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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Mar 10. 2024

행복한 채로도 글을 쓸 수 있어

한량 같은 하루

   오늘은 케이크를 먹으며 책을 읽고 담배를 피웠어

   오늘은 오랜만에 오롯이 혼자인 하루를 보냈다. 앞의 문장의 세 덩어리가 ‘오’로 시작해서 괜히 기분이 좋다. 완연히 혼자인 하루는 드물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PT를 받고, 매일 같이 동생과 밥을 먹고, 또 놀랍게도 매일에 가깝게 만나는 친구가 있다. 격주로 만나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친구들도 있다. 스스로 인싸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친구가 적다기도 애매하고 무엇보다 만나자고 하면 군말 없이 만나는 애들이 대부분인 탓에 내 일상엔 항상 사람이 섞여 있다. 하다 못해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을, 사무적이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내 운동에 응원을 보태는 관계인 트레이너와 인사하고 운동 이야기를 하며 매주를 보낸다.


   사람이 개미떼처럼 줄지어 가는 건대 부근에 애정하는 카페가 있다. 케이크가 참 맛있다. 매일 만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친구라기보다 자매에 가까운 친구와 약속한 듯 늘 오는 카페인 이곳에 오래간만에 혼자 들렀다. 전에 없던 케이크가 눈에 보였다. 초코맛 바스크 치즈케이크는 해동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살얼음이 낀 것 같이 차갑지만 부드럽게 혀 끝에서 녹는 케이크를 입에 굴리면서 소설을 펼쳤다. 창문으로 햇살이 천천히 떨어져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소설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면서 단번에 읽었다. 단편집이 아닌 장편소설은 또한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거 되게 많네. 참고로 오늘 나를 완전히 매료시킨 작품은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이라는 장편 소설이었다.


   인간보다 인간답고(무엇이 인간다움인지 규정하는 성가신 일은 하지 말자) 상냥한 휴머노이드 ‘콜리’, 콜리를 태우고 맹렬히 달렸던 흑마 ‘투데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이 계속 났다. 울컥하게 만드는 문학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좋은 일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앉은 자리는 계산대 바로 앞이었다. 사람들은 눈물 흘리는 나를 힐긋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들은 수 분이 지나지 않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닦아낼 수 없는 머쓱함을 안고 비염 때문에 코를 푸는 척 휴지로 얼굴을 가렸다. 소설을 읽고 나니 인간이 제일 나쁜 것들이라는 유구한 생각이 다시금 선명하게 빛났다.


   풀을 씹은 것처럼 입 안이 씁쓸하고 침이 고여서 담배를 피웠다. 입 안이 씁쓸한 것과 담배를 피운 것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없다고 보기에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여담이지만 나의 이런 말장난을 철학과 교수님들은 참 싫어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말이나 쓰는 내 글의 스타일도 좋은 점수를 받진 못했다. 제일 잘 쳐준 교수님마저도 철학과 교수답지 않게 “계속 쓰렴. 너에게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잖니…”라고 애매하게 말하셨다. 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내 스타일을 좋아한다.


   행복하고도 글을 쓸 수 있네

   국외 소설보다 국내 소설을 좋아한다. 역자가 인생을 걸고 번역, 의역을 잘했어도 언어가 달라지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과 나의 이해는 어쩔 수 없는 장벽에 마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표현에 최대한 가깝고 싶다. 그런 탓에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만 읽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은 좁아진다더니 한국 작가 중에서도 편애하는 작가의 책만 읽고 있다. 편애하는 작가들의 신작만 읽기도 버거울 정도로 독서량이 줄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해 왔지만 그게 꼭 글을 쓰는 순간들에 내가 행복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내가 글을 쓰는 상황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기, 독후감, 사생대회, 레포트. 생겨먹은 것부터 귀찮고 하기 싫은 인상이다. 단어들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앞에 언급된 단어들이 내게 화를 버럭 낼지도 모르겠지만, 해야만 하는 것일 때는 한없이 귀찮은 게 당연지사. 행복했던 상황에서 글을 쓴 상황은 드물다. SNS에 주기적으로 긴 글을 올릴 때도 괴롭고 울적하고 쓸쓸한 기분을 글자들에 꾹꾹 퍼담았다. 브런치 또한 공황과 우울 속에 만들었으니 말은 다 했다.


   스스로를 자유케 만들겠노라 다짐하고 만든 브런치는 의도와 정확히 반대되는 글들을 올렸다. 무능과 절망을 폭로하는 글. 용기 내어 극복해 나가는 척 하지만 실은 경멸하고 싶은 제삼자를 바라보듯 하는 글. 끝끝내 나 자신에 다시 차가운 조롱을 던지며 핍박하게 되는 글만. 그러다 마음이 어느 정도 굳건해지니 글로 쓸 것이 없었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알게 된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나 미적지근한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속에서만 글을 썼다는 사실은 매우 불편했다. 언제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때부터. 그럼 나는 공교육의 품에 안기기 전부터 불행했단 말인가? 맞다. 나는 태어나길 손에 쥔 8개의 행복보다 1.5개의 불행과 0.5개의 그저 그런 일에 예민하게 구는 애였던 탓이다. 팩트란 것은 항상 불편하다. 팩트폭행이란 말이 과연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행복한 기분으로 썼던 글은 현재 연재 중인 <친애하는 여러분>이 전부다. 그 시리즈는 내게 인상을 남긴 친구들에 대한 기록이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훑으며 쓰는 글들은 즐겁다. 친구들과 함께 하며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이 되살아날 때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진짜 살아있는 기분을 느낀다. 먹색 세상은 친구들과의 관계 속 엉성한 기쁨이나 철없는 미움, 형편없는 의심들로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며 채워졌다. 약 스물다섯 편의 <친애하는 여러분>의 초안을 쓸 땐 보통 회사 점심시간이었다. 밥을 먹고 부리나케 들어와 글을 쓰던 어느 날 지나가는 과장님이 말을 걸었다. 혜윤 씨, 뭐 좋은 일 있어? 왜 이렇게 웃어. 나도 모르게 웃으며 스물대여섯 편을 썼다. 요즘 다시 꺼내어 보며 다듬는다. 즐거운 채로 글을 쓰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됐다.


   오늘 이 글만 해도 그렇다. 해가 잘 드는 좋아하는 카페에서 포화지방과 정제당 덩어리를 먹으며 쉴 새 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좋은 소설을 읽고 간만에 연초를 태운 행복한 상태로 글을 꼭 쓰고 싶어서 브런치 앱을 켰다. 금요일마다 업데이트해야 하는 <친애하는 여러분>의 연재 예정 글을 두 편 정도 수정하다가, 오늘의 시시한 하루를 꼭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자를 치다가, 어라, 나 이렇게 행복하게 글을 쓰는 게 처음인 것 같은데, 생각했고 배로 행복해졌다. 더 행복한 점은 뭔 줄 아는가? 아직 내 앞엔 그 맛있는 케이크가 서너 입이 남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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