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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기적리뷰]시안과 해원, 행복하길 빌어.

작가 백온유,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by 밈혜윤

남겨진 사람들

백온유 작가의 전작 <유원>이 집 책장에 꽂혀 있었다. 아마 엄마가 읽은 것 같았다. 언뜻언뜻 넘기는 페이지에 줄이 쳐져 있었다. 가볍게 읽어 보기로 생각하고 집었다. 너무 두껍거나 크지 않은 책. 파란 바탕을 나란히 보는 두 여자가 표지에 있는 책. 아무런 기대 없이 펼친 책에 쑥 빠져 들었다. 상실과 타인의 비교 아닌 비교를 꿋꿋하게 버텨내려는 유원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유원을 가슴 깊이 품고 백온유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렸다. 나오자마자 고민 없이 샀다. 전작 <유원>과 신작 <페퍼민트>는 하나의 궤를 그리고 있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페퍼민트>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남겨진 사람들이다. 시안의 엄마는 식물인간으로 '남겨져' 버렸다. 사랑하는 가족, 평생의 짐짝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저울질당하는 시안의 엄마는 작중 인물 누구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헤맸는지도 모른다. 모두의 침묵과 한숨을 듣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귀를 막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순식간에 가족을 잃은 시안과 시안의 아버지는 희망 없는 피해자, 탓할 사람도 찾을 수 없는 어리둥절한 사람으로 남겨졌다.


그렇다면 시안의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는 데 일조한 해원의 가족은 가해자인가? 아니다. 도망자이긴 하지만 그들도 고통과 죄책감 속에 '남겨졌다'. 처음엔 해원과 해원의 엄마가 뻔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책의 흐름을 따라서 가다 보면 해원의 가족을 간단하게 가해자나 악인으로 갈라낼 수 없다. 해원의 가족 역시 재난을 예상하거나 예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큼 다가온 힐난과 혐오에 흠뻑 두들겨 맞으면서, 살려고 도망쳤다. 해원의 엄마는 죄책감을 배신감으로 치환하며 견뎠다. 살려고. 예상치 못한 재난과 힐난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니까.


입술 끝 풀잎 맛

우린 누굴 원망해야 하는 걸까? 쉽게 떠나지 않는 시안의 엄마? 6년의 분투 후 지쳐가는 마음으로 차라리 살해를 생각하는 시안과 시안의 아빠? '조심성 없이' 바이러스와 재난을 흩뿌린, 그리고 야반도주해버린 해원의 엄마? 착잡하지만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누구였어도 별 수 없었으리란 사실을 계속해서 주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페퍼민트>는 누구의 죗값도 불행도 요구할 수 없게 만든다.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입술 끝을 씁쓸한 초록색으로 물들인다. 감히 누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을 비난할 수 있을까.


해원의 가족에 고통을 주고 싶어 하던 시안은 불과 한 편의 소설 분량 안에서 깨닫게 된다. 누구든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과, 피해자인 줄만 알았던 자신이 타인을 망가뜨리는 위협일 수도 있다는 추잡하고 괴로운 진실을. 시안이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페퍼민트 티백이 등장한다. 엄마의 감각을 깨우려 치르는 일종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깨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백방으로 느껴야 할 때, 최선희 선생님에게도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서로의 삶을 위해 해원과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인생은 그토록 울창하게 푸르고 쌉쌀한 것이니까.


해원과 시안이 겪은 모든 일은 너무 어린 나이에, 아니 어떤 나잇대에라도 겪지 않으면 좋았을 일들이었다. 고3과 20대를 먼저 흘려보낸 30대 언니로서 어린 해원과 시안의 이야기가 먹먹하고 울컥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질투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일들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함께이길 바랐지만, 실은 작별을 고함으로써 완성된 탈피란 걸 잘 알았다. 둘이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기를 바란다. 완연한 햇볕 속에서 삶을 부드럽게 음미하고 박하 향의 향긋한 새 삶을 써내길 바란다. 시안과 해원, 행복하길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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