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연습장
해야 할 일이 없는 날이란 건 이상하다
시험을 그만두고 맞이한 처음 며칠은 이상했다. 마치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혹은 도태되어 사라지고 있는 존재처럼, 공중에 부유하는 기분이다.
나는 주변에서 알아주는 성실한 사람이자 '갓생러'였다. 그동안은 늘 무엇이든 하고 있었다. 일, 공부, 팟캐스트, 운동,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쉬러' 간 여행에서도 나는 유명한 맛집, 카페, 관광지를 찾아서 질주하는 말처럼 달렸다. 그건 며칠 전에 다녀온 교토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교토에서 일행을 보내고 혼자 여행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관광지를 구경하고, 그 일대에서 유명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잠깐이지만 책도 읽었다.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잠깐 숙소에 들어가서 쉴까, 생각한 것도 잠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여행지에 기껏 와서, 숙소에 가서 쉰다고? 제정신이야? 벼락 치듯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난 쉬러 왔잖아. 왜 쉬러 들어가면 안 되는데? 왜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나는 '쉼'조차 생산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아니, '생산성 있는 하루'에 포함되는 하나의 숙제에 불과했을지도. 가운데 정원이 있는 ㄷ자 구조의 카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보며 서글픔을 느꼈다. 에어팟을 빼니 노이즈캔슬링으로 가로막고 있던 새소리가 짹짹 들렸다. 이렇게 새소리를 들은 건 얼마만이였지?
늘 무언가를 해치우며 달리는 삶에 새가 칭얼대는 소리를, 바람이 달리는 소리를 들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음악마저 강박에 가깝게 들었다. 그날 나는 에어팟을 빼버리고 숙소로 걸어갔다. 관광객의 사진 셔터 소리, 호객 행위를 하는 일본 상인의 쉬어가는 목소리, 눈을 찔러오는 기분 좋은 햇볕. 날것의 감각들을 느끼면서 생각한다. 이제는 정말로, 죄책감 없이 쉬는 걸 연습해야 해.
空白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공백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공백: 1. 글이나 그림 따위를 쓰거나 그릴 수 있도록 비어있는 부분.
2.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비어있는 상태.
'비어있는'. 무언가를 쓰거나 그릴 수도 있고 그냥 두어도 되는 상태. 나는 왜 비워둠을 배우지 못했나. 앞으로는 어떻게 이것을 배우고, 채워가야 하는가. '비움'을 채워가다니, 정말 우스운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웃음 뒤엔? 두려움이 남았다.
나는 왜 비워둠이 두려울까? 그 질문의 끝에는 아주 어두운 내 자아가 웅크리고 있다. 우울, 공황에 범벅이 되어 침대에서 꼼짝도 못 했던 시절의 나. 단숨에 그곳으로 다시 떨어지게 될까 봐 무섭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내가 나의 불씨를 꺼트릴 폭풍우가 될까 봐 두렵다. 그래서 나는 내게 잠시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으려던 것 같다.
우울과 공황에 범벅됐던 삶이 무저갱의 지옥이라면, 틈 없이 마구 몰아치는 삶은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을 계속 맞는 삶이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맞던 그 물은 결국 내 몸을 뚫어 내 혈관과 심장을 찢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조금의 틈을 허락해 보기로 한다. 딱 한 잔의 커피부터.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보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다음 일이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갓 나온 커피의 고소한 향만을 생각하는 한 잔의 커피부터. 5천 원의 틈부터 천천히 벌려가 보자.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이 <공백 연습장> 시리즈는 말 그대로, 하나의 연습장이다. 내가 나를 만나고, 내 삶의 여러 여백을 바라보고, 그것이 얼마나 조용하게 내 삶에 숨 쉬고 있는지 알아가는 연습. 움츠림과 피어남 사이의 기록을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