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연습장(2)
커피와 공백과 참기름 강아지
지난 글에서 나는 내게 커피 한 잔의 공백을 허락해 보기로 했었다. 음악을 듣거나 컴퓨터를 하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커피 향만 집중해 보는 것. 시간을 정해두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아서 타이머로 10분을 맞췄다.
갓 나온 라떼는 고소했다. 향이 정말 고소한걸. 정말 고소한 라떼는 참기름 향이 나기도 하단 말이야... 참기름... 참기름... (문득 떠오른 강형욱 훈련사 채널 속) 참기름 강아지... 귀여워... 강형욱 씨 부럽다... 생각은 흘러 흘러 나도 폭신하고 부드럽고 말랑한 강아지를 마구 만지고 싶다는 데에 도달했다. 알람이 울렸다.
첫 시도에 대한 소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만. 공백이니 여백이니 나를 만나니... 그럴싸한 온갖 말을 갖다 붙인 시도의 결론이 고작 ‘참기름 강아지’라니 말이다. 이 기름진 상상과 욕망은 과연 내가 상상하고 의도했던 그 공백이 맞는가? 그냥 바보 같은 연상 게임 아니냐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인정한다. 참기름 강아지, 가슴께가 부드럽고 통통한 앞발을 가진 강아지들을 상상할 때 내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 강아지를 생각하면서는 다음에 뭘 해야지, 먹고살려면 이런 걸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취와 의무가 없는, 꼬숩고 평화로운 참기름 향의 무언가.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르륵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 돼, 좀 더 남아줘.
떠나지 마, 내 참기름!
왜. 도대체 왜. 아주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리고 절규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참기름 냄새를 떠올리고 있을 때는 들리지 않던 카페 음악 소리가 벌써 귀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내 현실 감각은 예민해지고 있었고, 내 마음은 다시 급해지고. 괴롭고. 바보 같은 연상 게임이라도 좋아. 좀 더 머물고 싶어.
어? 그게 내 본심이었다. 바보 같은 연상 게임이어도 좋았다. 나를 천천히 파괴하고 있는 낙숫물의 근원을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내 욕망을 무시하는 것. 유치하고 현실감 없는 욕망을 오래 생각하거나 입 밖에 내면 영영 추방될 것처럼 구는 것. '나는 30대'라고 끝없이 되뇌면서 현실적인 생각만 계속하는 것.
허무하다. 왜 나는 쉴 줄을 모를까,라고 말하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수년째 이야기를 해봐도 나오지 않던 결론이 이렇게 10분 만에 나오다니. 그것도 참기름 강아지를 생각하다가 나오다니. 어쨌든 오래도록 찾아 헤맨 이유를 찾은 건 긍정적인 일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그에 걸맞은 값을 입력해 주면 된다. 내 유치하고 바보 같은 생각들에 헤엄칠 시간을 주면 되겠죠? 참 쉽죠?
아니요. 10분 이상의 시간을 그런 생각하는 데에 내가 쓸 수 있을까? 참기름 강아지를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현실적인 먹고사는 길로 빠져서, 지금이라도 참기름 짜는 기술이라도 배워둬야 하나 생각할지도 몰라. 모르겠다. 일단 강형욱 훈련사 채널에서 9분짜리 '참기름 강아지'(닥스훈트 편) 영상을 보자. 오늘은 그렇게 참기름의 날로 정하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