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 '더리더'로 보는 사람이 사는 법

모든 사람은 순간에 산다.

by 밈혜윤

사람은, 오로지 순간에 산다.

철학과 참 재밌네! 느낀 건 '닥터 리'로 불리우는 교수님의 캡스톤디자인을 들을 때였다. 연극제를 준비하면서 소설과 영화를 보고 전개와 연출, 철학적 함의 등에 대해 토의하는 형식이었다. 그중에서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다룰 주제가 도드라지는 작품이었다. 나치, 악의 평범성, 10대 소년과 30대 여성의 관계성, 읽기를 포함한 언어 능력이 사상과 죄책감에 미치는 영향...


당시 내 발제문이 생각난다. 나는 한나와 마이클의 관계가 ‘어떤’ 사랑인지 정의하고자 <사랑과 문학>이라는, 신입생 사이 최고의 인기 교양 강의에서 줏어들은 사랑의 형태들을 어설프게 나열했다. 둘의 사랑에 집착했던 이유는 그게 한나의 죽음,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유와 맞닿는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나치의 아성이 무너지고 전범 재판이 이루어질 때 한나는 자신이 문맹임을 함구한 채, 쓰지 않은 보고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가석방 하루 전날 한나는 자살한다. 이를 두고 감옥에서 글을 배운 한나가 마침내 자신의 책임을 깨닫고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의견이 있었다.


인간은 언제 살기 싫은가. 나는 “왜”보다도 “언제”를 따져보고 싶었다. 한나가 자살할 수 있는 때는 복역 기간 중에 수없이 많았다. 왜 하필 가석방 하루 전날이었나.


가석방 전날 한나는 마이클과 재회한다. 막 글을 배운 한나의 삐뚤빼뚤한 편지들에 답장하지 않았던 마이클. 마이클은 도움을 청하는 한나에게 앞으로 지낼 곳과 일자리를 알아봐준다는 말로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 부분이 한나가 자살을 결심한 이유라고 결론지었다.


인간은 어떤 때에 살고 싶지 않은가. 스스로의 의미를 잃을 때다. 사랑하는(사랑했던?) 사람에게 어떤 의미도 필요도 가치도 없어졌다는 절망감. 메아리 없이 혼자만의 공허한 외침으로 전락한 애틋함. 그런 감정들이 인간의 의미를 무너뜨린다.


영화 후반부에서 마이클은 더이상 한나를 사랑하지 않았나? 마이클은 계속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보낸다. 법대 학우들과의 토론에서 그녀를 대변해보기도 한다. 그것이 불타진 않았을지 몰라도 사랑이라 믿는다. 한때 특별한 긴장감과 애틋함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갖는 평생의, 이렇다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그것을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현존하는 사랑은 아니지만 명백하게 존재했던 사랑이다.


소년 시절의 뜨거운 눈물 흘리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마이클은 한나의 그림자를 지고 산다.


그리고 그 날은 내가 입학 이래 최초로 '닥터 리'에게 칭찬받은 날이기도 한데, 20대의 기점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닥터 리' 교수님은 철학과 내에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 양이 많고 수업 내용의 난도가 높기로 악명(?) 높았다. 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 발제문을 창피함을 무릅쓰고 읽은 뒤 내 귀에 떨어진 "흥미로운데? 잘했어"라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달콤함이 내게 세상을 바꿔 놓았다.


나는 수업 때 본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내가 뭘 모르고 아는지, 나의 무엇이 맞고 틀린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틀렸다고 반박을 듣는 게 무섭고 창피했다. 최대한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침묵을 택하는 쪽이었다. 그날도 나의 발표는 자발적 발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데? 잘했어” 한 마디가 용기와 즐거움을 준 날이었다. 교수님의 달콤한 그 한 마디가 너무 소중해서, 이후로 전공 수업에서 끊임 없이 트라이할 수 있었다. 비록 완전히 틀린 말뿐이었어도. 물론 그 뒤론 거의 칭찬을 듣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후일담이 있다.


사람은 순간으로 산다. 아니. 어쩌면 오로지 순간에 사는지도 모른다. 순간의 기쁨은 경시하고 순간의 슬픔에만 크게 앓으며 살지만, 그리고 그런 내가 싫을 적이 더 많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울고 화내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러다 웃으면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네 눈물을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