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시리즈
E는 내 행복을 빌었다
E는 노래를 잘했다. E의 노래를 돋보이게 해 준 건 단연코 목소리였다. E의 목소리는 어쿠스틱밴드 동아리에 걸맞게 맑고 청아했다. E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환한 기분이 들었다. E는 가끔 기타를 치고 피아노를 띵똥거렸다. 동아리의 모든 보컬이 그러하듯이.
내 기억 속의 E는 항상 목젖이 보이도록 웃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E와 거의 매일 붙어 다녔다. E는 발이 넓어서 늘 바빴지만 만나자고 하면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하는 친구였다. 과제는 미뤄도 약속은 미루지 않는 '상 대학생'이었다. 만나서 하는 거라곤 누추한 동아리방이나 마찬가지로 누추한 대학가 카페, 술집에 기어들어가 있는 게 전부였지만.
빈속에 커피를 들이붓고 실컷 떠들다가 아슬아슬하게 수업에 뛰어갔다. 그러곤 또 만나서(!) 싸구려 튀김을 집어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러고도 아쉬움이 남으면 소주나 저렴한 칵테일을 마셨다. 각자의 수업 과제 얘기, 시험 얘기, 정치 얘기, 막막한 미래 얘기. 주제는 시시각각 바뀌었지만 패턴은 비슷했던 것 같다.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에 치여 지쳐갔다. 어느 날 나는 연락처를 바꾸고 대뜸 잠수를 탔다. 약 1년간 누구에게도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기나긴 잠수에 종지부를 찍고 오랜만에 Y와 E를 만났다. 이제는 간판도 기억나지 않는 상수의 밥집과 카페를 전전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눴는데, 때로는 그 밥집과 카페를 다시 가고 싶다.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없어져 버렸으려나.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면 화가 날 법도 하건만. E는 울컥한 눈으로 말했다. 연락 줘서 고마워. 나는 정말 언니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날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멍하니 있다가 조금 울었다. 나의 행복을 비는 말은 꼭 대단히 사치스러운 선물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전 같지 않을 때도 나는 종종 그 장면을 떠올린다.
E, 너의 낭만을 빌어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우리가 밤낮없이 몰려다니던 2013년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10년이라니,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달린다. 10년 동안 우리는 지극히 절친한 친구였다가, 보통의 친구가 되었다가, 이제는 인스타로 가끔 안부를 묻는 지인이 됐다. 가끔은 내게 묻는다. 우리는 왜 이런 변화를 겪게 된 걸까? 진지하거나 자책에 가까운 생각은 아니고, 정말로 궁금할 때가 있다.
이유야 어떻게 되건 탐색의 끝은 항상 동일하다. 우리의 변화는 바로잡아야 할 잘못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사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서로를 즐겁게 해 주려고, 고충을 나누고 행복을 찾아주려 시간을 내고 노력을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의 감정은 의심할 필요 없다. 너에겐 많은 일이 있었고 겪어가는 과정에서 주변인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그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비겁함이, 무심함이 너를 상처 입혔다면… 그 사실이 나를 또 상처 입힐 것이다. 너는 돌파구를 찾아 극복하고 성장했을 테니 그걸로 내 면구스러움을 조금 덜어 보겠다.
얼마 전에 만났다. E는 우리가 어울려 매일 음악과 알코올에 절어 번개처럼 쏘다니던 그 시절이 인생 최고의 낭만기였다고 말했다. 실상은 엄마아빠의 척수에서 등록금을 뽑아 먹으며 흥겹게 놀러다닌 것에 불과했지만 낭만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니 정말 그럴듯했다. E의 표현에 나도 감화되었다. 앞으로 사람들이 대학 다닐 때 뭐 했냐고 물어보면 낭만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고 다녀야겠다.
E, 너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낭만이 가득하길 빌어. 낭만 속에 행복이 움트길 진심으로 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