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요일
무심코 신고 나온 신발
운동에 맛을 들인 뒤로 내 옷차림은 좋게 말하면 '프리'하고 나쁘게 말하면 후줄근한 모양새다. 조거팬츠나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위에는 맨투맨이나 후드티셔츠를 걸치고 다닌다. 다행히 그런 옷차림이 유행의 한 토막을 차지하면서 무신경하게 사회로부터 고립된 고시생의 이미지는 덜었으나 간신히 면피했을 뿐이다. 유행을 좇아 그런 편한 옷을 걸쳤을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을 들여 연출한 셀러브리티들의 모습과 나는 매우 다르다. 어차피 헬스장에서 운동하기 전에 한 번, 운동한 후에 한 번 옷을 갈아입을 생각을 하면 한때 열과 성을 다해 사모은 청바지나 슬랙스를 선뜻 입기가 쉽진 않다.
그런 고로 내가 청바지를 꺼내 단추를 채우고 청바지의 색과 톤이 맞는 신발을 꼼꼼하게 골라낸 건 오랜만의 일이다. 물론 멋진(?) 옷차림을 하고 내가 가는 곳은 트레이닝복 차림일 때와 다르진 않다. 평소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 카페에 들어가, 늘 시키던 쿠키와 커피를 시켰다. 노트북을 열고 작업을 하다가 시선이 신발에 가닿았다. 아참, 이 신발. 3년에 걸쳐 시간을 포갰던 그 애가 사준 거였지. 결혼이란 제도는 믿지 않지만 반려인의 존재를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나이가 믿기지 않게 서로 유치하게 굴었던 그 애를 떠올리는 건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나를 웃게 했던 그 애의 많은 말, 나를 울게도 쓰리게도 만들었던 그 애의 무딘 유리조각 같은 행동은 거의 잊어버렸다. 좋았던 때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나 포옹할 때 훅 끼쳐오던 그 애의 강아지 냄새(이상하게 강아지를 키우는 집은 집 전체에서 강아지 꼬순내가 동동 난다), 유치한 말을 뱉을 때 짓던 짓궂은 표정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남았다만. 그 역시 상처는 아니다. 그보다 그 애의 흔적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역시 추억은 물질로 남는 법이라는 현실적인 생각도.
이 신발을 선물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건 처음엔 흐릿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진 기억이다. 그 애가 이 신발을 내밀었을 때 나는 감흥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신발에 큰 욕심이 없었던 데다가 그다지 선호하는 브랜드는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컨버스 단화를 신고 발바닥이 피로했던 기억 탓이다. 마음은 고마운데 안 신을 것 같아서... 말 끝을 흐렸다. 차마 환불하란 말은 못 했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지만 선물 받을 때만은 이상하리만치 실용성을 따지는 구석이 있었다. 서른이 넘고도 그렇게 무신경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해 내민 사람에게 꼭 그렇게 초를 쳐야 했을까?
서운한 마음을 감추면서 그 애는 말했다. 나랑 커플 신발인데, 그래도 싫어? 나는 한결 가벼워진 어조로 답한다. 그렇다면 좋아! 이제야 말하지만 커플 신발이었다고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진 않았다. 선물을 받고 작별하기 직전의 1.5년 동안 그 신발은 열 번도 채 신지 않았다. 그 애와 작별하고 나서야 신발의 세계에 눈을 떠 이게 예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멋 부리는 날 종종 신게 되었다. 이 무슨 우스운 운명의 장난인가.
사랑은, 얄궂지만 물질
무심히 발에 꿰고 나온 신발을 보면서 지난 연애를 생각하다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또 기어코 노트북을 켜서 글로 남긴다. 사랑은 정의하기 매우 어려운 추상적인 감정이지만 결국 우리가 사랑을 자각하는 방식은 물질이다. 서로의 얼굴을 부드러운 손길로 느끼는 것. 기념비적인 날이면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 매일 말풍선을 띄워 보내는 디지털 시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종이에 펜을 들어 글을 써주는 것. 인생 네 컷으로 우리의 어느 순간을 기록하는 것.
헤어지면 받은 물건과 편지를 해진 담요짝보다 쉽게 내다 버리고 흔적을 모두 지우던 때도 있었다. 물건은 죄가 없다며 남기기 시작한 건 어떤 지점을 건너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자연스레 주고받는 물건의 액수가 올라가는 때부터. 단지 경제적인 부분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밥벌이를 시작하고 벨트 버클을 조금 헐겁게 매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는 즈음부터 우리는 원치 않던 방식으로 깨달아간다. 영원할 것 같았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은 조금씩 바뀌었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것들이 끝났다.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던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단단하게 붙어 있을 것 같던 우리 관계엔 권태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노력하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던 말은 학교에서만 적용되는 말이었다. 우리는 노력했지만 차마 극복할 순 없었다. 점점 서로의 얼굴과 어깨를 사랑으로 쓰다듬지 않게 됐고 서로의 말에 무심하게 그래, 응, 아니-만 반복했다. 내가 받은 상처와 그 애가 받은 상처를 맞대 크기를 비교하며 잘잘못을 더 따지려 들었다. 누구 하나 지지 않으려고 했다. 위태로운 감정의 난파선에 사회적인 압박이 더해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엔 기나긴 근무 시간과 조직에서의 긴장감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여유를 허락지 않았다. 불안정한 커리어를 정돈하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랐다. 시간이 주는 초조함에 한결 예민해지면서 우리 관계는 꼬르륵 가라앉았다.
핑계다. 아마 말로만 노력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물러나 져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애의 콧망울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 치던 장난이나 등을 문질러주는 행동을 그만둬버렸을 것이다. 닳아 없어질까 봐 염려하면서 사라지기 전에 꼭 붙들어 놓으려는 절박함을 잃었을 것이다. 한때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나를 손가락질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은 순간들이 분명 있었는데. 모든 걸 선물해 주고픈 마음보다 통장 잔고에 먼저 눈이 닿는 때가 오고 만 것이다.
끝내 서로 손가락질을 하다가 울다가 눈물을 닦아주지 않고 돌아선 순간도 있었지. 다행히 그런 눈물 젖은 순간들엔 무감해졌고 손날을 세워 미간에 올려 햇볕을 가려주던 시간들만 봄소식에 부지런한 이팝꽃처럼 내 생각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애써 문지르지 않으면 이젠 묻어나지조차 않는 시간들이 내게 한 켤레의 신발과 두어 장의 티셔츠, 한 벌의 니트, 그리고 지갑으로 남아 있다. 아마 너에게도 한 켤레의 신발과 한 장의 셔츠, 두어 벌의 니트, 지갑으로 남았을 터인데 너도 무딘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그것들을 대하길 바란다. 아무래도 물건과 추억은 죄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