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전에 기록해 두기
불안하고 찬란했던 시간들
8년 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졸업한 시기는 모두 달랐으나 각자 삶이 바빴다. 연락해 볼까, 우리 그때 좋았잖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서로 연락할 엄두를 찾지 못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할 말이 없으면 어쩌지? 이 친구가 나를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잖아… 다들 배려를 과하게 하는 쫄보들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우리는 추억팔이를 생각보다 조금만 했다. 지금의 고민을 나누고 생각보다 늦게 귀가했다.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웠다.
칭찬을 폭격했다. 말 끝마다 달라붙은 ‘리스펙’이란 말은, 비록 진부하지만 그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한 명 한 명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있구나. 사회인이 되었구나. 늘 믿고 있었어. 모든 말을 '리스펙'이란 단어로 뭉쳤다. 오래전 학생 시절에도 울면서 열심히 걸었던 그 마음을 알기에. 그가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왜 진작 안 만났지? 이 문장을 주문처럼 되풀이하면서, 새벽 두 시까지 우리는 서로의 멋진 점을 한없이 나열했다. 열한 시 전에 파할 줄 알았던 자리는 시간을 모르고 달렸다. 시간을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 칭찬해 주고 호들갑 떨어주는 모임은 귀하다. 비록 내일 일어나서 대화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지라도 당장 눈앞의 친구를 칭송해 주었다. 가진 게 서로밖에 없던 학생 시절에도 늘 그랬던 것 같다.
내 대학 시절은, 돌아보면 언제나 반질반질 윤이 났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서로가 있었다. 내 마음을 애틋하게 문질러 광을 만들던 선량하고 마음 약한 아이들. 둘만 만난 적은 손에 꼽았어도 집합에 섞여서 어떻게든 곁에 서있었다. ‘어떻게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진 게 없어 불안하고 불행했지만 그 결핍이 생각보다 견딜 만했던 것은, 심지어 20대가 아름다운 추억의 대상이기까지 한 것은, 그들 덕분이었다. 나는 덕분이란 말을 좋아한다. 오늘 그들과 8년 만에 많이 웃었다.
뭉툭해
우리는 날카로웠다. 언제든 꺾어 부러질 준비가 된 나무처럼 눈을 부릅뜨고 우릴 흔드는 것들에 덤볐다. 겁도 없이? 아니. 겁은 많았다. 치기와 순진한 분노로 덤볐다. 우리가 갖고 있던 가지들은 똑, 똑, 또독, 부러졌다. 어떤 것은 부러져서 더 뾰족하고 조그만 가시를 남기기도 했고 어떤 것은 낙엽 떨어지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엇이든 과거와 현재를 비교, 검토하는 걸 좋아한다. 과거에 우린 그랬고, 현재 우리는 달라졌다. 어린 나무들은 몸통이 굵어졌다. 꺾일 때마다 날카롭고 작아지던 가시. 조용히 내 삶에서 자취를 감춘 가지. 가시와 가지를 발음해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든다. 나에게 그런 가지도 있었던가. 몸통에 계속해서 상처를 내던 바람은 잦아들었다. 어떤 바람은 올라타 부드럽게 흔들거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바람은 우리를 간지럽히지조차 못한다. 어린 나무들의 의지의 결과물만은 아니었다. 원하지 않아도 하게 되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20대의 왁자지껄함과 30대의 왁자지껄함은 조금 다르다. 20대는 미래를 얘기한다. 30대는 현재와 과거를 이야기한다. 과거 이야기를, 내가 알았던 너, 내가 처음 만났던 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던 치부에 대해서도 꺼냈다. 20대에 쪽팔려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치부는 이제 보니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말로 꺼내놓을 정도로 깔보게 되긴 하였다.
꽁꽁 잘 숨긴 비밀이라고 생각했던 찌질함과 불안은 실은 공연했다. 탁자에 올리지 않은 대화였을 뿐이었다. 방향과 강도를 달리 했을 뿐인 비슷한 재료들이 호주머니에 있었으므로 서로 기민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절대로 언급해서는 안 돼. 부끄러운 점을 들키는 수모를 겪게 해서는 안 돼. 하지만, 너의 비참함과 그늘을 모르진 않았어. 나도 비슷했어. 지난 8년간 우린 불안을 손 끝으로 슥슥 문지르면서 솟아오른 것들을 다듬고 뭉툭해졌구나.
마지막까지 넌 훌륭해, 훌륭하다, 주문을 외며 각자 차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잘 가,라는 인사보다 모호하고 뭉툭한, 그리고 여태 인사로 사용해 본 적 없는 이 말이 맘에 들어서 택시에 앉아 있는 동안 시종 웃고 있었다.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