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노잼시기가 오려고 해요
쓸모없는 생각
인생 노잼 시기가 다시 오려고 한다. 인생 노잼시기란, 'No 재미'를 가공한 말로써 인생에 재밌고 흥미로운 것들이 재미가 없어진 시기라는 뜻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주기적으로 인생에 노잼 시기가 들이닥친다. 이 초대한 적 없는 몹쓸 손놈은 대뜸 내 방에 쳐들어와서 모든 의욕을 꺾어 놓는다. '프로 노잼러'로서 이 놈이 닥쳐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다. 노잼 시기의 전조는 의심이다. 내가 이걸 왜 하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노잼 시기에는 잘만 하던 일들을 쓸모없는 일, 의미 없는 일이라고 폄하하게 된다. 냉소적인 인간이 되기란 쉽다. 질문 하나면 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뭐든지 그 질문 앞에 세우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수많은 철학자들에게도, 심지어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팔짱을 끼고 무시하는 얼굴로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으면 그들은 벙 쪄서 침묵했을지도. 비유가 그렇단 거지, 사실 철학의 거장들에겐 덤비지 않는 쪽이 좋다. 논리적으로 박살 날 테니까.
여하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압박 면접을 스스로에게 하면 평범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근원 모를 자괴감과 좌절로 풍덩 빠진다. 건강한 비판이 아니라 날카로울 뿐인 비난은 퇴보로 향하는 직행 열차다. 한 번 그 열차에 올라타면 좋아했던 것, 잘하고 있던 것들에 품고 있던 감정이 휘발된다. 좋아하는 것을 앗아간 질문은 다시 한번 삶을 시험한다. 내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진짜 쓸모없는 건 바로 그 질문들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인생은 딱히 의미로 사는 건 아니다. 의미나 신념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냥'이란 말도 빛을 발할 때가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냥, 이라고 대답하는 게 어렵다. 그 한 마디로 눙치며 대충 인생을 까먹는 게 아닌지 두렵기 때문이다. 입 밖에 내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 이걸 왜 하는 거야? "그냥".
그냥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보기만 해도 긴장이 한결 풀린다. 그래도 이완이 안 되면 나는 부러 무서운 얼굴로 거울에 을러댄다. 무슨 상관인데, 팍씨.
스스로만 보지 못하는 것
농담 삼아 친구들과 매일 그런 말을 한다. 한국인들은 죽도록 열심히 살아놓고 나태지옥에 갈까 봐 무서워한다고. 그 농담에 웃고 있는 내 친구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지는... 지도 내심 나태지옥에 갈까 봐 무서우면서.
어쩌다 한국인들은 열심히 사는 삶, 그러니까 '갓생'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집착을 넘어 사회 전체가 중독되었다고도 보인다. 갓생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열심히라는 부사를 귀에 딱지 얹도록 들어왔다. 과장 좀 보태서 어른들은 '열심히'가 없으면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지. 열심히 해야지. 월급 루팡 중이라고 카톡 해놓고 5분도 안 돼 태세를 바꿔서 먹고살려면 열심히 해야지, 남의 돈 벌기가 쉽지 않아, 말하는 수많은 어른스러운 친구들이 뇌리를 스친다.
게으름을 지향하는(물론 말로만) 나와 친구들 또한 갓생에 중독된 것은 피차 마찬가지다. 눈앞에 해야 할 일들을 두고 딴짓하는 스스로가 상당히 원망스럽고 밉다. 정확히 그 이유로 인생 노잼 시기, 그리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간과한 것이 있으니... 사람은 스스로에게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너무 게으르다며 우는 소리하는 친구들에게 다른 친구들은 물음표를 띠용? 띄운다. 네가 게으르다고?
노잼 시기가 온 친구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본인이 하고 있는 것들을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록해 보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갰음. 양치함. 출근함. 회의 몇 번 했음. 레퍼런스 몇 개 찾아봄. 퇴근함. 저녁 해 먹음. 양치하고 얼굴 여기저기 누르며 마사지함. 잠옷 입음. 극히 사소한 것까지 적다 보면 사람이 생각보다 매우 바쁘게 하루를 보냄을 알게 된다. 스스로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을 수 있고, 그런 걸 매일 했으니 지쳤구나! 무릎을 탁 치며 스스로를 이해해 줄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갰다. 반려 토끼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간식을 줬다. 세수 후 선크림을 발랐다. 옷을 갈아입으며 토끼를 틈 날 때마다 쓰다듬었다. 나와 친구들이 하는 오디오 콘텐츠물을 편집했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썼다. 이따가 오후엔 운동을 하고 공부를 좀 하다가 졸업 후 만난 적 없는 대학 친구들을 만날 것이다. 귀가하는 길에 음악을 듣거나 <듄> 영화를 볼 것이다. 혹은 요즘 최애 아이돌인 레드벨벳 웬디의 영상을 보겠지. 밤엔 양치하고 반려 토끼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뒤 잠들 것이다. 아,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어쩐지 피곤하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