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형 인간관계

(소설 21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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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에 밤에 이리 깊이 자는 것인지.

오래도록 깜깜하게 든 잠이 깊고도 달았다.


언제부터였는 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잠을 쉬이 들지 못하고, 얇게 자며, 자주 뒤척이면서 쉽게 깼다.

그런 수면습관이 이 곳에 온 후로는 더욱 나빠져서, 잠다운 잠을 별로 자지 못했다.


잠을 청하려 누워 있기만 할 뿐, 제대로 자지 못해서, 하루종일 잠 잘 궁리만 하였다.

하루종일 지난 밤의 뒤척임때문에 피곤을 못 이긴 눈꺼풀이 내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낮동안 오래 잠들지 않으려 소파에 누워, 잠깐씩 잠들었다.

낮잠은 밤잠처럼 짧지만 깊게, 밤 잠을 낮잠처럼 얇게 잠드는 버릇이 그 사이 생겼다.


지난 밤에는 기절한 듯이 잠이 들어서,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이 되도록 잔 거 같다.

순간 늘 함께하며 놓치지 않았던 시간의 흐름을 잃은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덟 시였다.


그사이 휴대폰에는 서울에 있는 동생에게서 텍스트가 와 있었다.

뉴욕 생활을 한다고 들었다며 어찌 지내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자신은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이라며 안부를 물어 왔다.

아마도 엄마가 아빠로부터 내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레아에게 전했을 것이다.

가족들간에 오가는 일상의 언어들은 늘 같지만, 행간의 의미는 그 때마다 다르고,

그 의미를 가지고 내닫는 패턴의 쳇바퀴는 한 방향이다.


레아가 지금 묻는 것은 내 안부가 아니라, 이곳의 생활이다.

내 형편이 자신이 와서 머물면서 뉴욕 관광을 해도 괜찮을 상황인 지가 궁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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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인간관계에서 한 걸음씩을 떼며 단계를 쌓아간다.

평상시에도 연락을 취하고, 그 주고받는 연락 속에서 정서적 교류를 유지한다.

상대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고 서로의 희로애락에 관여한다.

그렇게 지내면서 서로에게 힘든 일이 생기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가까운 인간관계란, 대부분 서로 이런 소소한 노력들로 균형을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이러한 기본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서면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런 작은 교류나 정서적 지지대가 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함께 살며 축적된 혈육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할 뿐이다.

본능적으로 상대의 약한 부분을 알고, 필요할 때마다 그곳에 그물을 치고 필요한 것을 낚아간다.


레아는 알고 있다.

내가 질문이 날라 오면 본능적으로 대답하고 설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드물게 내게로 보내는 그녀의 텍스트는 그래서 늘 의문문이다.

무언가가 필요할 때마다, 내게 텍스트를 보내서 기본적인 것부터 답답하게 묻는다.

질문 다음에는 늘 나를 부러워하는 말을 보냈다.

자신의 처지는 나에 비해 열등하고 지루하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다고 한탄했다.

내가 부지런히 그리고 꼼꼼히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이 될 것처럼 말을 하고 그물망을 조여갔다. 그리고, 그런 위로 중에 내게서 들은 내 상황이나 형편은 다음 낚시를 위한 미끼로 저장되었다.

아무리 무리한 부탁도 그 시작을 이리 소소하고 일상적인 안부로 이끌어 내고, 그 안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보면, 가족중에 가장 마음 약한 사람은 들어주게 되어 있다.

레아는 자신이 풀어 나가는 이야기의 결말과 역할 분담이 확고해서,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을 몰염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암시도 자락마다 곳곳에 놓는 걸 잊지 않았었다.


나는 들었던 핸드폰을 다시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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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갈아 입고 커피를 내렸다.

창가에 기대 선 채, 햇빛이 반짝이며 데우는 강물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마신 커피 컵을 씻어서 올려놓고 복도로 나갔다.

진수덕 화백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어제 랭은 나를 앞에 앉혀 놓고는 벽에 쓸려 상처가 난 얼굴과 다리,

그리고, 손목까지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제 진수덕 화백에게 어제 본 사실들을 확인하고, 혹시 모를 논쟁에 대비하자고 했다.

아파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 딸 이정선 씨도 없는지, 집 안에는 아무 인기척이 없다.

일층에 계시는가 하는 생각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일층의 파티룸에는 할머니들이 또 다른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한 할머니 한 분이 카드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그녀가 담배 피우러 나갔다고 말해 주었다.

외투를 걸쳐 입기는 했지만 맨다리에 짧은 원피스만 입고 있었다.

허드슨강의 칼바람이 불어오는 길거리에 그대로 나가기가 부담스러웠다.

로비에서 앉아서 현관문을 바라보면서, 진수덕 화백이 담배를 다 피고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기다렸다. ⠀⠀⠀⠀⠀ ⠀⠀⠀⠀⠀⠀⠀ ⠀⠀⠀⠀⠀⠀⠀ ⠀⠀⠀⠀⠀⠀⠀ ⠀⠀⠀⠀ ⠀ ⠀⠀⠀⠀⠀⠀⠀ ⠀⠀⠀ ⠀⠀⠀

아무 생각 없이 바깥을 쳐다보는 데, 낯익은 덩치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짧은 머리를 이마 뒤로 올려 빗는 교포형 헤어스타일을 하고,

곰 같은 체형에 얇은 옷을 입은 걸 보니 열 많은 체질인데..?

실루엣이 점점 내 데이터 분석을 한 방향의 캐릭터로 몰고 가고 있을 때에 휴대폰이 울렸다.

정변이었다.⠀⠀⠀⠀⠀ ⠀⠀⠀⠀⠀⠀⠀ ⠀⠀⠀⠀⠀⠀⠀ ⠀⠀⠀⠀⠀⠀⠀⠀⠀⠀⠀⠀⠀⠀ ⠀⠀⠀⠀⠀⠀⠀ ⠀⠀ ⠀


”정변이 거기서 왜 나와?”

“쎄라, 나 지금 여기 아파트 앞이야”

“알아”

“알아? anyway, let me in”

그가 통화를 하면서 건물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가 전화기를 끄더니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전화기를 계속 든 채로 중얼거렸다.

“아니, 왜?” ⠀⠀⠀⠀⠀⠀⠀ ⠀⠀⠀⠀⠀⠀⠀ ⠀⠀⠀⠀ ⠀⠀⠀⠀⠀⠀⠀ ⠀⠀⠀⠀⠀⠀⠀ ⠀⠀⠀⠀⠀⠀⠀ ⠀⠀⠀⠀⠀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정변이 자신이 끌고 온 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그 앞에 있었다.

정변이 나를 쳐다보다가 연고를 발라서 번들거리는 얼굴 상처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순간 움찔하는 그를 보자니, 겸연쩍어져서 괜히 목을 긁었다.

정변의 시선이 이젠 손목의 파스로 옮겨진다.

그 시선이 면구스러워 그가 몰고 온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뒷좌석에 커다란 가방이 두 개나 뉘어져 있다. ⠀⠀⠀⠀⠀⠀⠀ ⠀⠀⠀⠀⠀⠀⠀ ⠀⠀⠀⠀⠀⠀⠀


“어디 이사 오는 거야?”

“응”


정변은 가방을 내리고, 관리실에서 지하 주차장의 지정된 장소를 물어 차를 주차하러 갔다.

로비에서 서서 그의 가방을 지키면서, 나는 정변이 왜 편한 버스를 두고 차를 몰고 왔는지 의아했다.

이 시간에 이리 도착하려면 새벽 네시 이전에 출발해야만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왠 짐이 이리 많을까도 궁금했다.

정변이 손에 서류가방을 집어 들고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그가 내게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신랑이 와뿌렀구만.”

언제 오셨는지, 진수덕 화백이 한 말씀을 하고 지나쳐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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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두 개의 가방에다가 서류가방까지 추가로 들고 올라 온 정변과 함께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온 집안이 꽉 차는 느낌이 드는 게, 그가 이사 들어온 것 같았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변은 서둘러 가방 하나를 열었다.


그곳에는 김치통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한국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퍼백에 하나씩 포장된 빈대떡이나 돈가스 같은 음식들을 냉장고를 열고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텅 비었던 냉장고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정변을 보며 뭔 일이냐고 물었다. ⠀⠀⠀⠀⠀⠀⠀ ⠀⠀⠀⠀⠀⠀⠀ ⠀⠀⠀⠀⠀⠀⠀


“세라, 총각김치 좋아하잖아.”

“난 총각을 좋아하지”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랭에게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은 건, 정변이 부모님 댁에 머물고 있을 때라고 했다.

방학이라고 집으로 돌아온 늦둥이 대학생 동생을 보러 온 가족이 모였었다.

랭한테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직접 알고 싶어 곧장 운전을 해서 올라왔단다.

뉴욕보다 페어팩스가 한인마트가 좋아서 올 때 뭐라도 사 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새벽이라 장을 볼 수가 없어서, 부모님 집 냉장고를 뒤적여서 가방을 채우고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은 그의 어머니께서 만드신 것이다.

요번에 대학에 입학하여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돌아오는 막내아들을 위하여 며칠에 걸쳐 준비하신 그 음식들이 맞다. ⠀⠀⠀⠀⠀⠀⠀ ⠀⠀⠀⠀⠀⠀⠀ ⠀⠀⠀ ⠀⠀⠀⠀⠀⠀⠀ ⠀⠀⠀⠀⠀⠀⠀ ⠀⠀⠀⠀⠀⠀⠀ ⠀⠀⠀⠀⠀


나머지 가방 하나를 들고 그가 묻는다.

자기는 어디서 머무냐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정변이 방들을 기웃거리다가 비어있던 가장 큰 방으로 가방을 끌고 가서 풀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그를 불렀다.


“저기.. 정변?”

그가 옷을 옷걸이에 걸다 말고 쳐다본다.

뭐라 하려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한 마디를 했다.

“You’re welcome”

“응”⠀⠀⠀⠀⠀⠀⠀ ⠀⠀⠀⠀⠀⠀⠀ ⠀⠀⠀⠀⠀⠀⠀ ⠀⠀⠀⠀⠀⠀⠀


그가 가져온 가방들을 풀어 넣고, 거실로 오더니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꼴로 나랑 나가면 온 맨해튼 사람들이 네가 나를 때린 걸로 알 것이니,

부디 홀로 나가시는 것이 올바른 처신인 줄 안다고 아뢰었다. ⠀⠀⠀⠀⠀⠀⠀ ⠀⠀⠀⠀⠀⠀⠀


“집에 쌀도 없는 거 같은데, 밥은 아예 안 먹고살았어?”

힐끗 보는 거 같아도 귀신 출신이다. ⠀⠀⠀⠀⠀⠀⠀

“랭이 이 집에 한 가득 남겨진 엑스스몰 사이즈의 옷 이야기는 안 했어? 나는 단지 옷에 맞는 몸을 만들고자 했을 뿐이야. 가져온 옷도 없었거든”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짝다리를 했다.

이번에는 정변이 빤히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자신이 방금 나온 방 안으로 가서 자신의 머플러를 가지고 나왔다.


정변의 머플러로 얼굴이 칭칭 감긴 나는 정변과 길거리로 나왔다.

그가 전 남편이 사는 골목이 보고 싶다며 나를 몰았다.

정변이 설치고 드는 일이다.

뭐라 반박하기에는 기운도 달리고 논쟁을 하기가 귀찮아서 말없이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가 건물을 물었다.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정변이 내 곁에 바싹 붙어 서서 한 팔로 내 등을 두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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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배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하이웨이로 들어 가려다가 사고가 났어”

“다행히 사람은 안 다쳤지만, 새 차는 크게 찌그러졌다.”

“보험회사를 불러서 리포트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어."

"집 앞에다 파킹을 하고 들어가는데, 아빠가 집에서 나왔어”

“마크, 너 다시 차에 타라”

“아빠가 날 다시 운전석에 앉히고, 아빠가 내 옆에 앉았어”

“마크야, 우리는 지금부터 네가 사고 낸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몇 바퀴를, 수도 없이, 그곳을 돌았어. ”

“처음에는 무서웠어. 사고가 난 곳이니까."

"그런데, 계속 많이 도니까, 그냥 또 아무렇지도 않아졌어.”

“아빠가 말했어”

“마크야, 앞으로도 무서운 게 생기면, 이렇게 하는 거다.”⠀⠀⠀⠀⠀⠀⠀ ⠀⠀⠀⠀⠀⠀⠀ ⠀⠀⠀⠀⠀⠀⠀ ⠀⠀⠀⠀⠀⠀⠀ ⠀⠀⠀⠀⠀⠀⠀ ⠀⠀⠀⠀⠀⠀⠀

정변의 머플러는 최고였다.

얼굴을 가리다가 못해 눈물까지 가려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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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그림은 에디호퍼, 그외 모든그림은르네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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