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

(소설 22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점심을 먹고 우리는 한인타운이 있는 32가로 향했다.

입구도 좁고 공간도 좁은 가게 안이 한국 식료품으로 빼곡했다.

정변은 그 덩치로 비좁은 가게 안을 잘도 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뽑아 왔다.

날아다니는 그를 구경하면서, 랭에게 텍스트를 보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정변이 지금 맨해튼 한인마트를 거덜 내고 있으니, 위장을 비워 놓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그가 물건을 쌓을 때마다, 랭에게 메뉴를 알리는 텍스트가 늘어갔다.

랭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처럼 답장으로 왔다.

정변은 곡물계의 큰 손이었다.

현미 15파운드와 백미 15파운드짜리를 사서 각각 하나씩 팔에 걸치고,

갖은양념을 사서 양손에 들었다.

그리 싫은 티를 내어도 외면하다가, 마침내 내가 째려보기 시작하니,

슬금슬금 작은 사이즈로 바꿔 온 것이 이 정도이다.

그나마 선방한 셈이다.


크리스마스 휴가철을 맞은 맨해튼은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어디나 넘치는 사람들을 헤치며, 쇼핑한 물건들을 둘이서 이고 지고 전철을 탔다.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일상에서 퇴근하는 인파가 뒤얽혀서, 전철 안은 다양한 삶의 모습의 향연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런 스펙트럼 넓은 곳에서도, 복면가왕처럼 머플러를 둘러싼 나와 쌀가게 아저씨인 정변에게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쏟아졌다.

애써 외면하는 나와 달리 정변은 개의치 않은 듯 싱글벙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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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나 대학 다닐 때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한 거 알아?”

“몰라”

“나 요리 잘해. 많이 배웠거든.”

“그래서, 다시다 산 거야?”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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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집에 풀어놓고 나니, 나는 완전 방전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때마침 랭이 도착하였다.

늘 하나로 질끈 묶고 다녔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번도 입은 걸 본 적 없던 옷을 입고, 랭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기꺼이 랭에게 모든 걸 넘겼다.

요리 준비도.. 정변도.. ⠀⠀⠀⠀⠀⠀⠀ ⠀⠀⠀⠀⠀⠀⠀ ⠀⠀⠀ ⠀⠀⠀⠀⠀⠀⠀

항상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두 캐릭터와의 식사는 맛있고 대화는 즐거웠다.

두 사람은 끝없이 페어팩스 사람들의 안부와 이야기로 꽃을 피워냈다.

뭐든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나와는 달리, 랭은 정변의 말에 열렬히 반응했다.


나는 그 둘을 테이블에 두고,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서 정변의 어머님의 김치통을 열었다.

식자재가 담겼던 플라스틱 그릇을 하나 찾아서 깨끗이 비우고, 그곳에 김치를 덜어 담기 시작했다.

정변의 어머니가 뒷 뜰에서 직접 길렀다는 총각무와 파로 만든 김치는 훌륭했다.

총각무는 작았지만 달았고, 이파리가 부드럽고 많았다.

그런 무를 역시 잔잔한 쪽파랑 섞어 담근 김치는 가게에서 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맛이 있었다.

정변에게, 아니, 정변 어머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넉넉히 담은 김치 그릇의 뚜껑을 덮었다.

김치를 들고 나와 진수덕 화백 아파트를 향해서 갔다.

아파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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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번의 노크를 하자마자, 진수덕 화백이 문을 열고 나를 맞았다.


저녁을 먹고도 한참 지난 시간인데, 완벽하게 꾸미고 밤 외출을 막 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얗고 반듯한 이마 아래로 가느다란 눈썹을 길게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이 단정하게 발라져 있었다.

넓고 반듯한 하얀 이마 위로는 화려하고 강렬한 표범 패턴의 헤드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검은색 배기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큰 키에, 머리카락을 한 올도 안 내리고 다 감아서 헤드 스카프에 넣고는,

생각을 알 수 없는 컴컴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 ⠀⠀⠀⠀⠀⠀⠀ ⠀⠀⠀⠀⠀⠀⠀ ⠀⠀⠀⠀⠀⠀⠀ ⠀⠀⠀⠀⠀⠀⠀ ⠀⠀⠀⠀⠀⠀⠀

김치통을 손에 든 채로 그녀를 방해한 것 같은 생각에 내가 머뭇거리는데,

진수덕 화백이 마침내 말을 꺼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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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시작하기 전이네”

"아.."

잠시 머뭇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잠깐 들어올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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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꼿꼿한 자세로 진수덕 화백이 입구의 문을 열어 둔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닫으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말한 대로 그림을 그리려고 준비를 하던 참이었나 보다.

진수덕 화백의 거실은 거실이라는 용도보다 커다란 작업실로 쓰이고 있었다.

거실 바닥은 그림에 필요한 도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았다.

그 헤아려 질 것 같지도 않을 만큼의 다양한 색깔의 물감과 수십 가지의 붓들이,

물감을 개어 놓을 용도로 쓰일 것 같은 켜켜이 쌓인 크고 작은 하얀 접시들과 함께,

텅 빈 거실을 가득 채우며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빈 캔버스가 바닥에 놓여 있었고,

그 양옆으로 스케치한 그림들이 둘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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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덕 화백의 집은 내가 지금 머무는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였다.

그러나, 내부는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집 같았다.

코너에 위치해서 커다란 두 벽이 모두 창으로 되어 있고, 그 창 너머로 강이 보였다.

어둠 속 강은 도시의 강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표정을 보여 주는 것처럼 흘렀다.

컴컴한 하늘이 기색을 바꿀 때면, 강도 거기에 대응하듯 얼굴을 바꾸며 서로 보조를 맞추었다.

건물에서 흘러내린 불빛이 강 위에서 창백한 별처럼 파르르 빛나기도 했지만,

어느 한 표정도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번들거리는 강물이 마음만 먹으면 그 수위를 높여서,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 안으로도 범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강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골목으로 몰려다니면서 두 창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창틈 곳곳으로 바람소리가 들어오는데도, 아파트 안은 무척 따뜻했다.

온 아파트를 연극 무대의 조명을 설치하듯이 구석구석 환하게 등을 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 빛에서 나는 열기와 묘한 집 분위기로 온 집안이 후끈했다.

그 뜨거움 때문인지 온갖 화초들이 이 겨울에도 화백의 집안 곳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화분마다 거꾸로 꽂힌 링거병을 최소한 하나씩 달고,

온 힘을 다해 맹렬하게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집은 압도적이고, 밀도 있었다.

진수덕 화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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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시작하려 했다고 진수덕 화백이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며, 내게 묻지도 않고 커피를 두 잔을 가져왔다.

커피를 두고 마주 앉은 진수덕 화백은 눈이 아까보다 더욱 더 컴컴하게 짙어졌다.


아무 말 없이도 상대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눈길을 보내는 그녀를 보니,

이미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둠이 강 위로 존재감을 비추며 끊임없이 집안으로 넘실넘실 들어왔다.

검은 기운을 온 집안을 빼곡히 채운 불빛들이 포옹하면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 ⠀⠀⠀⠀⠀⠀⠀

진수덕 화백은 천천히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단정하게 화장을 한 얼굴에 끝 모를 어둠을 간직한 성성한 눈빛까지 더해져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꿰뚫어 보는 시선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는데도, 나를,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화백에게 지난번에 길가에서 도와준 일에 대한 사의를 표했다.

진수덕 화백은 조용히 별거 아닌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진화백은 이내 잠잠한 시선을 들어서 내 뒤에 빈 캔버스에 고정시켰다.


마음이 온통 그림에 쏠리는 듯 보였다.

진수덕 화백의 몰입을, 대가의 작업을 내가 방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올 때에도 진화백은 말이 없었다.

문을 닫으며 돌아보니, 그녀가 홀린 듯이 창가 앞의 그림도구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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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아파트에는 정변이 홀로 부엌을 정리하고 있다.

랭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게 어디 갔었냐고 묻는다.


“랭은?”

“시험 볼 게 한 과목 남았다고 해서, 얼른 가서 공부하라고 했어”

“좀 바래다 주지”

“괜찮대”

“정변, 여자가 하는 괜찮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했어.”

“이 경우에는 어떤 괜찮다는 뜻일까?”

“괜찮다. 괜찮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그의 반응에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 ⠀⠀⠀⠀⠀

내 한숨소리에 이번에는 정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내가 어디 있었는지 재차 물었다.

나는 정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동안 경황이 없어 정변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사실이 생각났다.

길거리에서 맨 처음 진수덕 화백을 마주친 이후로, 계속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점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 ⠀⠀⠀⠀⠀⠀⠀ ⠀⠀⠀⠀⠀⠀⠀ ⠀⠀⠀⠀⠀⠀⠀ ⠀⠀⠀⠀


“정변, 우리 케이스 말이야."

“뭔가 김경주 씨가 착각을 한 거 같아.”

“아니면, 자기 의도를 우리에게 숨기고, 다른 목적이 있든지.”

정변이 한쪽 눈썹을 올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따라가서 그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맨해튼에 도착한 후부터 지금껏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진수덕 화백에 대한 일들에 관해서.

또한, 이제 와서 의심스럽게만 느껴지는 김경주 씨의 의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괜찮다는말은_안괜찮다는말

#그러니괜찮다는말_안나오게하기

#첫번째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The sick child,1923 '

#두번째와 세번째 그림은 러시아 은유적 현실주의 화가. 블라미르 쿠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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