙트럼이 넓은 진수덕 화백의 가정사에서 맡은 장기판 위에 말로서의 역할은

정변이 그은 선으로 정리되리라.

그랬기에 거실에 생각에 잠긴 그를 남겨 두고 내 방으로 향했다.

긴 하루였기에 금방 잠이 들었다. ⠀⠀⠀⠀⠀ ⠀⠀⠀⠀⠀⠀⠀ ⠀⠀⠀⠀⠀⠀⠀ ⠀⠀⠀⠀⠀⠀⠀ ⠀⠀⠀⠀


아침에 정변이 요리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그대로 그냥 누워 있었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은 어째 죄다 아침형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마에 주름을 그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침대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온 집안에 가득한 커피 내음이 나보고 일어나라며 꼬셔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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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이 샤워까지 깔끔히 마친 얼굴로 토마토와 계란을 볶아 중국식 오믈렛을 만들고,

커피를 내려서 상을 차려 놓았다.

부스스한 얼굴로 그대로, 테이블에 털썩 앉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정변이 내 앞에 오믈렛 접시를 들이밀었다.

조금 들어 맛을 보니 괜찮다. ⠀⠀⠀⠀⠀⠀⠀ ⠀⠀⠀⠀⠀⠀⠀ ⠀⠀⠀⠀⠀⠀⠀ ⠀⠀⠀⠀⠀⠀⠀


“맛있네”

그가 으쓱하는 표정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다시다 넣었지?”

그가 조금 뿜었다.

얼른 티슈로 테이블을 닦더니, 열심히 떠먹는 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하게 말을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층에 있는 짐으로 운동 가면서, 진수덕 화백의 집을 보았단다.

그때까지도 현관문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 불빛은 한 시간 뒤에 돌아와 있을 때도 켜져 있었고, 샤워를 하고 난 뒤에도 그대로였다가,

내가 나올 때 즈음에야 꺼졌다고 한다. ⠀⠀⠀⠀⠀


“대단한 체력이셔”

“응”

“언제 김경주 씨한테 연락할 거야?”

“오늘 중”

“언제 우린 철수할 거야?”

“통화하고 난 뒤 알겠지”

“이젠 뭐해?”

“산책”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있을까.” ⠀⠀⠀⠀⠀⠀⠀ ⠀⠀⠀⠀⠀⠀⠀ ⠀⠀⠀⠀⠀⠀⠀

그가 내 말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하면서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하였다. ⠀⠀⠀⠀⠀⠀⠀ ⠀⠀⠀⠀⠀⠀⠀ ⠀⠀⠀


정변의 머플러를 얼굴에 감고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둘이 걷는 발길이 루틴처럼 전 남편과 내가 살았던 집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그 길을 나란히 걸으며, 예전에 같은 사무실에 근무했던 박변을 떠 올렸다.

한번의 긴 연애가 실패로 돌아 간후, 숱하게 여자들을 갈아치우던 박변이었다.

그는 늘 긴 시간 자신의 연애사가 소북히 쌓은 장소들로,

각각 다른 여인들을 데리고 가서 데이트를 했다.

그가 여자들과 그 장소들로 가기로 약속을 하고, 또 다녀와서 올리는 SNS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그런 박변의 모습에 놀랐었다.

수년간 지켜보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건 앞에 보여 주었던 그의 현명한 처신과는 달리,

감정따위는 없는, 나는 죽어도 이해 못할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무지하게 게으르거나,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박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비록 정변의 강요가 있긴 했지만, 이리 이 집 앞을 무수히 지나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장소란 새로운 경험으로 쉽게 덧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수히 아픈 기억을 가졌던 곳이라도 말이다.

이제 전 남편과 내가 살았던 집앞의 거리는 정변과 정변의 긴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나의 산책으로 희석될 것이다.


걸음이 전 남편이 사는 집에 가까워졌다. ⠀⠀⠀⠀⠀⠀ ⠀⠀⠀⠀⠀⠀⠀ ⠀⠀⠀⠀⠀⠀⠀ ⠀⠀⠀⠀⠀⠀⠀

“괜찮아. 이제.."

"괜찮아진 거 같아. 이 길.."

내가 중얼거렸다.

“세라, 여자가 괜찮다고 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지?”

“응”

“그런데, 나는 왜 세라가 괜찮다고 할 때마다,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는 걸로 들릴까?”

“글쎄.”

나는 고개를 돌려 정변을 보았고, 정변은 앞으로 향했던 그의 시선을 그대로 두고 걸었다.

내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을만큼, 그의 시선은 굳건했다



#어떤이는뒤통수달인

#어떤이는맞는거달인

#죄다_뒤통수성애자

#그림은 모두 르네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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