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는 나타난다. 반드시..

(소설 19화) 나라는 습관

by 쑥과마눌

“쎄에라..? 쎄라?”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다.

몸이 저절로 소리가 난 곳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전 남편의 어머니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아파트를 올라가는 입구 계단에 서있다.

번뜩이던 눈빛도 그대로였다.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 채, 아파트 공용현관의 난간을 잡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세상에.. 세상에..”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크게 말하는 목소리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려졌다.

얼른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했더니.”

“잠깐만.. 잠깐!, 기다려 봐.”

내 뒤 따라오며 그녀가 명령했다.

강조할 때마다 사용했던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버릇도 여전했다.

나는 앞만 보고, 계속 걸었다.


“여기가..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와?”

그녀가 외치기 시작했다.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걸음을 멈췄다.

잠시 볼이 빵빵하게 해서 숨을 삼키고 뒤돌아섰다.

"왜요?!"

“여기를 못 올 이유가 있나요?”


그녀가 했던 숱한 말들에 빼곡히 복선으로 깔린 무시와 비웃음의 의미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도 알아들은 척을 하거나 받아친 적이 없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중에는 그럭저럭 한 관계를 위한 묵인이라고도 생각했다.

이혼 후에야 그런 말들이 내 안에서 무성히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잠 못 드는 밤이면, 그렇게 뿌리내린 말들이 화단의 잡초처럼 뽑아도 뽑아도 무수히 살아났다.

한밤중에 일어나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 얼음물이 몇 잔이던가.

그리 물을 벌컥 거리며 마시면서 스스로 내뱉은 저주의 말은 예전의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또 스스로를 비웃었다.

커다란 흉터는 차마 들여다볼 용기는 없으니까,

그 주변 곁가지만 이리 붙들고 홀로 분해 죽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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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내 반문에 전 남편의 어머니가 잠시 멈칫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 쳐다보며 물었다.

“맨해튼이 당신 거예요?”

순간 멍하더니, 그녀의 눈이 다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 당신? 당신?!!”


나는 다시 리버사이드 아파트를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 그녀가 계속 뭐라 말을 하며 따라왔다.

주제를 모르는 주제라고도 하고, 네 까짓것이라고도 하고, 너 따위를 불쌍히 여겼다고도 하고,

그런 너를 전 남편이 떠난 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했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을 때에는 더욱더 같은 단어와 문장을 두 번씩 강조해 써서,

결코 놓치는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내 귀 안으로 그녀가 만든 모든 문장이 예외 없이 차곡차곡 쌓였다.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왜요? 바람둥이 아들이 나랑 다시 바람 날까 걱정이에요? 바람이 습관이라.”

그때부터 그녀 입에서 쌍욕이 나왔다.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대충이 없는 것도 여전했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교류할 때에도 단절할 때에도 늘 전력을 다 했다.

욕을 해대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핸드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를 피해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뛰기 시작했다.

뒤따라 쫒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소리도.


출근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먼, 찬 바람이 몰아치는 리버사이드 길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파트 건물이 가까워졌을 무렵에 발이 삐끗하면서 건물 모서리에서 넘어졌다.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져 길바닥으로 굴렀고 한쪽 뺨이 건물 외벽에 쓸렸다.

넘어지면서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서 고꾸라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점점 고함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목소리가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파트 코너에서 전남편 어머니를 향한 맞고함이 들렸다.

한국말이었다.

경우 없는 그녀를 사정없이 나무라는 소리였다.

난데없이 들리는 전라도 사투리에 멍해졌다.

그리고, 부축하려 다가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진수덕 화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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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진수덕 화백이 성큼 걸어왔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을 생각도 없이 쳐다보았다.

마디가 굵어 보이는 까칠한 화가의 손은 물감 자국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중이었는지, 다른 한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같이 담배를 피우던 금발의 할머니 하나가 손에 들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는 내동댕이 쳐진 내 핸드폰을 주어 왔다.

핸드폰을 건네며 조심스레 나를 살피다가 괜찮냐고 물었다.

진수덕 화백이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전남편의 어머니는 가버렸는지, 빈 거리에는 바람만 남았다.



얼얼한 상태로 무례한 줄도 모르고 계속 진수덕 화백을 빤히 쳐다보았다.

흰머리가 제법 섞인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겨서 묶은 하얀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길고 가늘게 그린 눈썹이 세월에도 유행에도 자신이 넘치는 듯해 보였다.

진수덕 화백은 피하지 않고, 드러내 놓고 쏟아내는 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과 관심에 익숙한 몸짓과 반응이었다.


“요번 이사 온 한국사람?”

말없이 고개가 끄덕였다.

“걸을 수는 있겠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손목이 시큰거리고 얼굴이 쓰라려 왔다.

무릎 아래 스타킹은 커다랗게 구멍이 났고, 그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는 길바닥에 쓸린 자국이 생겼다.

두 할머니들의 챙김을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몸은 늘 파티룸에 있지만, 단련된 촉을 늘 로비와 거리를 오가는 거리에 두고 있는 파티룸 할머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내 얼굴을 보고 호들갑에 난리가 났다.

나는 벽에 있는 거울을 힐끗 보았다.

눈 아래 광대뼈 옆으로 건물 대리석에 긁힌 자국들에서 피가 맺히고 있었다.

사무실의 구급약통이 나오고, 아이스팩이 나오고, 아유 오케이가 여러 번 나오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들에게서 풀려났다.

그 소란 속에서 차분하게 내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던 진수덕 화백의 카리스마가 조용하게 빛났다.

쩔뚝이며 아파트로 올라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전히 멍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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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는 나타난다_반드시

#그러나_안_좋은타이밍에


#맨 위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 두 번째 그림은 몬딜리아니, 마지막 그림은 앙리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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