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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 독립영화, 영화제
영화와 자본이 만나서 멀티플렉스가 생겨났습니다. 영화와 자본이 만난 결과물이 비단 멀티플렉스만의 발생은 아닐 터인데, 저는 영화 장르, 그리고 축제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영화의 장르는 크게 세 가지 입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독립영화, 영화제입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무엇이며, 유래는 무엇인지 알아보시죠.
블록버스터란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서 흥행시킨 대작 영화를 이릅니다. Buster는 터뜨린다는 뜻이죠. 다만 돈을 퍼부어서 터뜨린 영화! 이게 아니고요. 모든 홍보를 단번에 터뜨린다는 데에서 기인한 이름입니다.
1990년대에 영화계에 대기업과 투자사가 진입하면서 제작비 규모가 두 배, 세 배로 껑충 뜁니다. 제작 편수는 줄었지만 오히려 투입된 전체 자본은 커진 것이죠.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말은 이런 상황을 등에 업고 생겨난 말입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최초로 쓴 영화는 1998년 개봉한 <퇴마록>입니다. 오컬트 판타지 흥행작인 소설을 토대로 한 장르 영화였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CG를 많이 썼다고 해요.
유래는 <퇴마록>이었으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정석 공식을 만든 영화는 1999년 개봉작 <쉬리>로 꼽힙니다. 당시 <쉬리>의 성공 요인은 분단이라는 문제의식, 과감한 총기 액션, 대규모의 투자, 대 배우 캐스팅, 공격적인 마케팅입니다. 이는 상업 영화의 성공 공식이 되었습니다.
누적 관객 582만 명을 동원한 <쉬리>는 한국 영화계의 판돈을 키우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99년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14억이었는데, <쉬리>는 무려 27억을 썼다고 합니다. <쉬리> 이후로 똑같이 수익률 50%라고 하더라도 10억 투자한 영화보다 20억 투자한 영화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서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는 수시로 갱신되었습니다. 물론… 120억을 들여 만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때문에 암흑기가 잠시 오긴 했지만요..
독립영화의 아버지: <파업전야>
그럼 한국에는 대자본 영화만 남았느냐. 아시다시피 아닙니다. 독립영화라는 또 하나의 장르가 탄탄히 받쳐주고 있습니다. 저도 독립영화를 많이 보진 않지만 그런 실험적인 영화를 하는 감독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왠지 안도감을 느낀답니다.
독립영화, 하면 어떤 인상이세요? 저는 좀 상업 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난 여러 시도를 하는 느낌입니다. 독립영화는 80년대부터 ‘서울영화집단’, ‘장산곶매’, ‘민족영화연구소’ 같은 단체들이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장산곶매’라는 제작사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보셨죠? 그런데 이 장산곶매 출신 감독들의 영화들은 다들 아실 겁니다. <공동경비구역JSA>, <알 포인트>, <접속>…
아. 요즘 어린 친구들은 모르시려나요. 그런데 제 또래 친구들은 다들 무릎을 치고 계실 겁니다.
‘장산곶매’ 프로덕션의 출연, 그리고 <파업전야>라는 영화의 흥행은 대한민국 독립영화판에서 굉장히 큰 사건이었대요. <파업전야>는 노조를 결성하려는 노동자와, 그를 저지하려는 사측의 첨예한 대립을 다룬 영화입니다. 정부는 이 영화가 파업을 선동한다고 하면서 상영을 막으려 들었고, 대학생들은 영화를 상영하려고 하면서 큰 사회적 문제로 퍼집니다. 정부는요, 놀라지 마세요. 노태우 정부는 백골단, 전투경찰을 투입해가면서 상영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피 끓는 지식의 상아탑 학생들이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본슬 씨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라면요, 못 보게 하니까 더 피가 끓어서 볼 것 같아요. 비공식 집계에도 불구하고 15만 명에서 30만 명이 영화를 보았다고 기록이 남아 있고요. 공식 상영 영화가 아니라 영화값을 받을 순 없었지만 1000원 짜리 팸플릿을 팔아 당시 1억의 수익을 냈다고 합니다.
<파업전야>의 흥행은, 영화라는 장르의 현실적 참여 가능성을 각성시킨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영화협의회가 생겨납니다. 이런 협의회의 존재는 왜 중요할까요? 독립영화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지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주체가 생겨났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점 같습니다.
삼성 나이세스가 94년부터 97년까지 열었던 서울단편영화제를 통해서 다양한 독립영화와 감독들이 대중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울단편영화제가 신인 감독의 등용문 역할을 하다 보니까 정말 다채로운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상업영화와는 결이 다른 독립영화의 장작이 된 것 같습니다.
영화제
영화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부산국제영화제일 텐데요. 1996년 생겨난 부국제 이전에도 한국에는 다양한 영화제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서울단편영화제를 포함해서 대학가에서 크고 작은 영화제가 있었고, 컬트 영화제도 있었대요.
국내 영화제의 유래는 무려 대한제국 시기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1938년, 조선일보가 부민관에서 주최한 영화제로, 무성영화 33편과 유성영화 12편을 상영했대요. 투표로 무성영화 탑텐, 유성영화 탑텐을 꼽았는데요. 재밌는 건 무성영화 1위는 <아리랑>, 유성영화 1위는 <심청>이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한반도의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는 죽지 않았다는 점이 새삼 감동적입니다.
딴 소린데, 서양의 역사학자들에게 한반도의 역사란 미스터리라고 하더라구요. 그토록 침공 당하고 원나라 때처럼 사실상 지배를 당하는 때를 거치면서도 중국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한국만의 고유한 정서와 민족주의가 살아남은 게 신기한 일이라고 합니다. 근데 듣고 보니까 나도 좀 신기했어.
어쨌든, 국제영화제에 대한 논의는 1994년부터 있었습니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국제 영화제가 가능할까? 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1996년 최초로 개최된 부국제에는 27개국 170편의 영화가 상영되었고, 18만 명의 관객이 오갔습니다. 관객의 대부분이 젊은 층이라는 사실에 외국 영화 관계인들은 매우 놀랐다고 해요. 그래서 부국제는 아시아 영화의 허브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도 시작되었습니다. 97년 9개국 38편의 영화로 시작한 이 영화제는 2023년 무려 50개국 131편의 영화로까지 커졌습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독립영화와 영화제를 아울러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변영주 감독님 얘긴데요. 요즘 여기저기 방송에 많이 나오셔서 누구인지는 대충 아시리라 믿어요. 변영주 감독은 1990년대에 영화를 만드셨는데, 2000년에 <낮은 목소리> 작품으로 부국제에서 수상하셨다고 합니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고 해서 저도 조만간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