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0화) 나라는 습관
아파트 안으로 돌아 와서, 얼른 옷을 갈아 입었다.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경직되었던 몸이 허둥대었다.
먼지에 얼룩덜룩해진 치마를 벗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 몸으로 피곤함이 달려 들었다.
기운이 정수리에서부터 빠지는 것 같았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피로감으로 입술까지 기어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소파에 비실비실 다가 갔다.
깜빡 잠 들은 것 같은데, 몇 시간을 내리 잤는지 모르겠다.
창 밖은 해 질 무렵 같기도, 새벽녘 같기도 했다.
누운 채로 몇 시나 되었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 전 남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전형적인 비즈니스 형식의 메시지였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면, 그는 늘 이렇게 대응했었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반응에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통보하고 싶을 때나,
일어난 일을 자신에게 유리한 팩트로만 나열하고 싶을 때에, 그는 꼭 텍스트를 보냈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그와 한 공간에 있을 때에도 그러했다.
물론 텍스트는 영어로 되어 있다.
누구나 손쉽게 열람할 수 있는 언어이고, 감정이 사라진 기록만을 위한 언어이어야 하므로.
자신의 어머니가 우연히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씀을 하셔서 텍스트를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나를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왜 그냥 걸어 가버렸냐며 물음표를 달아서 보냈다.
아마도 내가 못 본 거일 수도 있지만, 다시 앞으로 만날 기회가 생기면,
그때에는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자고 했다.
그럴 만큼 우리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끝나지 않았냐는 내용이었다.
누운 채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그에게 답을 했다.
나 역시 인사말로 시작하면서 그와 같은 포맷으로 글을 시작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과 달리 왜곡되어 있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글을 쓴다고 서두에 목적을 밝혔다.
그 밑으로 단락을 달리 해서, 오늘 있었던 사실을 시간대 별로 묘사해 서술해 갔다.
사실은 너희 엄마가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불러 세우고,
그녀와 별로 섞이고 싶지 않아서, 내 갈 길을 가는 나를 계속 따라 왔다고.
피하는 사람을 쫒아 와서, 모욕적인 언사로 욕을 하고,
내 핸드폰을 뺏으려 했으며, 나를 계속 뒤 쫓아 와서 나를 위협했다고.
너희 어머니의 그 모든 행동의 결과로 나는 넘어져서 다친 상태라고 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정확히 기술하였고 증인도 있음을 밝혔다.
이런 식의 메시지로 사람을 우롱할 수는 있어도, 팩트를 조작할 수 없다는 말도 덧 붙였다.
그는 답이 없었다.
예전에 그가 이런 식의 텍스트를 보냈을 때에는 나는 항상 아무 답을 하지 않았었다.
살짝 변형시킨 사실도 정정하지 않았고, 유리한 사실만 늘어놓는 것도 잘라 내지 않았다.
그 모든 소소한 변형을 정색하고 달려들어 정정하고 고치려는 제스쳐가
구차한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피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소한 구차함을 무시하고, 피로감에 순간순간 무기력했던 것은 대부분 복리이자로 나에게 돌아 와서
댓가를 치르게 하였다.
그의 텍스트들은 관계에 있어서도 내 진심어린 말과 행동따위를 우습게 만드는 차용증서처럼 나를 옭죄었다. 기록은 힘이 세다. 기록하는 사람의 의도가 켜켜이 들어가 있을 때에는 천하무적이 된다.
문자를 보내고 나니, 허기가 느껴졌다.
일어나서, 입고 있던 츄리닝 위에 긴 코트를 걸쳐 입었다.
나가서 약도 사고, 랭이 놀라서 자빠지는 것도 보고, 뭐라도 먹어야겠다.
코트를 걸치는데 온 몸이 욱신거렸다.
특히 오른 손목은 통증이 심했다.
킁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리면서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떴다.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 않아도 번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전 남편의 전화번호였다.
그가 그렇게 같이 살던 아파트를 나간 후에 한 번도 그와 통화한 적이 없다.
처음에는 그가 내가 건 무수한 전화를 거부했었고, 이혼 후에는 딱 한번 걸려 온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쎄라, 오랜만이지?”
전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할 때, 그는 한국말을 했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말투를 썼다.
지금처럼.
어머니의 일로 내가 보낸 텍스트가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는 상대방이 녹음사실을 알고 동의하지 않는 한, 녹음을 해도 소송이나 증거로 제출할 수 없다.
그걸 그도 알고 나도 안다.
“그 일이라면, 텍스트에 적힌 내용 외에는 할 말 없습니다.”
내가 본론으로 질러 들어가니까 그가 말을 더듬었다.
“오.. 오랜만이라.. 쎄라, 쎄라도 많이 변했겠구나.”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가 반갑다고 조금 흥분한 걸 가지고, 너무 하는 거 아냐?”
“컴 온”
이 둘의 환상의 팀워크는 여전한가 보다.
지겹게 보아 온 배드 캅 굿 캅 놀이는 결혼 전에도, 결혼 중에도, 이혼 후에도 지속되는 걸 보니 말이다.
늘 둘이서 먼저 이야기를 마치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나누고 모든 일들을 진행했었다.
내 의견도 물어보는 수순을 걸쳤지만, 그것이 그저 의례적인 과정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중요한 일수록, 큰 결정을 할 때일수록, 나는 소외되었다.
그 소외감을 언급이라도 하면, 깊은 배려를 이해 못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나를 몰았었다.
그들의 세트플레이를 맞서려면 눈치가 아주 빠르거나,
모든 것을 선의로만 보는 특별한 눈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그 둘 다 없었다.
내가 더 사랑하게 되어, 아니 정확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취하게 되어,
관계의 모든 권력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던 나는 그래서 쓸쓸했다.
억울했다면 차라리 더 좋았을 것인데, 쓸쓸하기만 했다.
내 선택이었다.
자동으로 재생되는 듯한 그들의 세트플레이가 웃기다고 느껴졌다.
피식 웃었다.
그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내게 우냐고 물었다.
그 말에 더욱 빵 터졌다.
아직도 자신이 나보다 우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나 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에 말을 섞어서 그에게 전했다.
“쿡쿡.. 울긴.. 큭큭”
“뭘 울어?. 웃기지.. 훗..”
반말을 하는 건 처음이다.
그가 나보다 여섯 살이 많다.
얼떨떨해하는 그가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나도 웃음기를 지웠다.
"이제는 나이가 forty, 아니 over forty 아닌가?".
“아직도 엄마 말이 모든 것의 스탠더드야? 그랬다고 엄마가 말하면 그런 거야?”
“허긴, 많은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분이긴 하지."
"그래도 아무리 엄마라도.. 아유.. 네 말대로 할머니들 하는 말을 고대로 믿어?.. 컴 온..”
말을 마치고 다시 웃음이 나와서 계속 킬킬대었다.
한동안 멍한 기색을 띠던 그의 목소리가 정색을 하며 달라졌다.
이번에는 영어로 언어의 채널을 바꾸었다.
내 주장과 상관없이, 자신들은 책임질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나도 영어로 언어의 채널을 바꾸었다.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텍스트로 너에게 전했듯이, 당신의 어머니는 나를 위협했고, 공포에 질리게 했고, 대화를 거부하는 날 따라와서 내가 넘어지는데 일조를 했다고 따박따박 받아쳤다.
지난 세월 기운 센 정변의 상대 파트너로 논쟁의 샌드백으로 연습한 결과물이 이리 사용되었다.
그가 서둘러 전화를 마치며 통화가 종결되었다.
길게 한숨이 나왔다.
순간 너무 목청을 높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복도를 얼른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에효. 이런.."
"이런 걸.."
그사이 내 눈 앞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한참을 더한 엘리베이터에 마침내 탔다.
밖으로 나오니, 쌩한 강바람이 깎여 쓰라린 뺨을 스쳤다.
싸하니 상처가 쓰라렸다.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하지만, 바람이 뻥하고 뚫린 마음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게 시원했다.
운동복 바람에 얼굴 한쪽에 쓸린 상처까지 달고 퇴근길에 맨해튼 거리를 휘젓고 걷자니,
겁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같은 상처라도 얼굴에 있는 상처는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다.
랭은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벌린 채 말을 못 했다. ⠀⠀⠀⠀
“뉴욕 스타일 제대로!”라고 외치면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그녀 앞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우리가 주로 밥을 먹던 학교 카페테리아에는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나는 랭에게 오늘 일어났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랭은 차분하게 내 말을 끝까지 들었다. ⠀⠀⠀⠀ ⠀⠀⠀⠀ ⠀⠀⠀⠀ ⠀⠀⠀⠀ ⠀⠀⠀⠀ ⠀⠀⠀⠀ ⠀⠀⠀⠀ ⠀⠀⠀⠀
“그래, 지금 기분이 어때? 쎄라”
“글쎄, 늘 전남편을 마주치면 어떡할까 상상하고 머릿속에 시나리오를 쓰고 예측하고 했었는데..”
“했었는데?”
랭이 내 끝말을 받아 되물었다.
“늘 그랬듯이 준비된 문제는 시험에 안 나오더라고. 예상 밖의 문제만 튀어나오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생활 내내 남편 대신 악역을 맡아준 그 여자를 맞닥뜨린 게 오히려 잘 된 거 같아.”
“그 악역이라는 것도 사실은 Ex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거지."
"과분한 곳에, 계급이 다른 사람 주제에 그와 결혼을 해냈으니, 횡재한 사람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들이었지” ⠀⠀⠀⠀ ⠀⠀⠀⠀ ⠀⠀⠀⠀ ⠀⠀⠀⠀
”그들은 늘 내 우위에 서서 나에게 채권자처럼 굴었지."
"심지어 나에게는 질문을 하지도 않았어. 질문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가도 알려고 하지 않았지. 알 필요도 없는 거야.”
“나뿐 아니라 늘 내 가족을 소환해 와서는 필요 없는 부분에도 늘 비교하고."
"내가 흘린 아주 작은 정보 하나하나 다 입력하여 자신들과 또 비교하고."
"사람이 이상한 게, 뭐든 지속적으로 당하면 습관처럼 되어서 익숙해져."
"그들이 틀리다는 걸 아는데도, 그들의 생각처럼 따라서 생각하게 되지."
말을 잠시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들은 가족이었고 팀이었어. 나 홀로 그들 사이에서 다른 생각으로 산다는 건 말이야."
"흐르는 물을 역류하는 것과 같아서, 늘 긴장하지 않으면,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 ⠀⠀⠀⠀⠀⠀⠀ ⠀⠀⠀⠀ ⠀⠀⠀⠀ ⠀⠀⠀⠀ ⠀⠀⠀⠀ ⠀
랭은 훌륭한 상담사다.
공감은 해도 흥분은 하지 않았고, 말을 시키지만 몰고 가지 않았다.
덕분에 이야기를 할수록 나는 차분해지고 담담해져 갔다.
“전남편이 바람이 났을 때."
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 바람난 여자가 나보다 부유한 집안사람이고, 그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스펙을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패배자 같았거든.”
“그런데, 결혼이라는 게 승부를 보는 곳이 아니잖아. 랭.”
“남에게 상담을 해줄 때에는 당연해 보였던 뻔한 진실도 내 상황이 되었을 때에는 안 보이지."
"나도 똑같이 속수무책으로 어리석게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지”
“그들의 논리에 나를 맞췄던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말이야”⠀⠀⠀⠀
마음은 정리되는데 말은 자꾸 중구난방으로 나왔다.
이 말을 하다가 저 말을 하다가 했다.
랭은 그래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
⠀⠀⠀ ⠀⠀⠀⠀ ⠀⠀⠀
“Ex랑 통화한 느낌은 어때?”
랭이 물었다.
전남편과 통화한 내용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초라하네.”
“누가? 뭐가?”
“다.”
“...”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사람들이, 사실들이, 공포감이 말이야."
"막상 맞닥뜨리니, 참 초라하고 별거 없네.” ⠀
"그걸 내가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스스로를 벌주고 싶었을까."⠀
"힘들게, 서럽게, 더럽게, 외롭게 하면서 말이야"⠀⠀⠀⠀ ⠀⠀⠀⠀ ⠀⠀⠀⠀ ⠀⠀⠀⠀ ⠀⠀⠀⠀ ⠀⠀⠀⠀ ⠀⠀⠀⠀ ⠀⠀⠀⠀ ⠀⠀⠀⠀
흘러 간 시간들은 늘 엎질러진 물 같다.
그 물이 아까워서 지금, 또, 물을 엎지른다.
#엎질러진 물은 대량 방류
#아까워 흘리는 물도 대량 방류
#첫 번째 그림은 피카소, 나머지 그림은 앙리룻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