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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기적] 내 토끼가 엄마아빠를 만나던 날

by 밈혜윤

그래선 안 되지만.

반려 토끼가 있다. 그것도 두 마리나. 처음엔 하나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처음 하나'인 그 녀석이다. 손바닥만 하던 밝은 황갈색의 녀석은 자랄수록 등과 엉덩이가 까매졌다. 대조적으로 배와 꼬리 밑은 하얗다. 엄마아빠의 동의 없이 몰래 자취방에 입양했기 때문에 3년 동안 녀석의 존재는 비밀이었다. 내 친구들과 우리 삼 남매는 녀석을 몹시 사랑했지만, 엄마 아빠까지 녀석을 사랑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사랑은커녕 내치지만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엄마 아빠는 털 달린 생물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동물을 들여선 안 되지만, 변명하자면 처음부터 몰래 녀석을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정말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우리 자매는 삽시간에 사랑에 빠졌다. 어떤 사랑은 잔잔하고 느리게 타오르지만 어떤 사랑은 종잡을 수 없는 여름철 소낙비처럼 들이친다. 수염이 꼬불하고 고집이 세 보이는 얼굴의 토끼는 그날 바로 우리 자취방 식구가 됐다. 흑임자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 제멋대로의 동물과 우왕좌왕 시끌벅적한 일상을 반복할수록 내가 얼마나 지랄 맞고 양육하기 어려운 작은 인간이었는지를 반추했고, 부모님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깊이 회개했다. 감히 부모의 마음에 빗대기는 뭣하지만 무언가를 책임지고 키우는 맘은 그 녀석이 벌이는 사건사고로 발발하는 30% 정도의 어이없음과, 70%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인 것 같다.


흑임자 덕분에

흑임자가 덩치를 키울수록 엄마 아빠에게도 사랑받는 막내둥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같이 자랐다. 바라선 안 될 마음 같기도 했다. 우리 자매는 부모에게 필사적으로 우리 토끼가 아니라고 부정했으니까. 우리 엄마 아빠는 사랑이 많은 사람들인데 왜였을까, 엄마 아빠가 내보내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만약 흑임자를 떠나보내야 했다면 힘든 시기를 제대로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흑임자 물은 갈아줘야 하니까, 간식은 줘야 하니까, 화장실은 치워줘야 하니까. 애가 아프면 병원은 가야 하니까. 내가 붙박이 가구처럼 침대에만 누워있지 않고 하루하룰 붙들 수 있었던 건 흑임자 덕분이다.


3년의 눈치 게임 끝에 흑임자는 동생과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엄마 아빠는 본가에 토끼 입성은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었다. 흑임자가 본가에 들어가게 된 건 우리 자매가 작당 모의 후 '감행'한 것에 가까운데, 꽤 좋은 선택이었다. 엄마 아빠는 금세 흑임자에 마음을 열었다. 동생이나 엄마가 가족 톡방에 흑임자 영상을 올릴 때, 흑임자의 재롱에 엄마 아빠가 하하호호 웃는 소리를 들을 때, 뭉클해진다. 흑임자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이야깃거리와 마주 웃을 이유가 하나 늘었다. 좀 더 단란해졌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의미와 의도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우리 가족이 한 명도 빠짐없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 다섯 명은 서로에게 농담이라곤 하지 않고 찌푸린 미간만 들이밀며 분노와 짜증을 늘어놓았다. 매일 같이 덧바르는 날카로운 말들, 저 말은 어떤 의도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감당하기에 힘에 부쳤다. 가족의 비극은 서로의 이야기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여느 힘든 일이 그러하듯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이 우리 말끝을 그렇게 창 끝처럼 깎아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단란함과 다정함은, 미래를 엿본 이가 귀띔해주었어도 그 당시엔 믿지 못했을 거다. 미래는 알 수 없어 불행하지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재는 한결 소중하고 기쁘다.


내가 신생아 때 내 얼굴을 보려고 점심시간을 쪼개어 집에 왔다는 젊은 아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요즘 나의 토끼에게 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정말로 장난기 많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였으리라. 우리 아빠는 어느 날 아침 흑임자에게 다정히 미, 나, 리 읊어주며 귀를 만지작거렸다고 한다. 흑임자가 미나리라는 단어를 알아들었으면 좋겠는 모양이다. 엄마는 아침마다 사과며 작은 딸기며 흑임자에게 간식을 준다고 한다. 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직 어색한 우리 부모님은 매번 만진 뒤에 손을 착실히 닦으면서도 흑임자를 아낌없이 쓰다듬어 준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흑임자 덕분에 나는 내가 영유아 시절 받았을 부모님의 사랑을 되새겨볼 수 있다. 흑임자에게 아주 큰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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