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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열 문장 소설

by 밈혜윤

1. 판판한 등이 갖고 싶어

나는 늘 그 애의 판판한 등을 뒤에서 훔쳐봤다. 그 애는 말수도 친구도 적었다. 좀처럼 자기 얘기를 하는 법이 없던 그 애는 어제 취기를 빌려 가족 얘기를 했다. 나는 이제 그 애를 늘 마뜩잖아하는 그 애의 아빠, 나이가 많아 오늘내일하는 강아지, 사이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형제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하고 그 애는 웃었다. 나는 우리 아빠도 그래, 했고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오늘도 강의실에서 그 애가 판판한 등판에 가방을 둘러메는 걸 본다. 그 애가 머뭇머뭇 밥이나 먹겠냐고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판판하지 못한 등에 가방을 멨다. 판판한 등을 갖고 싶어.


2.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제 너도 자리를 잡아야지. 여자애가 공부도 좋지만 결혼을 해야지. Z는 명절 내도록 쏟아진 말에 기진맥진하게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제일 무자비한 말을 쉽게 폭격한다. Z는 화가 났다.

Z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Z가 얼마나 열심히 애쓰고 있는지, 어떤 논문을 쓰고 연구 관심사가 무엇인지 따위는 결혼 앞에 무색해졌다. 결혼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또 한 번 Z의 모든 것이 출산 앞에 무색해질 것이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만이 자신을 설명하는 기분에 Z는 조금 절망감을 느꼈고 다소 울었지만 절대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많이, 많이 다짐했다.


3. 엄마 사랑해요.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밥은 먹었니? 또 라면 같은 거 먹은 거 아냐? 청소는 잘하고? 환기를 자주 해야 한다. 너무 애쓰지 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놀러 와.

엄마는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옛날엔 잔소리 같기만 했는데 그런 걱정들로 엄마는 나를 키워냈다는 사실을 이젠 안다. 고맙다고 말하면 될 것을 어쩐지 쑥스러워서 어유, 알았어, 하고 끊었다.


4. 고독한 죽음

1992년 지훈 씨는 태어났다. 1999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2005년에 중학교, 2008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2011년에 대학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2019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2019년부터 지훈 씨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주 15시간 짜리 아르바이트에서도 나이가 많아서 잘렸고 기업과 시험에 거듭 낙방했다.

그의 나이 30세, 백세시대에도 불구하고 지훈 씨는 가는 곳마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만을 들어야 했다. 지훈 씨는 점차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이름 없는 아무개가 되었다. 아무개 씨는 4.5평의 좁은 방에서 내지 못한 고지서, 산처럼 쌓인 쓰레기 속에 파묻혀 숨을 거두었다. 조용하고 은밀하고 슬픔 없는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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