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밈혜윤 Oct 18. 2021

[긴낮짧밤] 내가 우울증인 줄 몰랐어!

질환의 발견: 다들 이러고 사는 게 아니었어?!

   우울증을 진단 받았다. 그것도 해묵은 우울증. 그런데 나는 내가 우울증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울증' 하면 뭘 떠올렸었나 생각을 짚어봤다. 끊임 없이 뿜어내는 부정적인 감정과 아우라, 미래에 대한 냉소, 늘 죽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 그래, 나는 우울증이란 게 그런 줄만 알았고 나와는 아주 먼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희망적이었다. 그 '미래'란 게 추상적이고 멀긴 했지만 언젠가는 잘 풀릴 거란 막연한 믿음이 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내가 우울증이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미래를 위해 당장 해야 할 'To Do List'는 가득했다. 실행으로 옮기기 어려웠을 뿐이다. 해야 하는 것들의 난도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당장 연필을 들어서 계획을 짜고 행동으로 잇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플래너는 계획으로 넘쳐났지만 며칠이 지나면 실행하지 못한 나의 게으름을 실망스럽게 바라보면서 지워내는 것의 반복이었다. 우물을 팔 정도로 목마르지는 않아서 흙을 파낼 절박함은 없는 사람. 부모님의 그늘에서 안락함을 누리며 노력과 경쟁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생각과 말만 앞서 설치다가 슬그머니 주저앉는 사람. 그게 내가 본 나였다. 어찌 보면 한심했지만 문제가 있다거나, 병원을 다녀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태로 여겨지진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 즐겁게 보내는 나를 떠올리면서 어련히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다.


  어련히 괜찮겠지. 이 말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심함이기도 하다. 당연히 내가 정상의 범주에 있으리라 믿으면서 튀어나오는 문제들을 애써 덮어버리는 무심함. 이 때문에 나는 내가 분노 조절이 잘 안 된다는 사실도 금세 깨닫지 못했다. 정말 작은 것에 쉽게 화가 났다. 나를 화나게 하는 건 너무 많았다. 붙여둔 포스트잇이 접착력을 다해 툭 떨어지는 게 화가 났고 전화벨 소리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칼에 화가 났다. 언제든지 화가 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같았다. 화를 표현하기 시작하면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거듭 화가 났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냐는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모든 비정상적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소 가볍게 생각했다. 그저 내가 감정을 다스리는 게 모자란 사람이라고.


  사실 당신은 만성 우울입니다. 이제 놀라운 반전을 마주하게 된다. 마음에 화가 너무 많은 스스로를 감당하기 어려워져서, 나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중소기업 재직자들에게 연 7회까지 제공하는 무료 심리상담을 신청했다. 그곳에서 상담사를 네 번쯤 만났을 때, 상담사의 조심스런 신경정신과 내방을 권고받았다. 그가 내게 신경정신과 내방을 권고한 까닭은 지나치게 큰 진폭으로 널뛰는 감정 때문이었다. 물론 누구나 감정의 고저는 있는 법이지만 나는 차이가 과하게 보인다고 했다. '남들은 이 정도가 아니란 말이야? 다 이러고 사는 게 아니야?' 하는 얼떨떨함을 안고 신경정신과로 향했다.


  집 근처 신경정신과 병원에 전화를 돌리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초진을 보려면 한달~두달 정도 대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과 가듯이 아무 데나 가도 되는 줄 알았는데 예약 잡기부터 옥주현 뮤지컬 티켓팅마냥 난관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힘든 사람이 많은 줄 몰랐다. 힘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기이한 위안을 느꼈다. 세상이 바뀌어도 편견은 견고해서, 젊고 편견이 적은 편인데도 막상 내가 정신과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정신과를 다녀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다독여주던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들 덕분에 용기를 내서 마침내 한 병원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이런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나 싶은 것들도 술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진단을 받았다. 나는 의외로 어릴 때부터 우울감을 품어온 사람이었다. 우울감으로 인한 짜증과 분노 조절의 문제, 짜증내고 화내는 내가 싫어서 야기되는 부정적 자아상, 부정적 자아상이 빚어내는 좌절과 무력함, 악순환 같은 문제들을 조금씩 조금씩 짜맞추어 알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나를 알게 되었다. 정신과에서 거듭된 상담으로 받게 된 나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담담하게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도리어 좋았다. 나는 왜 이렇게 실천력이 없을까?라거나,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못 참지? 같은 질문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심과 의지만으로 잘 해결되지 않던, 나도 내 편을 들어주기 어렵던 문제들. 문제만 붙든 채 스스로 문제아라 비웃지 않아도 괜찮았고 이따위의 내가 살아도 되는지 질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 나는 이때 무력함을 느꼈구나. 나는 이런 사건의 경험이 마음에 남아서 이때 더 크게 화가 났구나. 내가 마음이 힘들었구나... 알고 나니 편안했다. 나를 조금 더 안아줄 기분이 났다.


  오래 우울감을 가져오면서 의지만으로 다루기 어려워진 감정을 관리하기 쉽게 도와주는 약을 먹고 주기적으로 의사를 만나 상담한다. 상담이 무겁지는 않다. 이번 주엔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나눈다. 마냥 가깝지는 않지만 멀지도 않은 친구를 만나듯이 한다. 여전히 널뛰긴 하지만 꽤 많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언제 또 나빠질지, 얼마나 나빠질지 생각하면 무서운 날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에게 계속 주지시킨다. 내가 좋아진 건 단순히 약을 먹어서가 아니라, 약을 먹고 의사를 찾고 나를 안아주면서 더 나아지려는 내 노력 덕분인 거라고. 지금껏 좋아졌듯이 앞으로도 더 노력하고 연습하며 나아가면 된다고.


   당신이 외롭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내가 다시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당할 때 열어보기 위해서. 내가 어떤 경로를 걸어서 나아가고 있었는지 돌이켜 보았기를. 그리고 용기와 길을 잃지 않았기를. 이 글을 열어보게 된 건 무던히 노력하다가 지쳤기 때문이겠지. 노력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용기가 충만한 현재의 내가 미래의 지친 나에게 응원을 보탠다.


  무엇보다 이 글을 본 누군가의 용기가 되어주고 싶어서 쓴다. 자기가 힘든 건 알고 있지만 막상 정신과에 가려고 하니 두렵고 외로운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내가 느꼈던 기이한 위안을 느낄 수 있기 바란다. 당신은 정신과에 가는 '또라이'도 '문제아'도 아닙니다. 물론 혼자도 아닙니다. 그리고 정신과는 사실 그렇게 무서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저를 믿어보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