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연습장(3)
등을 만진다
내 토끼는, 아니 우리 가족 토끼는-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검은 놈이 있고 누런 놈이 있다. 나는 누런 놈과 살고 있다. 누런 놈은 소위 '스트릿' 출신이다. 이미 세상에 내보낸 새끼들, 그리고 품고 있던 새끼들과 함께 버려졌다. 함께 새끼를 만들었을 수컷과 꼬물이 새끼들은 진작 입양 갔지만 이 누런 놈은 입양가지 못했다. 임보처를 전전했을 뿐.
오늘의 공백은 이 누런 놈과의 이야기다. 이 누런 놈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데에 지친 나머지 공격성이 심했다. 피를 볼 정도로 심하게는 아니었지만 불안하면 깨물었고, 사람이 조금만 다가서도 그르렁거렸다(놀랍게도 정말 토끼도 그르렁거린다!). 그러니 검은 놈과 다르게 누런 놈을 쓰다듬는 건 꿈에도 못 꿀 일이었다.
우리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쌓일수록, 일 년에 며칠 정도는 기분이 내키면 만지는 걸 허락해 줬다. 그래도 그르렁대는 건 멈추지 않았지만. 그런데 이 누런 놈이 내게 점점 마음을 많이 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가 자려고 누우면 침대로 폴짝 올라와 내 옆에 눕는다. 가끔 내가 외출, 여행을 하느라 집을 오래 비우고 다시 만나면 내 옷,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한참 핥아준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넷플릭스를 보다가 내 앞에 엎드려있는 누런 놈을 보니 왠지 만져도 화내지 않을 것 같아서 등을 쓰다듬었다. 조금 놀랐는지 호흡이 거칠어지긴 했지만 그르렁대거나 피하거나 깨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누런 놈의 등을 아주 살살, 그리고 원하는 만큼 만지면서 조용한 기쁨을 느꼈다.
나의 어떤 조각
생각해 보면, 누런 놈이 좋아하는 가족은 아빠와 나였다. 되려 누런 놈이 예뻐 죽으려고 하면서 먹을 걸 갖다 바치는 쪽은 엄마와 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동생이 "배신자!"라고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친 적도 있고, "자기를 가만히 놔두는 사람이 좋은가 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렇다. 아빠와 나는 누런 놈에게는 얼핏 무관심해 보일 정도로 굴었다. 멀찍이 앉아서 쳐다보고, 밥이나 화장실 또는 간식의 용무(?)가 있지 않은 이상 그냥 놔두고 내가 할 일을 했다.
그런 평화로움이 쌓여서 누런 놈은 경계를 내려놓은 걸까? 언제부턴가 책상에 앉아서 뭘 좀 하고 있으면 슬금슬금 다가와 발가락을 핥았다. 어느 날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깨보니 침대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궁둥이에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어제 누런 놈의 등을 문지르다가 문득 내 어린이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낯선 사람이 예고 없이 나를 만지는 걸 싫어했다. '낯선 사람'에는 엄마아빠를 제외한 모두가 포함된다. 엄마아빠 얼굴을 아는 동네 어른들은 "아이고 착하다", "예쁘다"는 말과 함께 나를 만지고 끌어안았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문지르거나 꽉 안거나 엉덩이를 토닥거리거나. 볼에 뽀뽀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의 따뜻한 마음은 알지만, 나는 침략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누런 놈을 가만히 보면서 어린 나를 봤다. 경계하던 아이, 만지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던 아이.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어 겁 많은 너의 등을 살살 만져주고 있어. 너랑 내가 천천히 서로를 허락하게 되어서 좋아. 너와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서 좋아. 너는 영영 겁 많은 어린 토끼여도 괜찮아.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넌 내 가족이니까.
그리고 정말 편한 마음으로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